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5일 서울 강남구 대치사거리에 있는 고려신용정보(주). 지하 1층 채권관리팀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흡사 문서기록보관소처럼 수많은 서류철이 책상 책꽂이마다 수북이 끼워져 있다. 하늘색 얇은 파일마다 겉표지에 ‘채무자 김00, 의뢰인 00물산, 채권금액 2300만원’ 식으로 간단한 메모가 적혀 있다. 채무자 개인파일들이다. 20여명에 이르는 채권추심원들의 책상마다 100여개가 넘는 파일들이 온통 뒤덮고 있다. 한 채권추심 직원이 파일을 펼쳐놓고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서울시내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본다. 채무자에 대한 ‘실사’를 나가기 전에 소재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중이다. “채권추심원들마다 요즘 신경이 날카롭다. 지금 같은 때는 말 붙이기도 힘들다. 내일이 토요일이라 쉬는 날인데 채권추심 직원들은 거의 다 회사에 나온다. 아침 8시 전에 나와서 밤 9시 넘게까지 일하기 일쑤다.” 고려신용정보 김성태 팀장의 말이다.
개인 신용불량자 연체금 44조여원
신경이 날카로운 이유는 뭘까. 요즘 채무자들은 카드사·시중은행·상호저축은행·할부금융사(캐피탈) 등 여러 군데에 빚이 걸려 있는 다중채무자들이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신용불량자 1인당 신용불량 등록건수는 3.96건으로 4가지 이상 연체채무를 갖고 있다. 여기저기 걸린 채무를 다 갚을 정도의 재산이 있는 채무자는 거의 없다. 그런 채무자라면 아예 대출금을 연체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의뢰 들어온 채권을 받아내려면 다른 신용정보회사나 카드사 채권추심팀에서 그 채무자한테 걸린 다른 채권을 회수해가기 전에 몇 시간이라도 먼저 나서야 한다. 자연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신용정보회사 추심원인 안아무개씨는 “아침 9시5분에 채무자한테 독촉전화를 걸면 ‘이른 아침부터 당신 뭐야’라면서 성질부터 내는 사람도 있다”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수북이 쌓인 채무자 파일들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한국경제는 지금 ‘연체 중’이다. 신용불량자가 300만명에 육박(3월 말 개인 신용불량자 295만6천명)하는 시대에 이르면서 한국경제가 ‘빚과의 전쟁’ 국면으로 급속히 빠져들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월 말 현재 연체금 1억원 미만인 개인 신용불량자의 연체금액은 모두 44조7천억원에 달한다. 카드사들이 떼인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다. 올해 1분기에 국민·LG·외환·우리·삼성카드 등 8개 전업 신용카드사들이 회원한테 받아내기 어려워 손실로 처리한 대손상각 규모는 1조7천억원. 지난해 1년 동안의 대손상각 규모(4조3천억원)의 40% 수준이고, 2001년의 1조4300억원을 이미 웃도는 규모다. 대손상각은 6개월 이상 연체돼 회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연체채권을 손실로 처리해 장부에서 털어내는 것을 말한다.
상호저축은행과 할부금융회사들도 급증하는 연체율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2월 말 현재 전국 115개 상호저축은행의 총여신 19조5749억원 가운데 1개월 이상 연체된 금액은 4조2869억원으로 21.9%에 이른다. 300만원 이하 소액대출 연체율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연체율이 지난해 6월 16.8%에서 올 2월에는 무려 34.9%로 뛰었다. 지난해 말 현재 22개 할부금융회사의 총여신 19조840억원 중 1일 이상 연체액은 2조5천억원으로 연체율이 13.1%에 이른다. 지난해 말 신용카드사들이 현금서비스 한도를 크게 줄이자 여러 개의 카드로 빚을 돌려막던 다중채무자들이 자금을 융통하지 못해 상환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 신용/가계 대출 문제 - 기사 목록으로 가기 네티즌 의견 남기기 [신용카드 토론장]
[경제] - 오, 빚더미!
