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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성곽공원에 위치한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 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 도성정보센터와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입니다.
한양도성박물관에서 600년 한양도성의 역사 와 문화유산으로서의
미래가치를 확인할수 있다고합니다
저번에 설명한 돈의문 ( 소실 ,멸실 )
#서대문 (돈의문 )소실 멸실
#서소문 (소의문 )소실 멸실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서대문(西大門)이라는 명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렀으며, 인근의 새문안로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유학1915년에 철거되었다
#서소문 (소의문 )조선시대 4소문의 중의 하나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에 있던 서남향의 간문으로 소덕문·소의문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이 원래의 위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광희문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처음 세울 때는 성문과 문루를 갖추어 소덕문이라고 했다.
1422년(세종 4) 주변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할 때 소덕문도 함께 개축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1738년(영조 14) 석문, 즉 홍예를 개축할 때 왕이 문 이름을 고치라는 명령을 내렸고, 1744년에 소실된 문루를 완성한 뒤 소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곽보다 약간 높게 석축을 쌓고 가운데에 통행을 위한 홍예를 내었으며 그 위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 구조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문루를 세웠다. 그 주위에는 벽돌로 담을 두르고 양 옆에 출입문을 만들었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출처 다음 백과 발췌
#남대문
!.개설
숭례문은 조선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일명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하는데, 서울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고, 문화재청 숭례문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쯤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누각의 90%, 1층 누각의 10% 정도가 소실되었다. 이후 2010년 2월에 숭례문복구공사를 시작한 이래 2013년에 완공되어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2.내용
내용
서울 숭례문은 1396년(태조 5) 축조된 서울도성의 정문으로, 1398년(태조 7) 2월에 준공되었다. 그 뒤 1448년(세종 29) 개수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실시된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대대적인 중수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며, 화강암으로 구축한 홍예형(虹霓形: 무지개모양)의 누기(樓基)와 마름석축으로 이루어진 기층의 중앙에 홍예문이 있으며 판문에 철갑을 씌운 두 짝의 문이 달려 있다.
석축기단 윗면에는 전돌로 쌓은 여장(女墻: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돌리고 동서 양쪽에 협문을 한 개씩 두어 계단을 통하여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으며, 문의 앞뒤 여장 밑에는 석루조(石漏槽)를 4개씩 설치하였다. 기단의 양측에는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간만이 우물마루일 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고 위층은 널마루이다. 기둥은 모두 굵직한 두리기둥인데, 기둥뿌리에 나직한 하방(下枋)을 걸고 기둥머리에는 키가 큰 창방(昌枋)을 걸었다. 창방과 기둥 위에는 널찍하고 두툼한 평방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렸다.
공포는 기둥 위쪽과 건물의 앞뒷면 중앙간에는 네 개씩, 다른 기둥 사이에는 두 개씩의 공간포(空間包)를 올렸고, 양 측면에도 두 개씩의 공간포를 올렸으며 내외포(內外包)가 모두 이출목(二出目)이다. 위층에는 기둥 사이의 중방(中枋)과 창방 사이에 작은 창(窓)이 나 있다.
공포는 외삼출목칠포작(外三出目七包作), 내이출목오포작(內二出目五包作)이고 천장의 가구(架構)는 연등천장이다. 지붕은 아래위층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씌우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두(龍頭)를 올려놓았으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매머리 모양의 장식)를 올린 우진각 지붕으로 되어 있다.
또한 최근의 수리 결과, 원래는 팔작지붕이었으며 아래위층의 살미첨차의 하향을 막기 위한 헛공아가 후세의 첨가물임이 밝혀져 제거되었고, 공포 사이의 포벽(包壁)도 토벽(土壁)으로 내외면을 단청하여 연화 또는 당초문 등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후세의 공작임을 알게 되어 제거되었다.
한편 편액의 필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성문의 예자(禮字)는 오행에 배치하면 불[火]이 되고 오방(五方)에 배치하면 남쪽을 지칭하는 말인데, 다른 문의 편액이 가로쓰임이나 숭례문이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은 숭례의 두 글자가 불꽃 염[炎]을 의미하여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화산(火山)에 대하는 것이라 한다.
