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보다 승리를 원하다
1917년도 서서히 저물어가는 11월 11일, 독일 제국군 참모차장(帝國軍參謀次長)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1865∼1937)는 다음해의 전략(戰略)을 논의(論義)하기 위한 회의(會議)를 최전선(最前線) 부근인 벨기에의 몽스(Mons)에서 소집(召集)합니다.
루덴도르프는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1847. 10. 2~1934. 8. 2)와 더불어 제1차대전 초기에 독일의 자랑인 탄넨베르크(Tannenberg)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명장(名匠)이었습니다.
↑탄넨베르크 전투 당시 전선을 시찰하는 루덴도르프 (中) (Getty Images)
당시 독일 제8군 사령관(司令官)과 참모장(參謀長)으로 승전(勝戰)을 이끈 두 인물은 1916년 참모총장과 참모차장이 되어 군권(軍權)을 잡은 후 전쟁을 진두지휘(陣頭指揮)하였습니다.
그런데 루덴도르프는 국민적 인기(國民的人氣)를 발판삼아 수상(首相) 베트만 홀베크(Theobald (Theodor Friedrich Alfred) von Bethmann Hollweg, 1856. 11. 29~1921. 1. 1)를 실각(失脚)시키는데 관여(關與)하는 등 정치(政治)에도 깊숙이 관여(關與)하였습니다.
비록 참모차장의 직책(職責)이었지만 야심가(野心家)였던 그는 이처럼 정치까지도 좌지우지(左之右之) 하는 독일의 최고 실력자(最高實力者)였습니다.
↑작전을 숙의하는 힌덴부르크, 카이저, 루덴도르프 (좌에서 우)
회의(會議)를 소집(召集)한 그는 우선 전황(戰況)부터 파악(把握)합니다.
동부전선(東部戰線)은 곧 정전협정(停戰協定)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豫想)되었으므로 독일은 서부전선(西部戰線)으로 전력(戰力)을 집중(集中) 할 여건(餘件)이 조성(造成)된 상태(狀態)였습니다.
더구나 전술(戰術)한바와 같이 1917년 말에 있었던 프랑스군의 대공세(大攻勢)를 패퇴(敗退)시켜 독일군의 사기도 좋았습니다.
비록 독일이 해상봉쇄(海上封鎖)로 곤란(困難)을 겪고 있지만 유럽의 여러 점령지(占領地)에서 많은 물자(物資)를 수탈(收奪)하여 그럭저럭 전쟁수행(戰爭遂行, conduct of war)은 가능(可能)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독일의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크룹(Kruppe)의 공장, 독일은 전쟁 말기에 물자가 부족하여 많은 애로를 겪었습니다
루덴도르프는 장기 방어전(長期防禦戰)으로서 연합군(聯合軍)을 지치게 한 후 협상(協商)을 벌여 유리(有利)한 위치(位置)를 점한 상태로 종전(終戰)을 꾀하고자 하였던 수세적(守勢的)인 기존(旣存)의 전략을 폐기(廢棄)하고 미군 주력(美軍主力)이 전선(戰線)에 투입(投入)되기 이전(以前)에 대공세(大攻勢)를 펼쳐 연합군을 격멸(擊滅)시키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主將)합니다.
별다른 실권(實權)을 행사(行事)하지 못하였던 참모총장(參謀總長) 힌덴부르크는 루덴도르프의 결정(決定)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힌덴부르크가 이러하니 그 어떤 장성(將星)들도 루덴도르프에게 반대(反對)를 표(票) 할 수 없었습니다.
↑루덴도르프는 참호를 튀어 나와 전쟁을 끝낼 대공세를 구상합니다
독일군 참모본부(參謀本部)는 즉각 공세지점(攻勢地點)을 선정(先正)하는 작업(作業)에 착수(着手)하였습니다. 격렬(激烈)한 토론(討論)을 거친 결과(決科) 스위스(Swiss) 국경(國境)에서 북해(北海)에 이르는 서부전선은 그 중간(中間)이라 할 수 있는 베르덩(Verdun)을 기점으로 남측(南側)은 지형(地形)이 험악(險惡)하여 대규모 돌파(大規模突破)가 힘든 반면 베르덩에서 북해에 이르는 북서부 2백여 마일은 평원(平原)이라 돌파구 형성(突破口形性)에 적당하여 예정지(豫定地)로 쉽게 낙점(落點)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선 전체(戰線全體)를 동시(同時)에 돌파하기는 애당초 불가능(不可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