[한겨레21 2003-04-30 16:18:00]
급증하는 연체율로 몸살 앓고 있는 금융기관들…한국경제는 바야흐로 ‘빚과의 전쟁’ 국면
지난 4월25일 서울 강남구 대치사거리에 있는 고려신용정보(주). 지하 1층 채권관리팀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흡사 문서기록보관소처럼 수많은 서류철이 책상 책꽂이마다 수북이 끼워져 있다. 하늘색 얇은 파일마다 겉표지에 ‘채무자 김00, 의뢰인 00물산, 채권금액 2300만원’ 식으로 간단한 메모가 적혀 있다. 채무자 개인파일들이다. 20여명에 이르는 채권추심원들의 책상마다 100여개가 넘는 파일들이 온통 뒤덮고 있다. 한 채권추심 직원이 파일을 펼쳐놓고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서울시내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본다. 채무자에 대한 ‘실사’를 나가기 전에 소재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중이다. “채권추심원들마다 요즘 신경이 날카롭다. 지금 같은 때는 말 붙이기도 힘들다. 내일이 토요일이라 쉬는 날인데 채권추심 직원들은 거의 다 회사에 나온다. 아침 8시 전에 나와서 밤 9시 넘게까지 일하기 일쑤다.” 고려신용정보 김성태 팀장의 말이다.
개인 신용불량자 연체금 44조여원
신경이 날카로운 이유는 뭘까. 요즘 채무자들은 카드사·시중은행·상호저축은행·할부금융사(캐피탈) 등 여러 군데에 빚이 걸려 있는 다중채무자들이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신용불량자 1인당 신용불량 등록건수는 3.96건으로 4가지 이상 연체채무를 갖고 있다. 여기저기 걸린 채무를 다 갚을 정도의 재산이 있는 채무자는 거의 없다. 그런 채무자라면 아예 대출금을 연체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의뢰 들어온 채권을 받아내려면 다른 신용정보회사나 카드사 채권추심팀에서 그 채무자한테 걸린 다른 채권을 회수해가기 전에 몇 시간이라도 먼저 나서야 한다. 자연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신용정보회사 추심원인 안아무개씨는 “아침 9시5분에 채무자한테 독촉전화를 걸면 ‘이른 아침부터 당신 뭐야’라면서 성질부터 내는 사람도 있다”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수북이 쌓인 채무자 파일들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한국경제는 지금 ‘연체 중’이다. 신용불량자가 300만명에 육박(3월 말 개인 신용불량자 295만6천명)하는 시대에 이르면서 한국경제가 ‘빚과의 전쟁’ 국면으로 급속히 빠져들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월 말 현재 연체금 1억원 미만인 개인 신용불량자의 연체금액은 모두 44조7천억원에 달한다. 카드사들이 떼인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다. 올해 1분기에 국민·LG·외환·우리·삼성카드 등 8개 전업 신용카드사들이 회원한테 받아내기 어려워 손실로 처리한 대손상각 규모는 1조7천억원. 지난해 1년 동안의 대손상각 규모(4조3천억원)의 40% 수준이고, 2001년의 1조4300억원을 이미 웃도는 규모다. 대손상각은 6개월 이상 연체돼 회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연체채권을 손실로 처리해 장부에서 털어내는 것을 말한다.