숭례문은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쯤에 발생한 화재로 숭례문의 2층 누각의 90%가 전소되고, 1층 누각의 10% 미만이 소실되었다. 다행히 기반 석축은 화재사고로부터 안전하였다. 화재 이후 2010년 2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숭례문복구공사 작업을 시작하였다. 복구공사는 약 3년의 기간을 거친뒤 2013년 5월 4일 복구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한국 민족 문화대백과사전 발췌 다음 백과
#남지터
남대문 맞은편 횡단보도건너면 위치해요
서대문역에 위치한 강북 삼성병원 과
도로에 돈의문 터가 표시되어있어요 정동사거리에서
돈의문 을 철거하고 도로가났다고합니다
지도에는 돈의문 터랴고 나타나는데 돈의문터를 찿는다고 아우성 ㅋㅋㅋㅋ
세상에 만상에 돈의문터가 어디있느냐고 길가는행인에게 물어보니
그련것 모른단다 여기가 서대문이 돈의문 일대 그나마
웬 젊은 대학생같은 분에게 ㅋㅋㅋㅋ
그나머지는 돈의문이 무엇인지 서대문이 무엇인지도 몰랴요 ㅋㅋㅋㅋ
어느정도 정보를 검색하고 가나 모두들 무관심 푸하하하
나중에 벽에 도로에 있는 글 보고서 상황 알게되다 ㅋㅋㅋㅋ
돈의문 박물관 마을 건물옆에 도로가 작은 돈의문 터 저렇게 벽에 그것도 아래에 부쳐져있어요
저처럼 관심 안가지고 서울사람들 신나게 바쁘게움직이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마 지나칠걸요 ㅋㅋㅋㅋ
표지석이라도 있을거랴고 찿아갔다간 천만의 만만의 콩떡입니다 ㅋㅋㅋㅋ
표지석도 없고
서대문 (돈의문은 )소실 철거
돈의터 흔적만 남아 있었어요
돈의문 터 간단한 설명서만 벽에붙어있었어요
#돈의문은 한양도성 서쪽의문으로 흔히서대문이라고불린다
최초의돈의 문 1396년 태조5년에 8개의 성문과 함께건설되었으나
1413년 (태종13년 새로지어진 서전문이 성문의기능을대신하였다
1422년 (세종 4년 )성문을 다시닫고 이지점에새로운문이세워졌다
이후새로운문이라는 뜻 새문 또는 신문이라고불렷다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유래
돈의문 일제 강점기 1915년3월 도로 확장 공사를 우해 철거되었다
이렇게 깨알같이 적혀있답니다
위치는 강북성심병원 도로 길가벽 조그맣게
바로옆에 길가에 붙어있어요
돈의 문 박물관마을 맞은편에요
무관심하면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도모르고 지나칠것 같아요
옆에두고도 모두무관심하게지나쳐도 모르죠
그련것이 어디있느냐는 답변 ,ㅋㅋㅋㅋ
#서대문 ( 돈의문 성곽길 ) 이었다고 합니다 도심지 아래에 있어요
지금현재 서대문역 일대가 돈의문 ~~~성곽일대 그리고
이정표에 권율장군 집터도 보이고 홍난파 생가도 얼핏본것 같네요 ㅋㅋㅋㅋ
#설명을 위하여 4대문 4소문을 미리 올려 보았습니다
남대문
남대문 정문앞에서
남소문 터를 찿기위해서 남산에 내려와서 헤메기
신나게 검색을 해보아도 남소문이 저도 광희문인줄알았는데
우리도 남소문터를 찿지못하고 점점멀어지고 지도선상에 나타난것 확인하고
위로를 삼으면서 남소문터는 지도선상에서 점점멀어지고 광희문을 향해서
발길을 돌렸다 실록에도 광희문과 남소문을 구별하지 못하는 신하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고하네요
다음은 검색한자료입니다
남소문은 처음부터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처음에는 도성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 즉 남산골 사람들의 통행을 위해 만들어진 작은 문이었다. 그런데 그 문이 만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죽자 풍수가들은 음양설을 거론하며 "손방(巽方, 동남쪽)은 왕가의 황천문(皇天門)이다"라는 불길한 말들을 퍼트렸다. 결국 남소문은 지어진 지 12년 만인 1469년(예종 1년) 굳게 닫히고 이후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예전에는 남소문이 있었다. 광희문 남쪽, 목멱산 봉대 동쪽에 있었는데, 김안로가 제멋대로 닫았다고 하니, 근거할 바가 없다. 숙종 5년(1679년)에 다시 설치하자고 의논하다가 곧바로 중단되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 편
광희문 뒷면입니다
#광희문
