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신대원에 다닐 때 하루는
새벽 1시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좀 만나줘.”
“야, 새벽 한 시야. 내일 만나. 끊어.”
“오늘 꼭 만나야 돼.”
간절히 만나달라고 해서 친구를 만나러 갔다.
“빨리 얘기 해, 영하 30도에 자고 있는 사람은 왜 불러냈어?”
친구는 말을 꺼내질 못 하고, 자꾸 한숨만 내쉬었다.
“말 안 할 거면 나, 갈래.”
“나 사랑에 빠졌어.” 확 때려주고 싶었다.
“네가 사랑에 빠졌다고 새벽 한 시에 나를 불러내냐? 간다.”
“아니야, 나 실은 중독이 있어.”
중독이라니 문제가 심각해졌다.
“무슨 중독인데?”
친구는 주위를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다.
“인터넷 포르노 중독이야.”
나는 깜짝 놀랐다. 친구가 말을 이었다.
“아주 사랑스럽고 귀하고 순결한 여인을 만났어.
그런데 나같이 더럽고 음란한 것이 어떻게 그런 여인에게
‘사랑합니다, 교제해주세요, 결혼해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겠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안에 해결책이 없었다. 겨우 한 마디 했다.
“교회는 가 봤냐?” “응.”
“목사님이 뭐라고 하시든?” “끊으래.”
“돼?” “안 되더라.”
“야, 나도 모르겠다. 기도해줄게.”
기도하고 친구를 보냈다. 친구는 낙심하는 얼굴로 돌아갔다.
다음날 그 친구는 존경하는 교수님을 찾아가 다 털어놓고 이야기를 했다.
교수님은 친구의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그거 끊으려고 하지 마.”
“예?”
“끊어야지, 똑바로 살아야지,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만큼
넌 이미 결박당해버렸어. 거기서 헤어나올 수 없어.
네 모든 생각과 관심은 다 거기 가 있어.
그리고 그렇게 다짐해서 끊어져도 문제야.”
“네? 왜요?”
교수님은 두 가지 문제를 말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 거래 관계가 시작이 돼.
‘하나님, 끊었습니다. 그러니까 복을 주세요.
여기까지 했으니 은혜를 내려주세요.’하는 거지.
그러다 어려움과 고통과 환란이 오면 십중팔구
‘하나님, 필요 없습니다. 여기까지 했는데 이게 뭡니까?’
하면서 교회를 떠나 버려.
두 번째는 못 끊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시작해.
‘나는 끊었는데 왜 못 끊느냐?’라는 거지.
나보다 못난 사람 앞에서는 교만이요,
나보다 잘난 사람 앞에서는 열등감이 돼.
끊임없는 비교의식 속에서 내 영혼이
메말라가는 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된다고.”
“교수님,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네가 사랑하기를 원하는 그 여인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봐.”
“네?”
“그 여인을 사랑할 수는 있잖아. 그녀를 위해서 편지도 쓰고,
돈을 모아 꽃다발과 선물을 사주고, 노래를 만들어 연주를 해줘.
마음을 다해서 한번 사랑해봐.”
그로부터 일 년 후에 나는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야, 어떻게 됐냐? 그 중독.”
“아, 그거? 없어졌어.”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어떻게?”
“몰라. 그녀를 미치게 사랑하는 사이에 없어지더라.”
복음은 죄를 억제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억제한다고 끊어질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 거 같았으면 주님이 안 오셔도 되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흠모의 대상,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분,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의 광채를 발하시는 그분을 바라보아야 죄가 없어진다.
......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살지 못하는 인생을 다시 살아준
그분을 바라보라. 너의 죄를 지고 간 어린양을 바라보라.
그러면 너의 인생은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
다니엘 김, <철인(鐵人)>
지혜로운 스승이로다.
사람을, 그 자신에게서 떠나
주님을 바라보게 하니 참 가르침이로다.
죄의 무서움을 얕보지 않고
죄와 싸울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니 귀한 지혜로다.
죄와 싸워 이기고 오라 하지 않으니
우리 약함을 아시는 참 긍휼이로다.
모든 죄를 인정하고 맡기라 하시니 참 은혜로다.
우리 힘으론 이길 수 없는 죄악을
넉넉히 물리치시고 떠나게 하시니 참 능력이로다.
죄를 떠나 참 사랑에 이르게 하시니 참 복음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