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夜)
밤
정약용(丁若鏞, 1762~ 1836)
저무는 강 마을 성긴 울타리 너머 개 짖는 소리
찬 물결에 별빛 부서지고 눈 덮인 먼 산이 외려 밝구나
먹고살 일 대책 없건만 책 읽을 등잔불은 있네
깊은 근심 끝이 없으니 한평생을 어찌 마칠까
黯黯江村暮 疏籬帶犬聲(암암강촌모 소리대견성)
謀食無長策 親書有短檠(모식무장책 친서유단경)
水寒星不靜 山遠雪猶明(수한성불정 산원설유명)
幽憂耿未已 何以了平生(유우경미이 하이료평생)
1800년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 쪽에서 남이 계열인 정역용 형제를 천주교와
연결 지어 귀양 보냈다. 정약용은 1818년 귀양에서 플려 승지(承旨)를 제수
받았ㅇ,나, 석 달 만에 사직하고 고향 남양주로 낙향한다. 그때까지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 세력의 견제를 견딜 재간이 없어서다. 두물머리 근처 고향 집에서
먹고살 일을 걱정하는 다산 선생의 모습이 현재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우리나라
노인들의 현실과 겹친다. 끼닛거리가 걱정일 만큼 어려운 처지에 세상을 또한
아담할 뿐이었던 다신 선생의 근심은 무덤 속에서 조차 그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작가소개]
정약용(丁若鏞) : 조선시대사인물
조선후기 『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
실학자. 이칭 : 귀농(歸農), 미용(美庸), 사암(俟菴), 탁옹(籜翁), 태수(苔叟),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다산(茶山), 문도(文度)
분야 : 조선시대사
성격 : 유학자, 실학자
성별 : 남
출생일 : 1762년(영조 38) 6월 16일
사망일 : 1836년(헌종 2) 2월 22일
본관 : 나주(羅州)
저작 :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여유당전서 등 500여권의 저술
경력 :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관련사건 : 신유사옥
<정의>
조선후기 『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실학자.개설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되었던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통치방식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는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근기학파’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정약용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고, 소시적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양근(楊根) 땅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다.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蔭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주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양반이며 그 이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했지만, 그의 집안은 당시로서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의 생애는 대략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생애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때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이 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의 경전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1789년에는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이벽(李檗)·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서학으로 인식하고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1791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이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정약용의 생애에서 세 번째 단계는, 유배 이후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그의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진(先秦) 시대에 발생했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해서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의 일표이서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유배기에 쓰여졌다.정약용의 생애에서 마지막 단계는,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이 시기에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尙書)』 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그리고 그는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적 자료를 정리하기도 했으며,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편찬하였다.이상에서 살펴 보았듯 그의 생애는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위기에 처한 조선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그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선진유학을 비롯한 여러 사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그가 유배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다시 서학에 접근했다는 기록도 이와 같은 부단한 탐구정신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그는 학문 연구와 당시 사회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지성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약용(丁若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