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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7월 22일 금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루카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를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로 소개한다. 일곱은 완전을 상징한다. 그만큼 강했던 ‘악의 세력’을 떨쳐 내신 분이란 표현이다. 성녀는 이후 철저하게 예수님을 추종했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체험했던 분이다. 성령 강림 후 성모님과 함께 에페소에서 살다가 그곳에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성녀의 출신지가 갈릴래아의 휴양 도시 ‘막달라’였기에 ‘마리아 막달레나’로 부르고 있다. ‘막달라의 여자 마리아’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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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요한 20,1-2,11-18)
Jesus said to her, "Mary!"
She turned and said to him in Hebrew,
"Rabbouni," which means Teacher.
말씀의 초대
아가의 저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밤새도록 찾는 애절한 여인의 사랑을 전한다. 아가는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의 깊은 사랑의 관계를 드러내는 영성적 의미를 갖고 있다(제1독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랑이 넘치는 봉사’, ‘변함없는 사랑’의 여인으로 묘사될 만큼 주님을 향한 사랑이 간절했다. 어둠이 아직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에 막달레나는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제자들에게 전한 여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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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보듯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만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본래 이름은 그때 당시 너무나 흔했던 ‘마리아’인데, 그의 출신 지명을 붙여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가 누구인지 역사 속에서 정확한 신원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석가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에 나온 여인들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간음하다 잡힌 여자(요한 7,53), 일곱 마귀가 들린 여인(루카 8,2),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요한 12,3) 등, 복음 속의 다양한 여인을 대변합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세상 온갖 것에 시달리며 순탄치 못한 삶을 산 여인, 죄로 얼룩진 상처와 아픔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고통과 혼란 속에서 주님을 만나, 주님께 은혜를 입었고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슬픔, 기쁨, 연민, 사랑, 감사, 회개 등 온갖 종류의 눈물을 다 흘린 ‘눈물의 여인’으로 대표됩니다.
오늘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빈 무덤 앞에서 또다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오늘 마리아가 주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흘리는 눈물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마지막 눈물’이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묵시 21,4 참조).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부활의 세계에서, 우리도 언젠가 마리아 막달레나의 얼굴이 되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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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없이 돌아가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도 능력을 감추시고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착잡한 마음으로 무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습니다. 놀란 막달레나는 시신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즉시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립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보고입니다. 돌아가셨다고만 생각했지 부활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활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대반전’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대반전의 여인’입니다. 루카 복음에는 그녀를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만큼 강력한 ‘악의 세력’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완벽하게 본모습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서는 하셨던 것입니다.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온몸으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십자가의 길도 함께 걸었고 죽음의 순간에도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부활 사건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여인이 됩니다. 철저하게 사랑했기에 ‘철저하게 사랑받았던’ 여인이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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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의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을 남녀 간의 애정으로 노래한 것이 아가이다. 여인은 사랑하는 애인을 찾아 나선다. 그녀는 성읍을 돌아다니며 광장과 거리에서 사랑하는 이를 찾고 있다. 스승 예수님을 찾고 있는 막달레나의 모습과 같다(제1독서). 무덤을 찾아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그러나 알아보지 못한다. 너무나 뜻밖이었기에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예수님을 알아본다. 사랑이 담긴 목소리를 듣자 곧바로 알아본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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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가까이 지냈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인지요? 아니면 막달레나의 슬픔 때문인지요? 아무튼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시신을 옮긴 장소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 바뀝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자 금세 알아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아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눈으로 확인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은총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부르셨을 것입니다. 사랑이 밴 목소리였기에 막달레나는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사랑이 밴 목소리로 부르면 누구나 응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목소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은 그분께서 부르시는 목소리입니다.
