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
한국 정보통신의 기틀 마련 ……‘IT 혁명의 그랜드 디자이너’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23호(2021.12.15)
오 명 전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
프로필
△1940년 서울 출생 △1958년 경기고 졸업 △1962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1972년 미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박사 △육군사관학교 교수
△청와대 경제비서관 △체신부 장·차관 △대전엑스포 정부대표 겸 조직위원장 △KBO 총재 △교통부장관 △건설교통부장관 △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
△공학한림원 원로회원 △동아일보 사장 △경기고총동창회장
△국립암센터 초대이사장 △한국엔지니어클럽 회장 △아주대 총장
△초대 부총리겸 과학기술부 장관 △건국대 총장 △육사총동창회장
△KAIST 이사장 △한국뉴욕주립대 명예 총장 △본회 고문
△세계 박람회기구 골드메달 △청조근정훈장 △금탑산업훈장
△대전직할식 ‘대전명예시민 1호’
△뉴욕주립대 공과대학 명예의전당 1호 입성
△저서 ‘정보화사회 그 천의 얼굴’, ‘대전 세계엑스포 그 감동과 환희’,
‘30년 후의 코리아를 꿈꿔라’
대담: 홍지영(불문89-93) SBS 선임기자·본지 논설위원
서울대에서 머리 하얀 세계적 석학들 보고 싶어
세계 최고 IT인프라 종합 활용 계획 세워야
리더는 눈치 보지 말고 늘 역사 평가 생각하길
KTX 비사 등 현장서 경험한 이야기 소설 구상
새해 벽두를 열어줄 동문으로 오 명(전자공학64-66) 전 부총리를 찾았다. 오 명 동문은 육사, 비 행시 출신으로 1980년 청와대 경제비서관으로 관직에 입문한 뒤 20여 년간 전두환·노태우·김영삼·노무현 네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하며 신임을 받았다. 이후 대전엑스포 조직위원장,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국립암센터 초대 이사장, 동아일보 사장, 아주대·건국대 총장 등을 지내며 다양한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을 이끈 관료 베스트 10’, 고위 공무원이 뽑은 ‘성공한 장관 4인’ 등에 뽑히는 등 우리 시대 존경 받는 대표 원로이다.
1월 5일 서울 자양동 더클래식500 5층 휴게실에서 만난 오 동문은 한국의 대표 테크노크라트답게 노트북을 펼치며 인터뷰에 응했다. 오 동문은 지금도 본인 이름의 이메일 주소(****@ohmyung.kr)를 사용하고 있다.
-연초라 인사 오는 후배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1월 1일부터 3일까지는 손녀와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어요. 3일 동안 즐겁게 골프를 했습니다. 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 시국이라 친구나 후배들은 전화, 문자로만 대화하고 있어요.”
-1962년 육사를 졸업하고,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편입을 하셨는데, 고등학교 졸업 때에는 군인이 돼야겠다는 꿈이 있으셨나요?
“경기고를 다닐 당시 김원규 교장 선생님의 영향이 컸어요. 훌륭한 학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서울대를 가고, 이 나라의 진정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라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라고. 그 말씀에 깊이 감명을 받고 육사를 지원하게 됐죠. 그분 영향으로 당시 동기 30여 명이 육사에 지원서를 내서 11명이 합격을 했습니다. 제가 체구가 작잖아요? 걱정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한 번의 낙오 없이 육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정신력의 중요성을 몸으로 깨달은 귀중한 시간이었지요. 부친께서 ‘너는 똑똑한 사람보다 덕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제가 경쟁심이 강하고, 모난 성격이어서 그러셨던 것 같아요. 육사 졸업하고 확 바뀌었습니다. 너그러워졌다고 할까, 주변의 평가도 달라졌습니다.”
-전자공학과에 편입한 배경은 어떻게 되세요.
“육사의 이공계 커리큘럼이 다른 최상위 대학들 못지않습니다. 육사를 만들 때 웨스트포인트 커리큘럼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이 웨스트포인트의 출발이 공과대학입니다. 기초과학부터 기계, 전기 등 모든 응용과학을 육사에서 배웠습니다. 포병 장교로 복무하면서 기술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고요. 당시 군에 새로 도입되는 장비들이 모두 전자식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전자공학의 중요성을 예감했고, 더 공부하고 싶어 서울대에 편입을 하게 됐지요. 졸업할 때 주임 교수님이 우리 과에서 가장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이라고 추천서를 써주셨고, 덕분에 미국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에서 장학금을 받고 박사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1972년 귀국해 육사 교수와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행정 공무원으로 변신합니다. 배경이 궁금합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상공자원분과위에 소속돼 전자산업의 발전방안을 마련하는 일을 맡게 됐습니다. 1980년 5월의 일이었죠.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국보위는 해체됐습니다. 그때 김재익 경제 수석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했지만, 워낙 뛰어난 분으로 그 전화가 무척 반가웠습니다. 만난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미래 산업에 대한 소신을 강하게 어필했죠. 김재익 수석의 추천으로 청와대 경제 비서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후 8년여 동안 체신부 장차관을 지내며, 한국 정보통신혁명의 기틀을 마련하며 ‘한국 IT혁명의 그랜드 디자이너’란 별명을 얻는다. 전전자교환기(TDX), 4M DRAM 반도체, 슈퍼미니 컴퓨터 개발을 지휘해 세계적 IT강국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쌓았다. 뿐만 아니라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정보통신지원, 108개국, 33개 국제기구가 참여한 대전 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를 이끌어냈다. 교통부와 건설교통부 장관 시절에는 경부고속철도(KTX)와 인천국제공항 건설, 고속도로 버스 전용차로제 시행, 물류 현대화 마스터플랜 수립 등을 통해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물류 허브로 자리잡는 데 기여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삼고초려로 우리나라 초대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이 돼 바이오산업 육성과 우주기술 개발에 앞장섰으며, 우리가 만든 인공위성을 우리 땅에서 우주로 쏘아 올리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이 IT 강국이 되는 데 초석을 다진 일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체신부 차관으로 부임해 정보통신 조직의 개편과 광케이블 설치, 전전자교환기 개발을 통해 신청 당일 전화를 가설해 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서비스를 실현했죠.
