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윤동주의 시
남상훈
2021. 3. 26. 22:35
조선족 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
윤동주 아닌 장애인 시인 작품
"무명 시인 저작권 강탈" 목소리
시급한 개편 통해 바로잡아야
연변 조선족 학생들이 윤동주의 시라고 배우는 시가 있는데 실은 윤동주의 시가 아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을 치면 곧바로 ‘윤동주’라는 이름이 함께 뜬다.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에 이 시가 윤동주의 시라고 소개되고 있다.
심지어는 재중국 조선족 학생들이 배우는 ‘조선어문’ 9학년 하권에 이 시가 윤동주 작으로 실려 있다. ‘9학년 하권’이란 우리나라로 치면 중3 2학기 교과서다. 2006년 12월에 첫판이 나온 교과서를 지금까지 쓰고 있는데, 연변의 모든 교사와 학생이 지난 15년 동안, 지금도 여전히, 이 시를 윤동주의 시로 알고서 공부하고 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얼른 대답할 수 있도록/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앞 3연)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
이 시는 신문의 사설에도 인용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윤동주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의 한 구절에는’ 하면서. 그런데 이 시와 흡사한 시가 2014년 12월에 나온 김준엽의 시집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에 실려 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자신 있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앞 3연)
언뜻 보면 윤동주의 시를 김준엽이 표절한 것 같다. 하지만 김준엽이란 장애인 시인이 펜을 입에 물고 쓴 시이다. 김준엽 시인은 첫 시집 ‘그늘 아래서’를 출간한 이래 지금까지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마음의 눈으로’ ‘희망이 햇살이 되어’ 등 여러 권의 시집을 냈다. 2014년에 구상솟대문학상도 받았다.
장애인 문예지 ‘솟대문학’(이 잡지는 문을 닫았고 지금은 ‘솟대평론’이 나오고 있다)의 발행인 방귀희씨는 “김준엽은 시인으로, 뇌성마비 종목인 보치아 국가대표선수로, 사회복지 전문가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 “무명의 힘없는 시인이라고 작품 저작권을 강탈당한 사실을 세상에 알려 바로잡아줄 것을 ‘솟대문학’에 호소해 와 사실관계를 알린다”고 말했다.
윤동주의 시로 알려진 시가 연변에서 간행된 윤동주의 시집에서 인용한 것이라면 더욱 심각한 일이다. 도대체 어디서 이 시를 찾아냈는지, 교과서에 떡하니 실어놓았으니 윤동주 시인이 하늘나라에서 통곡할 일이다. 여러 윤동주 연구자들에게 문의했는데 이구동성으로 윤동주는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시를 쓴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준엽의 시를 단어 몇 개만 살짝 바꾼 이 시가 15년 넘게 윤동주의 시로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으니 허탈하게 웃어야 할지 탄식하며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누가 맨 처음 김준엽 시인의 시를 몇 개 단어를 바꾸고선 윤동주의 시라고 인터넷에 올렸는지 알고 싶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연변교육출판사에서는 이른 시일 내에 교과서 개편 작업을 해 이 시를 진짜 윤동주의 시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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