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5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확실히 설명해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소위 ‘단식 논쟁’입니다.
이는 단순한 단식 논쟁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논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이 있는데, 신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왜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율법보다 앞서시고 당신이 아니면 율법은 지켜질 수 없는 것이었음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은 확실히 좋은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율법도 좋은 것이지만, 그리스도 없이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계약에 심취한 이들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명제로 유명합니다.
그가 타인은 지옥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출구 없음’(No Exit)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출구 없음’의 연극 대본을 봅시다.
설정은 신비한 방으로, 주인공들이 죽음 이후 일종의 사후 세계 역할을 합니다.
이 방은 거울, 창문 또는 탈출 수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캐릭터가 소개됩니다.
‘가르생’은 언론인이자 평화주의자입니다.
가장 먼저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을 영웅이자 순교자로 소개하지만, 실상은 겁쟁이요 배신자였습니다.
다음 ‘이네스’가 등장합니다.
레즈비언 우체국 직원인 그녀는 교활하고 잔인했습니다.
마지막 ‘에스텔’은 외모에 관심이 많은 상류층 여성으로 가장 늦게 도착합니다.
그녀는 연인과 자신이 낳은 아기를 죽인 사실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전생과 저주받은 이유를 천천히 드러내면서 연극이 전개됩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얽히면서 드라마는 더욱 강렬해지고,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합니다.
가르생은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방을 떠나고 싶어 하고, 이네스에게 자신이 영웅처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레즈비언인 이네스는 에스텔을 유혹하려 합니다.
에스텔은 유일한 남성인 가르생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고 끊임없는 좌절과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극은 등장인물들이 영원히 심리적 고통 속에 갇혀 서로나 자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출구가 없다면 이러한 자기와 타인의 지옥 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방에 창문이 있었다면, 그 창문 밖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보였다면 어떨까요?
그곳에 대한 희망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을 희생할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봉쇄 수도원이 그렇습니다.
희망이 있으니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함께 창밖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둘이 서로만 바라본다면 둘은 타버립니다.
부부도 자녀를 키우면서 사랑을 확장해야지 자신들 안에만 갇혀있으면 타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창문이 되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죽음과 부활로 사랑으로 인해 도달하게 될 저 세상을 창문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피조물의 본성상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에 투신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희망 없이는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는 게 불가능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신약에 와서야 완성됩니다. 부부 갈등을 겪다가 공공의 적을 만나
함께 싸우다가 다시 부부관계가 좋아진다는 설정의 ‘미스터 앤드 미세스 스미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둘이 서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며 걷는 것입니다.
부부도 자녀를 낳지 않고 자신들만의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려고 하면 결국엔 사랑이 소진됩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사랑에 그리스도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하면 어디로 나아가게 되는지 보여주는 닫힌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창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5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마르 2,18-22
단식은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단식 이야기만 나오면 돌아가신 한 선교사 신부님 얼굴이 떠오릅니다.
체구가 크셔서 그런지 드시는 것을 엄청 좋아하셨습니다.
굉장히 낙천적이고 유머 감각도 탁월하셨습니다.
자주 사용하시던 농담도 기억납니다.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것은?
강론입니다.
길면 길수록 좋은 것은 맛있는 소시지입니다.
둘이 뒤바뀌면 최악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음식을 절제해야 하는 사순 시기만 되면 무척 힘들어하셨습니다.
한번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피정 강의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순 시기에도 우리 살레시안들은 잘 먹어야 합니다.”
그 말씀에 제 머릿속은 큰 혼란의 소용돌이가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잘 먹고, 그 힘으로 더 아이들을 사랑하고, 더 운동장으로 자주 나아야 합니다.”
교회의 규정에 따라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단식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식하는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단식의 배경에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식과 성덕은 늘 함께 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 가까이 서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통제하고 지배함을 뜻합니다.
단식은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단식하는 동안 한 인간은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은총에 민감해집니다.
단식을 통해 한 인간은 악과 유혹을 억누르고 영혼을 드높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축일 전에 신자들을 단식에로 초대했습니다.
영성가들은 단식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단련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이토록 단식이 영성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단식과는 별로 상관없이 살아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 2,18)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대답, 너무나 뜻밖인 대답이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 2,19-20)
예수님 당신이 지상에 머무시는 기간은 하느님과 인류가 혼인을 맺고 잔치를 벌이는 시간임을 선포하십니다.
혼인 잔치 기간에 어울리는 것은 음주나 가무, 노래와 축제이지, 단식이나 고행, 슬픔이나 곡소리는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즐겁고 유쾌해야 합니다.
갖은 인상을 다 쓰면서 단식할 것이 아니라,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할 것입니다.
다만 혼인 잔치가 끝난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셔서 신부의 집을 마련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로 선정된 교회는 아직 결정적으로 신랑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는 강생과 종말 사이, 첫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에 끼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기쁨과 슬픔, 획득과 미획득, 축제와 단식이 거듭 교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하여 늘 새로>
2024. 01. 15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마르코 2,18-22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리하여 늘 새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굳어진 나
다시 부드럽게
그리하여 늘 새 나
희뿌연 믿음
다시 초롱하게
그리하여 늘 새 믿음
빛바랜 희망
다시 새하얗게
그리하여 늘 새 희망
미지근한 사랑
다시 뜨겁게
그리하여 늘 새 사랑
맛없는 삶
다시 맛깔스럽게
그리하여 늘 새 삶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