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5월 19일 비행기 타고 광주에 도착한 부대가 바로 안부웅 중령이 지휘하던 11공수 61대대였다. 그러면 영화 장면과 실제 역사에서의 상황은 어떻게 달랐는지 당시 현장 지휘를 하였던 안부웅 대대장 중언으로 들어보자.
공수부대를 분산배치
-처음 받은 작전명령은 어떤 것인가요.
“광주 시내에 7여단 33.35대대가 지서나 파출소, 주요 목진지에 나가 있는데 이 지역을 인수하여 병력을 배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배치 지점이 너무 많아 제가 항의성으로 ‘어떻게 2개 대대 병력이 맡아야 될 지역을 1개 대대병력으로 배치하라고 하느냐, 또 집결보유 운영해야 하는 공수부대원들을 분산배치시켜 무슨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고 이야기하니까 ‘작전명령이니 그대로 따르라’고 참모장이 지시하며 ‘61대대는 분산배치되어 있지만 예비로 4개 대대가 있다. 그러니 여단 입장으로는 너희가 나가도 상관없다’라고 했습니다.”
-예비로 4개 대대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아마 그 당시에 이미 7공수 33.35대대가 11여단에 작전배속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61대대 말고도 33.35.62.63대대가 더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31사단 작전참모가 와 있었기 때문에 11여단은 31사단에 작전배속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작전지시를 받고 어떻게 행동했는가요.
“5월19일 새벽 4시경 작전지시를 받고 대대 숙영지로 내려와 병력을 기상시킨 뒤 지역대장들에게 임무를 주었습니다. 1지역대는 도청.충장로.금남로, 2지역대는 동부경찰서 담당 전 지역, 제3지역대는 서부경찰서 담당 전 지역을 담당지역으로 하여 파출소 및 주요 목전지엔 최소 3~4명 이상 팀을 이루어 배치하라고 지시했으며 1~2명이 배치되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광주에 처음 가서 지역이 생소했고, 또 새벽에 어두워 지역을 잘 분갈할 수 없었을텐데 어떻게 작전지역으로 병력들이 찾아 갔는가요.
“일단 지역대장에게 경찰서를 찾아가 경찰 안내를 받으라고 했으며, 31사단에서 준 진도에 작전지역이 표시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저희 병력을 수송해 준 트럭 운전병들이 그 지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병력을 배치한 다음에는 어떻게 했나요.
“지역대장들로부터 병력 전개 완료 보고를 받은 뒤 새벽 6시 정도에 여단에 보고했습니다. 그런 다음 제가 병력 배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대대참모 2명을 지프에 태운 뒤 각 지역으로 다니며 병력 배치를 확인했습니다. 아마 09시까지 다녔을 것입니다.”
-배치 확인을 하고 다니는 도중 시위대와의 충돌은 확인하지 못했나요.
“새벽이라 그런지 시위대와 충돌은 없었습니다. 배치된 병력들로부터는 ‘이상無’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특이 상황은 없었습니다. 그 뒤 조선대로 복귀하여 잠시 정돈을 하면서 지내다 세면을 하려고 준비하느데 1지역대장으로부터 무전보고가 왔습니다. ‘충장로 파출소에 배치되어 있던 1개 지대가 시위대에 완전 포위되어 돌과 화염병으로 얻어 맞고 있는 상황이다. 지원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1지역대장에게 침착하게 다시 한번 확인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시위대에 포위돼 공수부대 6~7명 부상
-지역대장이 숨넘어가는 듯한 소리로 보고했다면 신속히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왜 침착하라고 지시했는가요.
“시위대가 계엄군을 포위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확인을 지시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지역대장이 ‘지금 병사들이 엄청나게 당하고 있으니 대대장님이 빨리 나와서 확인을 해 보십시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지프에 작전장교 등을 태우고 금남로로 갔습니다.”
-가 보니 상황이 어떻던가요.
“차량 사이렌을 울리며 가보니 어느 은행 앞에 저희 1개팀 10여명 정도가 2백여명의 시위대 포위당해 그야말로 돌과 화염병으로 타작을 받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도망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이렌을 울리고 가니까 시위대들이 후속부대가 오는 줄 알고 사방으로 도망갔습니다. 시위대가 해산하고 난 뒤에 보니 최상규 하사는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는 얼굴을 돌로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6~7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고 하던가요.
“시위대가 충장파출소를 습격했는데 출장파출소를 경계하던 저희 병력이 그것을 막지 못하고 금남로까지 쫓겨 다녔던 것입니다.”
-특전사에서 작성한 ‘광주사태진압작전(총괄)에 의하면 ’△11여단 61대대 광주지역 지.파출소 및 교차로 지역에 지대단위로 병력 배치(04시 7여단 임무 인수:31사단장 지시) △시위대 2백여 명 충장파출소에 배치된 8명을 포위하면서 화염병, 각목 등으로 파출소 기습 공격 △이에 계엄군 8명은 포위된 채 금남로로 밀려 나오며 전원 부상(화상.창상.골절)’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 기재내용이 지금 피의자가 진술한 충장파출소 상황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상황을 여단에 보고했는가요.