광희문은 태조 5년(1396) 도성 창건 때 동남쪽에 세운 소문이다. 광희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남소문으로 이를 흔히 수구문으로 불렀다.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곳에 세워진 수구가 거리상으로는 광희문보다는 동대문이 가깝지만, 남소문이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수구문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구문은 실제로는 시구문으로 이용되었으니, 서쪽의 서소문과 함께 도성내의 장례행렬이 동쪽 방향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도성과 궁성이 파괴될 때 광희문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 때 기록을 보면 남소문과 광희문의 자리를 혼동하기도 하고, 성문 터과 군영의 위치 확인도 어려울 정도로 파괴된 도성을 수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광희문은 도성 수축이 이루어진 이듬해인 숙종 37년(1711)에 중건에 착수하는데, 수구문을 다시 쌓고 아울러 문루도 조성하게 하였다. 수구문은 심하게 파괴되어 석축을 새로 개수하는데 시일이 많이 걸리므로 서대문 지역을 담당하는 아문에 목재를 넘겨 주어 돈의문 문루를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성문이 수축되고 그 이후 언제 문류가 중건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숙종 45년(1719)에 수구문은 옛 이름이 광희문이니, 해당 군문에서 액호를 써서 걸 것을 요청하자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영조 때에 도성의 문루가 없는 성문을 중건하게 되었는데 그 대상에 광희문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1759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성도>에는 당시 문류유무에 따라 성문을 그렸는데 수구문에는 문루가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광희문은 숙종 때에 재건된 것으로 확인된다.
광희문은 일제가 전차궤도를 부설하면서 성곽을 철거할 때도 문과 문루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문루가 파고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 후 1975년에 도로 중간에 위치하게 되어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옮기는 이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1975년 11월에 준공되었다. 광희문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인조 2년(1624)에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가 수구문을 통하여 도망갔고, 병자호란(1636)때에는 임금이 역시 이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일본 사신들은 옥수동 두모포나루로 한강을 건너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숙소인 동평관으로 향하였다. 성문은 서울성곽의 다른 소문과 같이 장방형 무사석으로 높게 축조한 육축을 마련하고 육축 가운데 홍예를 앞뒤로 설치하여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문루를 조성하였다.
와우 드디어 광희문까지 어렵게 다찿아왔습니다
우와 한양도성 순성길 각구간을 종주했다는 설레임
기쁨 충만합니다 저혼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ㅋㅋㅋ
흔히 수구문 시구문이랴고도 한다고합니다
*1396년 태조5년 도성쌓을때 창건
*1711년 숙종 37년 고쳐쌓고
*1719년 석축위에 문루를 짓고 광희문 현판을 걸었다고합니다
광희문이 남소문인줄 알았는데 남소문 따로 있었나 보네요
나중에 남소문 터에서 설명할께요
돈의문 터찿아서 3만리~~~ 인왕산 구간 투어했을시
한며칠전 사진입니다
목적지에서 헤메기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갔다가 ㅋㅋㅋㅋㅋ
김신조 일당 쳐들어와서 군데군데 부대도 설치 했다고 합니다
인왕산 구간 좌청룡 우백호
해골바위인가요
선바위인가요
아무튼 인왕산에는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많았어요
#치마바위 여성의 주름치마처럼
생겼다고 해서요 (인왕산 구간 )
도성을 끼고 있는곳을 다돌았나봅니다 때로는 여려명과
때로는 저혼자서요 ㅋㅋㅋㅋ믿거나 말거나
*6-경복 궁
*7창덕궁
*8창경궁.