상호저축은행과 할부금융회사들도 급증하는 연체율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2월 말 현재 전국 115개 상호저축은행의 총여신 19조5749억원 가운데 1개월 이상 연체된 금액은 4조2869억원으로 21.9%에 이른다. 300만원 이하 소액대출 연체율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연체율이 지난해 6월 16.8%에서 올 2월에는 무려 34.9%로 뛰었다. 지난해 말 현재 22개 할부금융회사의 총여신 19조840억원 중 1일 이상 연체액은 2조5천억원으로 연체율이 13.1%에 이른다. 지난해 말 신용카드사들이 현금서비스 한도를 크게 줄이자 여러 개의 카드로 빚을 돌려막던 다중채무자들이 자금을 융통하지 못해 상환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마 줄기처럼 얽혀 있는 채무
빌려준 돈을 제때 못 받아 떼일 위험에 처해 있는 연체채권의 급증을 반영하듯 길거리마다
“떼인 돈 받게 해줍니다”, “못 받은 돈 받게 해드립니다”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나부낀다. 외환위기 이후 수출과 함께 한국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또 다른 축인 내수는 사실 길거리 신용카드 모집으로 대표되는 남의 돈, 즉 빚을 기반으로 한 소비였다. 그런데 장기간 경제침체로 인해 빚이 금융 전반에 심각한 연체현상을 낳고 있다. 한국경제의 시한폭탄으로 등장한 신용카드 연체는 카드발 외환위기가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동반하고 있다. 외환보유고 바닥으로 촉발된 1997년 말 외환위기가 국가채무에 따른 국가부도 사태였다면 지금의 연체 급증은 개인부도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LG카드는 카드 영업직원들을 절반으로 줄이고, 그렇게 줄어든 수백명을 4월1일부터 채권추심 업무로 재발령냈다. LG카드쪽은 “원래 채권추심 조직이 크지 않았는데 연체율이 높아지면서 내부 순환배치를 통해 추심인력을 대폭 늘렸다”고 말했다. 국민·LG·삼성카드 등의 채권추심 인력은 1천여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카드사들의 다급한 대처 못지않게 연체 급증 현상을 가장 먼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채권회수를 대행해주는 신용정보회사들이다. 금감원 신용정보팀 관계자는 “연체채권이 늘면서 신용정보회사들이 수임하는 채권금액도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고려신용정보 김 팀장은 “여기 신용정보회사에 의뢰 들어와 있는 채권금액은 얼마 안 되더라도 추심하면서 채무자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여기저기에 어마어마한 빚을 진 사람이 대다수다.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는 처지까지 왔다면 다른 데서 대출받아 돌려막기 시도를 하는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썼을 것이다”고 말했다. 예컨대 ㅇ은행 신용카드 한장이 연체되어 추심 의뢰가 들어온 경우 들여다보면 카드 대여섯장이 주르르 물려 있고, 상호저축은행에서 또 연체가 터져 있고, 은행 마이너스 통장까지 펑크나 있는 식이다. 뚜껑을 열어보면 온갖 연체 건수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엮여 따라나온다.
ㅅ신용정보 김아무개 부장은 “카드사·저축은행 등에서 터진 연체 파동이 신용정보업체에 넘어오는 데는 시간이 다소 걸린다. 그쪽에서 자체적으로 추심 노력을 기울이다가 안 되는 물건들이 우리쪽으로 오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우리한테 찾아오는 저축은행 사람들을 만나보면 회수불능 또는 회수곤란 소액채권으로 고전하고 있는 게 확연히 눈에 띈다”고 말했다. 금융부문의 연체채권 물량이 급증하자 고려신용정보는 그동안 상사채권(물품대금·공사대금 등) 70%, 금융채권 30% 비율로 영업해오던 것을 바꿔 금융채권 취급비율을 50%로 대폭 높였다. 이미 지난해 말부터 한미은행과 손잡고 신용카드 채권추심에 나섰다.
작전명 ‘꿔준 돈 받아내기’
카드에서 촉발된 연체 불길이 각 부문으로 연쇄적으로 번지면서 물품구매대금 결제에만 사용되는 백화점 카드도 부실화하고 있다. ㅅ신용정보 김 부장은 “예전에는 거의 없던 백화점 카드결제대금 채권에 대한 회수 의뢰가 요즘 심심찮게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또 고려신용정보 김 팀장은 “백화점이나 상호저축은행 등도 앞다퉈 자체 채권추심 태크스포스팀을 만들고 있다. 그쪽 추심팀에서 1차로 채권회수 작업을 거쳐 한번 걸러지고 난 채권이 우리 업체로 넘어오는 것이라 회수하기 어려운 악성채권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악성 채무가 늘면서 자연히 채권 회수율도 떨어지고 있다. 신용정보업계에 따르면, 업체마다 그리고 채권 연체성향별로 회수율이 제각각이지만 추심의뢰 들어온 채권(주로 수개월씩 연체된 회수 곤란 채권) 중 첫달 안에 회수되는 금액은 평균 10% 안팎으로 추정된다. 2∼3년 전에는 첫달 회수금액이 20∼30%에 달했는데 악성채권이
급증하면서 회수액도 대폭 줄어들고 있다. 아무리 채권추심원들이 추심에 대한 노하우를 갖고 있더라도 채무자들이 아예 갚을 돈이 없고 다른 데서 대출받아 갚을 길도 막막한 터라 별수 없는 것이다. 채권추심원들이, 추심을 의뢰한 고객들로부터 걸려오는 회수독촉 전화를 두려워할 정도다.
