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도 호암미술관에 가는 날엔 꼭 비가 내린다
날짜와 시간까지 예약을 하는 시스템이라서 빗속을 뚫고 달려갔다
비가 내린다고
예정된 외출을 미루거나 취소하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물보라를 일으키는 고속도로를 천천히 달렸다
가끔은 4차선의 차들이 후름라이드를 타듯 힘찬 물줄기를 가르기도 한다
호암 근처에 오니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오늘의 주인공 니콜라스 파티의 전시를 알리는 포스터가 줄지어 서 있다
파스텔화를 주로 그리는 니콜라스 파티의 아름다운 그림에 매료되었다
규모와 색감 초현실적인 화가의 작품에 빠져
오늘 이 전시회에 오길 너무 잘했다며 연신 멋지다 좋아라를 외쳐댔다
작품이야기는 다음에 천천히 하기로 한다
환상적인 작품들에 눈이 휘둥그레져 돌아다녔다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작품 감상 후
비 내리는 전통정원 <희원>을 천천히 둘러보기로 한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어제처럼 뜨거운 열기가 비 대신 쏟아졌다면
아마도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이 아름다운 정원을 빠져나왔을 것이다
아담하고 멋진 풍광을 담고 있는 호암정에서부터
조금 잦아든 빗 속을 천천히 걸으며 정취를 맛보기로 한다
와!
뜨겁기만 할 줄 알았던 여름,
물러설 기세가 전혀 없을 줄 알았던 이 독한 여름에
숲은 살짝살짝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열린 김환기 작품전을 보고 나오던 그날
나와 짠딸은 이 디딤돌을 보고 동시에
이거 김환기 작품 점화 아냐?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벌개미취 보라색 꽃잎이 뚝뚝 떨어져 있다
아니 가을이 뚝뚝 떨어져 있다
그래,
가을은 무언가가 뚝뚝 떨어져야 제멋이지
이 정자에 앉아 시원한 차를 마시면서 지낸 여름은 꽤 낭만적이었을 거야
가을이 깊으면 더 사색하기 좋겠지
눈이 하얗게 덮여도 따뜻한 차 한잔이면 온몸이 따뜻할 거야
비 내리는 희원의 연못에는
장미셀 오토니엘의 황금연꽃과 황금목걸이가 도드라지게 아름답다
저 연꽃에 불이 켜진 듯 반짝인다
저 작품이 처음엔 생뚱맞게 보였는데
진흙 속에서 꽆 피우는 연꽃처럼 인간의 고통을 깨달음으로 승화하는 종교적 염원을 담았다 하고
영험한 나무에 뭔가를 걸어놓고 복을 비는 우리네 풍습을 떠올리면 꽤 어울리고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 작품은 여러 번 볼 수록 이해도가 높아지지
이제 미술관 카페를 찾아 다리를 좀 쉬면서 감상 후일담을 나눠볼까?
세상에~~
작고 예쁜 카페가 이렇게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니
지난번엔 왜 이 카페가 없었지? 했더니
이 전시기간에만 열리는 팝업카페라고 한다
그냥 계속 카페 해주지
어머나!
카멜카페 이렇게 아날로그 하다니
진동벨 대신에 준 번호표가 너무 귀엽고 신선하기까지 하다
22번 손님, 커피 나왔습니다
시그니처인 카멜커피와 휘낭시에 하나씩 선택했다
치즈휘낭시에와 얼그레이휘낭시에를 주문했는데
짠딸이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알려준다
얼그레이휘낭시에에 올라가는 요 작은 꽃잎이 바로
내가 봄 내내 네 번씩이나 찾아갔던 수레국화꽃잎이라고 한다
사실이야?
세상에~~~
카페에 가면 왠지 얼그레이휘낭시에를 자꾸 주문할 것 같은 이 예감
이제 점심 먹으러 갈까요?
호암에 오면 큰딸이 추천해 준 삼미당막국수집으로 가게 된다
특별히 아는 곳도 없다 보니, 그리고 오늘 비가 내려 감자전도 막국수와 잘 어울릴 것 같으니.....
짠딸은 창밖의 저 둘이 우릴 자꾸 쳐다본다며 부담스러워한다
아주 그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군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우리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 마망을 찾아본다
저 아래 불룩한 뱃속엔 실제 대리석으로 만든 알이 가득 들어있다고 한다
알을 품은 어미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데 승용차로 오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오늘도 놓치지 않고 잘 눈에 담았다
그런데 갑자기 생긴 주차요금에 마음이 상했다
이곳에 차를 세웠다면 분명 호암미술관에 찾아오는 차량뿐일 텐데
돈도 많고 부자로 소문난 삼성재단에서 주차요금을 징수하다니요
부자어른이 코 묻은 아이 돈 빼어먹는 기분일 텐데 계속 이러실 건가요?
주차요금으로 거금을 쓴 소시민이 한마디 합니다
부자가 너무 푼돈에 연연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이래서 부자가 된 건가?????
삼미당막국수 집의 도톰한 감자전을 다 먹지 못하고 반을 덜어 싸왔다
고 작은 휘낭시에가 뱃속에서 점점 불었는지
막국수와 감자전을 다 들일 자리가 없었나 보다
돌아오는 길에도 비가 계속 오락가락하더니
뜨거운 열기를 다 가져갈 듯한 빗소리가 이 늦은 밤까지 요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