*9덕수궁
*10.경희궁 종묘
*11청계천
*12.인사동
*13.북촌 한옥 마을
*14.삼청공원
*15.운현궁 (흥선대원군)
*16.석파정 (흥선대원군 )별장
북대문 (정식이름은 유교 사상에 따라 인의 예지랴고 지었으나
지를넣어 숙지문 하지않고 숙청문 청을넣어 숙청문 그려나 지금은 숙정문
숙청문은 위치상 거의통행되지 않고 장마가 지면 비그치기를 기원
영제가 기청제를 거행하였으며
또 예종때는 가문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에 듣고
음기서린 북대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 중종이후 모든기록에 숙정문나타나고 있으며
새로 복원된 현판에도 숙정문 걸려있다고 합니다
평소에 닫아두고 비상시만 개방
(이사진도백악구간을 투어했을대사진입니다 )
유일하게 가로로 읽는다고 합니다
현판 고박정희 대통령 필체랴고합니다
백악구간을 탐방하실려면 신분증 필히지참
표찰하셔야입장가능하답니다
아그리고 숙정문 창의문 입장하려면 말바위 안내소에서 아니면 창의문 안내소
#북소문 (창의문 ) =일명 자하문 현판 유일하게 엣모습 그데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광희문 혜화문 남대문 복원
#창의문 (자하문 )
전에 찍어둔 사진입니다
북소문인 창의문은 자하문이란 애칭으로 널리 불리었다. 숙정문이 항상 폐쇄된 채 제 구실을 못하였기에 이 문이 그 문의 역할까지 도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창의문을 늘상 북문이라 불렀던 것이다. 도성의 북쪽 교외로 빠지거나 가까이는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가자면 이 문이 관문이기에 이용도가 적지 않았다. 이 문 근처에는 자하가 많이 끼였는가 서울 내기들은 세검정 일대를 두고 자문밖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창의문 밖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자하문은 4소문 중에서 그 원형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문이다. 등치로는 건축면적 49.587m²(15평) 안팎의 조그마하지만 매우 단단하고 굳건한 기풍을 풍기는 건축물이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색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목계를 달아 놓은 것이다. 동소문 문루에 봉황새를 그려놓은 것이 여타 문과 다른 특색이듯이 창의문 추녀에 나무로 닭을 깎아 매달아 놓은것 역시 다른 문과 유를 달리하는 모습이다. 그 까닭은 문밖의 지세가 지네와 유사한 상이기에 그 기세를 제압하자면 지네와 상극인 닭의 꼴을 만들어 매달아 놓아야 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 (1623) 이귀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서 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대한민국 구석 구석 (다음백과에서 발췌 )
혹자는 자아문과 자하문을 착각하시는 분도 계시는데요
자아문은 세금정 있는곳에 있는곳
자하문은 창의문 애칭으로 많이 불리우기도 한다고 합니다
참고 하셔요 ㅋㅋㅋㅋㅋ
자 ~~~~~~~한양도성 4대문 4소문을 잘이해하셨나요
걷기가 목적이라도 하나랴도 알게되면 크다란 기쁨 이곘죠 공부해서 남주나
물론 급하게 장문을 쓰다보면 오타도 나타나고 정보도 차이가날수도 있어요
틀리면 알려주셔요 즉시 수정 하겠습니다
본론보다 서론이 너무 길었나요 지금부터 저와 함께
남산 목멱구간을 가보실래요 고고
도심속 사람들은 바쁘게 오가니 한양도성길이 어디 있는지
아무튼 서소문 터를 찿아가니
이련게 나타났어요
시위;병 영터
살아 있는 역사의 길 현장입니다 가다가 보니까 서소문 (소의문 터가 나타났습니다 )
표지석만 ~~~~
#소의문
*1914년일제의 의해 철거
큰도로 끼고 가니 서울한양도성 순성길 남대문 (숭례문 )
굵직한 굵직한 고층빌딩 들 은행 신문사 ~~~들도 보이고요
그래도 큰대로 길에 도성길 윤곽이 나타납니다
저 ~~~~~~~요즘 한양도성 돌의 성곽의 매력에 빠졌나 봅니다 하하하 ~~~~~~~
옛시대 돌같기도 하고고요
새로운 잘다듬어진 돌 도 나타나고요
어딜가나 커피 카페도보이고요 ~~~~~~~~
삼성 에스원도 나타나고요 오다보니
#남대문 이보입니다
아 그날도 미세먼지 작렬 안개가 자욱
오후까지 하늘이 안보였어요 ㅠㅠㅠㅠ
남대문 사진은 위에서 미리올렸고요