꾸중이 아니라 애정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막달레나처럼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모든 사건에 담긴 예수님의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시인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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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감을 발견한 개는 끝까지 그것을 쫓아간답니다. 그러나 사냥감을 보지 못한 개는 다른 개가 달리는 것을 보고 뛰다가 곧 멈춘답니다. 자기가 달리는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끝까지 찾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가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면 얻고, 찾으면 발견하게 된다고 일찍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녀는 열심히 찾음으로써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 없이는 끝까지 찾을 수도 없고,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 찾는 일은 허사일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만이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중가요의 가사에도 있지 않습니까. “마음 없이 부르는 소리는 안 들려.”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그 목표를 보았습니까? 끝까지 달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찾는 마음에 사랑이 있습니까?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승국신부-
<그분께로 가까이>
마리아 막달레나가 새 삶을 시작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동기는 한 소중한 만남이었습니다. 부드럽고, 친절하고, 다정하고, 섬세한 성품을 지닌 사람,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을 그간 마리아 막달레나가 만났었던 다른 사람들의 눈길과는 180도 달랐습니다. 벌레 바라보는 듯한 경멸의 시선이 아니었습니다. 별 사람 다 보겠다는 듯한 호기심의 눈길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눈길은 오랜 세월 그녀가 겪어왔던 처절한 고통과 영혼의 깊은 상처를 알아보고 불쌍히 가련히 여기는 연민의 눈길이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오래 전부터 진실한 사랑이란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사랑 사자도 듣기 싫어했습니다. 마음은 이미 인간 세상으로부터 멀리 추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에게 참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녀는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한 순간에 마리아 막달레나의 생애 전체를 뒤흔들어놓았습니다.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의 눈길이 그녀의 삶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순간 오랜 세월 그녀를 괴롭혀왔던 일곱 마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눈길이 그녀의 삶을 스치며 지나가는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생활방식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매 순간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부여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새 삶을 부여받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후 온전한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이상의 수제자, 애제다 사도 요한 이상의 애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 곁에 머물러있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들(저 여자, 저거, 얼마 전까지 일곱 마귀에 시달렸던 여자 아냐?)로 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때까지 어떤 수모와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수군거리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 곁에 앉아있는 것,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과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삶 안에서 예수님은 제1순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무수한 난관과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늘 예수님께로만 나아갔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 곁에 머물렀습니다.
이러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에 예수님께서도 크게 응답하십니다. 그녀의 사랑에 부응하는 큰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녀를 일곱 마귀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녀의 삶을 온전히 정상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녀를 말끔히 치유시켜주셨습니다.
오늘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치십니다.
“그대도 나처럼 예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을 당신 삶의 중심으로 모시십시오. 예수님을 당신 삶의 최우선순위로 선택하십시오.”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순간, 우리가 하느님께 한 발자국 크게 다가서는 순간, 하느님께서는 경이로운 은총을 우리 생애에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바라보시듯이 우리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 생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새 삶을 우리에게 부여해주실 것입니다.(루단 윌리엄스 저, ‘안심하고 가거라’, 바오로딸 참조
알아본 사람
-황지원 신부-
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자주 정동길을 걷는데,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길이기에 그 길을 걷는 것이 참 행복합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가끔 길을 묻는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한번은 어떤 이가
‘서울지방국토관리청’을 물었습니다. 저는 도무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잘 모르겠다’라고 말씀드리고 지나쳐 걸어오다가 창덕여중 입구를 지나
‘서울지방국토관리청’ 건물 표지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도
아니었고, 그 오랜 시간을 지나다니면서 수십 번은 보았을 그 건물을 저는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알아본 사람, 그분을 만난 사람은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마리아가
그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편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 대한 사랑이, 그 간절함이 그분을 볼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마리아는
누구보다 먼저 그분의 무덤을 향해 나아갑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분께 대한 사랑이 그녀를 그곳으로 인도했고, 빈무덤 앞에서는 그분께
대한 그리움이 넘쳐납니다. 그 사랑이 그분을 보게 하고, 그 간절함이 마리아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증인으로 제자들에게 파견되게 하였습니다.
두 번의 물음
- 박후임 목사-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보고도 몰라봤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안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이 달라진 것일까? 나중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왜 몰라봤을까? 또 나중에는 어떻게 알아보게 된 것일까? 이런 물음을 붙들고 말씀 안으로 가만히 들어가 본다. 큰 슬픔에 사로잡힌 마리아.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의 물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천사가 물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부활하신 예수님도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이 물음은 마리아로 하여금 울고 있는 자기를 보게 한다. 왜 우는지 그 이유를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울음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가 왜 울었는지 말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자신의 울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차릴 때, 눈이 뜨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것으로 드러난다. 주님을 뵙는 은총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느낌에서 벗어나
깨어 있을 때 누리게 된다.