무엇보다 ‘정보복지사회’라는 개념을 1980년대에 도입한 일은 전 세계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정보의 격차가 빈부의 격차를 더 심화시킬 것으로 보고, 시골에 사는 사람들도 저렴하게, 동일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도시와 같은 인프라를 깔고, 정보문화센터를 만들어 전 국민에게 컴퓨터 무료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다양한 직을 맡아, 많은 일을 이뤄낼 수 있었던 비결이라면.
“아마도 소신껏 일한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일 것입니다. 리더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같죠. 부하직원을 아끼고 사랑할 때 강력한 리더십이 나옵니다. 제가 중점을 두고 해온 일은 언제나 조직관리였습니다. 전문적인 일은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해주었고, 저는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가장 효율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방법을 찾아내 아랫사람들이 편하게 일하도록 하는 데 애를 많이 썼습니다. 또한 리더는 윗사람 눈치 보지 말고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오 동문은 무엇보다 “대한민국이 힘든 시기에 태어난 덕분에 늘 해야 할 일, 도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며 “그 중심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나에겐 큰 축복이었다”고 덧붙였다.
-20여 년 전 정보통신 혁명을 주도했던 한국이 인공지능,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으로 이야기되는 4차 산업혁명기에 큰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IT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그 인프라 활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제대로 안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코로나 사태에서 온라인 교육하는 데 문제가 많잖아요. 더 중요한 것은 AI 혁명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인데, 기술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의회제도, 자본주의, 정부 조직, 기업 환경, 교육 문제 등 한꺼번에 다뤄야 하는데, 기술적인 문제만 갖고 이야기하는 감이 있어요. 종합적인 장기 계획을 세워야 하거든요. 원론적으로 4차 산업혁명 후 과연 우리가 행복하게 될까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주제입니다. AI 로봇을 소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격차, 로봇과 경쟁에서의 도태 등 낙관적이지만은 않으니까요.”
-아주대, 건국대 총장도 역임하셨습니다. 대학 교육에 관한 생각도 많이 하실 것 같습니다.
“4년제 대학 중심에서 평생교육으로 패러다임을 바꿔 나가야 합니다. 2050년 태어나는 아이들은 평균 수명이 150세가 된다고 전망하는데, 지금 교육 시스템으로 갈 순 없죠. 6-3-3-4 교육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해요. 20살까지 배운 지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죠. 계속 배우고 익혀서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해 나가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대학에서는 인성교육,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요. 이번 코로나 사태 때 대학 교육을 바꿀 수 있는 기회였다고 보는데, 학과, 대학 간 경계를 허물어야 합니다. 누구나 온라인을 통해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시대잖아요.”
-경기고 총동창회장, 육사 총동창회장도 역임하셨죠?
“경기고 100주년 때 동창회장을 맡았습니다. 성대한 이벤트를 앞두면 이런저런 잡음이 일어나잖아요? 큰소리 한번 안 내면서 100주년 행사를 잘 치렀습니다.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을 돌아가실 때까지 찾아 뵀어요. 동창회장이 되니까 학교 직원들이 그걸 알아줘요. 교직원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육사총동창회장의 경우 사성장군 출신이 하는 게 관례인데, 저를 추대해서 영광이었지요.”
오 동문은 이 대목에서 이희범 회장과의 인연을 들려주었다.
“과기부총리 할 때 이희범 회장이 산업자원부 장관을 했어요.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으로는 진대제 사장이 있었고요. 모두 전자공학과 출신 아닙니까? 원래 과기부, 산자부, 정통부가 다툼이 많은 부서인데, 세 사람이 사이 좋게 잘 끌고 나갔어요. 이공계 출신 장관 중에 이희범 회장이 동계올림픽조직위원장도 하시고 다양한 분야에서 리더십을 보여준 보기 드문 분이죠.”
-서울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제가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의 유니버시티 프로페서인데, 서울대도 유니버시티 프로페서 제도를 도입하면 어떨까 싶어요. 첨단 학문의 교수들은 어느 특정 학과에 넣을 수 없어서, 대학 본부 소속으로 두고 여러 학과에 연관되는 연구를 하도록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첨단 학문의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활동 할 수 있도록 해준 거죠.
또 하나 덧붙이자면, 대학, 학과 간 벽을 허무는 것을 선도적으로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온라인으로 얼마나 좋은 강의들이 많습니까? 시대적인 흐름을 유연하게 받아들여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정부도 대학 기부금 등에는 100% 세제 감면 혜택 등을 부여해서, 연구 활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고요.”
-모교 재학생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경쟁에 이기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폭넓고 풍부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봉사와 희생, 그리고 보람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하버드 대학이 뛰어난 점은 학생들에게 희생과 봉사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등 오지에 가보면 하버드 출신들이 항상 있어요. 서울대생도 그래야죠.”
오 동문은 인터뷰 말미 두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리더십 관련 책을 만드는 일이고, 두 번째는 제가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소설로 쓰는 일입니다. 일본 작가가 쓴 ‘불모지대’란 유명한 소설이 있지요? 역대 대통령들의 핵무기에 대한 열망, 고속철도 건설 시 비하인드 스토리 등 재미있는 내용이 많거든요. 여력이 된다면 꼭 해보고 싶은 일입니다.” 정리=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