횡단 보도 건너서 남산공원 표지판이 나타났습니다
*남산하면 (목멱산) 마뫼등으로 불렸으며 기반암은화강암이다
*북쪽으로 청와대 뒤로 북악산 하지만 북악산 일본잔제에서 북악산
실제로 조선시대 ( 백악산 )
한성서울도성길 가보신분은 이해하기 쉽다 우리는 북악산이 더익숙하죠
나라없는설움
*동쪽은 낙산 (낙타모양이라고)
*서쪽은 인왕산
청와대는 좌청룡 우백호 길지랴고 합니다
남산에둘려싸여 청계천 물이흐르고 경복 궁 창덕궁 종묘 그리고한성길4대문 4대문
*동대문 (흥인지문)
*서대문 (돈의문)
*남대문 (숭례문)
*숙정문 (북대문) 산속깊이있어서
잘몰라요 하지만 전 다녀왔습니다 곡장까지.ㅋㅋㅋ믿거나말거나
4소문
*홍 화문 (지금의혜화문 창경궁 문하고 헷갈려서)
*소의문 소실
*돈의문 소실
*창의 문 (자하문)
한문으로 뷹을자 사용 임금님이 있는궁궐
조선 태조때 능선를따라 한양 도성을축성 외부의 침입을 막기위해서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남산전체 일대가 시립공원
서울도성 축성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라고 합니다
4대문 중앙에 보신각이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부터 서울한양도읍지 서울을 지켜주는 수호신
자연산 남산위에 봉화 5개 조선8도 소식을보고 산신령 모시고
봉수대 국사당
사진보고 설명할께요
남산은 벗꽃 그리고 갖가지 꽃들 삼무 삼청 공해가 없고
전파가 없고 근심이없고 서울시민에게 맑은공기
제공 자연의 휴식처 꽃구경 산책 볼거리
케이블카 남산타워 다양한 볼거리 제공
자물쇠 드라마 촬영지
다양하며 남산위에 저소나무철갑을두른듯
소나무가 많았으나 애국가 소절에 나오는
일본이 많이 베어버리고 아카시아등잡목
지금은 예쁜꽃 단풍이없지만 한계단한계단 친구들과 오르는길은 또한
추억~~~
자 그럼 저와함께 남산 을 올라 가보실래요
제가 남산을 오르기는 5번채입니다 '
1맨처음 오르기는 울아들내외의 푸로포즈받고
2그리고 동호인들과 이때는 그냥 몇명이서 주르룩 케이블카타고 오르다
3남산 벗꽃보려
4올해설날연휴 때 친구들34명과 오르다 팔각정까지
5,그리고 이번이 5회채 (3명 )
남산하면 누군가가 서울거주하면 다녀온산
아니면 살아도 한번도 안가본산 이랴고 말할것이다
누군가 동행하느냐 따라서 길은 다르다 느낌도 다르고
계절별 다르고 가장 정도길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이라고하는데
난 처음이다 ,이게 여행의 묘미가 아닐가싶어요
남산 성곽길을 오릅니다
성곽 찍었는데 남산 타워가 보이네요
아무튼 전 낙산 구간 흥인구간 백악구간 인왕산구간 모두 점찍고
마지막으로 남산 목멱구간 숭례문 구간 종주 성공 제자신에게 격려합니다
한양도성 박물관 관람 그리고 고궁 모두 다가보다 나중에 가면 또다르겠죠
시간약속 철저 항상 집결시간보다 모두들 30분이전 도착 ㅋㅋㅋ
거의 1.2분 상관 간격으로 동시에 도착 오늘도 나는 걷는다 한양도성길을 정처없이
유행가 가사처럼요 ㅋㅋㅋㅋㅋ
신종 바이려스 코로나 인지 무엇인지 때문에 거의 사람들이 없어요
샤브쟉 샤브쟉 살뱡샬방 올라갑니다
2020년 2.13일 남산 성곽길을다녀오고나서
다음편도 기대 해주셔요
첫댓글 폰이계속버퍼링 사진이 안보여요
자꾸등록했는데 실패해요
나중에다시올려볼쎄요
사진이 안보여서 순서가뒤죽박죽일수도
컴퓨터에서 편집하겠습니다
우와 행복님 또 존경해 현장공부보다
설명잘햇서요 수고했읍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정리하다가 보면 누군가가 제게질문하면 대답을 해줄수 있어요 고맙습니다
당신 어지그리잘알어 하면 내가 보았거든요 그리고자세히 설명을 해줄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현장에느낀이야기 어떤분에게 성곽 길문의하니 41년동안 살았는데끝이라냐
우물안 개구리 정확히 모르면 차라리
모르겠다고 하죠 본인이 다아는것처럼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산책이목적이지
오키오키 맞아요무관심한 분들은 몰라요 자동차가 네비가 길찿아가듯 스마트폰 아주멋진 교과서
길잡이 만능 백과사전입니다 그리고 잘활용하시는 선바우님은 더욱 더 최고로 멋지십니다
늘미아안되고 리딩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즐거운주말되샤요
춟발하기전에는 대강 정보를 검색하고 나서는데 그것은 빙산의 일각
직접 보고 방문 현장 에서 지리도 배우고
정답입니다거운 주말 되십시요
저도 대단한 리더쉽에 짝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