대손상각 처리된 금융권 불량채권이 늘면서 그동안 기업 부실채권 처리를 전담해온 한국자산관리공사도 카드 불량채권 매입에 나섰다. 카드사들은 연체가 6개월 이상 되면 대개 대손상각 처리하는데, 그동안 상각채권을 외부에 매각하지 않다가 연체채권이 크게 늘자 지난해 말부터 시장 매각에 나섰다. 실제로 자산관리공사는 최근 LG카드의 대손상각 채권 3만5천여건을 5천억원에 사들였다. 또 현대캐피탈의 대출채권 중 연체채권 3천억원어치 9만여건도 인수했다. 물론 카드사들은 채권마다 회수 가능 여부를 일일이 정밀 조사해 연체채권의 성향을 등급별로 분류한 뒤 자산관리공사와 협상을 거쳐 적절한 가격에 팔아넘긴다. 자산관리공사는, 채권마다 다르지만 대개 채권금액의 10% 수준에서 부실채권을 사들이는 것으로 알려진다. 채권금액 1천만원짜리 연체채권을 100만원 정도 주고 매입하는 셈이다. 나중에 채무자한테 150만원만 받아내도 50만원의 수익을 낼 수 있다.
자산관리공사는 채무자들과의 협상을 통해 받아낼 돈을 재조정하기도 한다. 채무재조정 작업이다. 자산관리공사 관계자는 “신용회복 지원을 위해 경제활동을 하면서 분할해 갚는 방안을 제시하고, 전혀 재산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채권 원금의 일부를 깎아주면서 빚을 갚도록 유도한다”고 말했다. 카드사에서 대손상각 처리한 채권이라도 완전히 떼인 돈은 아니다. 실제로 채권시효 5년 이내에 대손상각 채권의 20∼30%는 회수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채권자쪽이 법원에 부당이득금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하거나 언제까지 갚겠다는 각서를 채무자한테서 받아놓으면 채권시효는 다시 연장된다.
연체의 굴레에서 헤어나기 어려워
자산관리공사에서 추심 작업을 하다 회수 곤란으로 판정된 채권은 다시 채권추심전문업체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친다. 카드사에서 회수 곤란으로 손실 처리했지만 시장에서 싼값에 할인되어 팔리고, 이런 불량채권들이 채권추심회사 몇 군데를 계속 돌고 도는 식이다. ㅅ신용정보 김 부장은 “오늘은 ㅇ신용정보, 나중에는 ㅂ신용정보 식으로 계속 채권추심이 들어가면 채무자가 돈 떼먹고는 못 버티겠구나 하면서 결국 포기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신용정보업체 추심원 안아무개씨는 “00카드사 추심팀이라고 하는 것보다 추심을 의뢰받은 신용정보회사라고 하면 채무자가 받는 심리적 압박이 더 커진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본인에 대한 연체관리가 시작됐구나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채권추심업체들에 따르면 어지간한 채권은 3개월 또는 3회차(채권 변제독촉 횟수) 안에 해결되고, 이를 넘어서면 빚 갚을 의사 또는 능력이 없는 채무자로 간주해 ‘장기전’에 들어간다. 자산관리공사처럼 신용정보업체 채권추심원들도 채무자들을 상대로 빚 해결 방법을 컨설팅해준다. 고려신용정보 김 팀장은 “채무자들의 신용상태 등을 조사해본 뒤 채권금액을 다 갚을 형편이 도저히 안 된다고 판단되면 채권추심원들이 의뢰한 채권자들과 협의해서 채무자의 채무를 깎아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물론 재무상태를 파악한 뒤 상호저축은행 등에서 대출받아 빚을 갚을 수 있도록 조언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의 이런 대환대출은 채권자가 카드사에서 상호저축은행으로 바뀌는 것에 불과할 뿐 연체는 지속되게 마련이다. 웬만해서는 연체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