“여단에 즉시 보고했습니다. 시위군중들에게 포위당해 우리가 피해를 당했는데 후속부대가 없으면 재차 시위대의 공격이 예상되므로 증원을 해달라고 보고했습니다. 그 당시 시간이 5월19일 10시경이었습니다. 참모장이 알았다고 하며 ‘62.63대대가 지금 무력시위 중이니 조금 후 그 2개 대대를 금남로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조금 있다보니 차량에 탑승한 62대대가 도착, 62대대장에게 충장로 쪽을 맡아 달라고 했으며 그 뒤 63대대가 도착, 금남로 일대에서 노동청 쪽으로 경계를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11여단 전투상보에 의하면 ‘5월19일 10시40분경 충장로 일대에 학생 2백여명이 집결하여 경계근무 중인 계엄군에게 돌과 화염병을 투척, 이를 제지하자 소요군중들은 순식간에 2천명으로 증가되어 무력시위중인 62.63대대가 현장에 증원되어 소요 진압’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 당시 상황인가요.
“예.”
-62.63대대에게 병력을 증원받은 뒤 어떤 상황이 있었는가요.
“저희 병력은 원래 배치되었던 파출소 등 주요 목지역에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는 무전으로 저희 대대 지역대장에게 가급적이면 시위대와 충돌하지 말고 건물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62.63대대가 금남로에 증원되고 난 뒤에는 61대대 병력은 금남로에는 배치되지 않았는가요.
“예, 저의 대대병력은 원래 있던 장소에 그대로 있었고 금남로에는 62.63대대 병력만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61대대 각 병력들이 배치되었던 곳은 어디인가요.
“약 40여 군데 이상으로 도청과 각 지.파출소 등으로 구체적 지명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62.63대대가 금남로에 배치되어 있었나요.
“점심식사 하기 위해 조선대로 복귀할 때까지 62.63대대가 금남로에 배치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61대대는 점심식사하러 복귀하지 않았나요.
“14시경에 조선대로 복귀하여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인데 어떻게 조선대로 복귀하여 점심식사를 했나요.
“점심시간 때 즈음에는 금남로에 일부 시위대만 있었고 다른 특별한 상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광주 상황을 기술한 일부 자료에 의하면 ‘5월19일 오전의 시위에 대한 11여단의 보복은 5월18일 7공수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잔인했다. 시위 규모가 아직 작고 가담한 사람들이 몸놀림이 빠른 학생들이었던 만큼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시위를 구경하던 일반 시민들이었으며, 공수부대원들은 쓰러진 부상자들을 질질 끌고가 양손발을 잡고 트럭에 던져 올렸으며,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팬티만 입힌 채 연행하여, 이러한 유혈진압의 서슬에 눌려 19일 오전 시위는 정오 무렵 완전 해산되고 말았다’는데 사실인가요.
“당시 시위대가 일반 시민들인지 학생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체포한 시위대는 도망가지 못하게 상의를 벗기고 하는 상황은 저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http://monthly.chosun.com/cs_board/view.asp?C_IDX=26&C_CC=A518&tbKey=
첫댓글 영화는 영화 일뿐인데,영화와 실상을 혼동하신것 같은 생각이듭니다 광주 사람들은 잔혹한영화 장면이 실제의 10분의 1도 못미친답니다. 밑에 처첨한사진을 보면 저 안부웅중령의 변명보다는 실제 당했던 사람들은 피해현실은 상상 초월였다는 생각이듭ㄴ니다
폭도들이 버스로 깔아 죽인 순경들 시신 사진들 말입니까? 아니면 5월 21일 새벽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죽여 수레에 싣고 끌고 다니던 두 구의 시신 말입니까?
원래 김대중 수법은 자기부하 지가 죽이고는 상대방에게 덮어씌우는 수법 가장 악랄한 역적 마귀놈
능금님 김대중과 원수 졌나요?대다수 사람들은 전두환 죽일놈이라고 하고있어요.김대중이 총으로 사람죽이고 무고한 사람 사형 언도 안했잖요.
능금님,DJ가 대통령되고나서 전두환을 핖박하지 않했어요.전두환 같으면 김대중 벌써 죽여버렸겠죠.아마 박정희 인혁당사건처럼 DJ도 하마터면 죽을뻔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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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통제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요? 언제 누가 통제하였다는 말인가요? 만약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였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억지입니다. 그리고 광주시민군과 북한 사이에 무수한 무선 교신이 오가고 있었을 때 국가가 취하여야 했던 행동은 무엇이었던가요?
오늘 인터넷봤더니 언론 통제에대한 글을 봤습니다.언론통제는 전두환 군인들이 했었죠..미국 타임지나 외국 잡지나 당시 신문 기사가 오려진채 발간되신거 역사학도님도 아시잖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