나도 종종 내 느낌에 사로잡혀(특히 슬픔이나 화)보지 못할 때가 많다. 아니, 아예 보지 않으려고 외면한다.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내게물어야한다.‘왜울고있는거니?왜화가나는거지?’ 그러면들릴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부르시는 음성이. 그리고 주님을 뵙는 은총을 누리게될 것을 믿는다. 아멘.
스토커
-전삼용신부-
오늘 동기 신부님이 자신이 스토커에게 당한 이야기들을 해 주었습니다.
한 번은 고해를 하는데 누가 들어오더니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해를 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랜 기도 끝에 응답을 얻었는데, 하느님께서 신부님과 결혼하라고 하세요.”
그 신부는 좀 이상한 신자로 생각하여 자신도 잠깐 하느님께 기도를 드려보겠다고 하고 몇 분 조용히 있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 이상하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자매님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시는데요?”
그 자매님은 음성을 높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왜 그러세요? 신부님 강론 때 저를 쳐다보면서 제가 좋다고 또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성체를 주시면서도 저를 보고 웃으셨잖아요. 그리고 사랑해 달라고 하셨잖아요.”
그 자매는 신부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이 자신에게 하는 것인 줄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 것은 그 사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어쨌든 그 때부터 그 신부님은 강론할 때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고 또 성체 분배할 때 고개를 푹 숙이고 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자매는 사제관을 끊임없이 감시하여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는지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자기 위해서 사제관 불을 끄면 핸드폰 문자로 “안녕히 주무세요.”, 또 일어나 불을 키면 곧, “안녕히 주무셨어요?”라는 문자가 온다고 합니다. 감시당하고 있는 느낌, 그건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한 번은 아예 불을 켜 놓고 핸드폰을 꺼 놓고 눈가리개로 눈을 가린 채 잠을 잤다고 합니다. 아침미사를 위해 일어나 핸드폰을 켜 보니 아침미사를 하셔야 하는데 왜 이렇게 늦게 주무시냐는 문자가 수십 통 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님이 잠이 들기까지 자지 않고 밤을 새웠던 것입니다.
스토커에게 한 번 걸리면 이렇게 심신이 피곤해집니다.
오늘은 막달라 마리아 축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마귀가 든 여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칠죄종을 말하듯이 일곱 마귀가 들었다는 것은 모든 죄를 깊이 경험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교회 전통은 마리아 막달라가 몸을 파는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가장 빠른 진도를 나가 결국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죄의 밑바닥에서 최고로 빠른 영적 진부를 이를 수 있었을까요?
바로 스토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스토커였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듣고 묵상하고 그대로 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 버리고 도망갔을 때도 마리아는 골고타 언덕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고 무덤에 묻힐 때까지도 그 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또 시체라도 보기 위해서 주일날 새벽에 무덤으로 갔고 시신이 사라진 빈 무덤이었지만 그분의 체취가 남아있는 그 곳에 혼자라도 머물 줄 알았습니다. 죽었던 자리까지도 지키고 있는 정도라면 보통 스토커가 아닙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마리아야!”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 이름을 듣자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누군지 깨닫고 “라뿌니”, 곧 ‘스승님!’이라고 대답합니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별명만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리아가 갑작스럽게 예수님을 부를 때, ‘스승님!’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예수님을 평소에 스승으로 삼고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즉, 죄의 구렁텅이에서 하늘로 치솟아 가장 순결한 여인이 되기까지는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삼고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고 배우는 사람은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 진리와 생명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해 더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빠른 진보를 합니다.
스토커는 그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그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에게 스토커가 되는 것은 병이지만 예수님께 스토커가 되는 것은 성인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어느 정도나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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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허영업 신부-
제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는 그야말로 아이들이 많아 콩나물시루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도 몇 달이나 걸렸고, 오랫동안
거의 익명(?)으로 지내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당 주일학교에서는
첫날부터 제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마티아” 하고
항상 웃으면서 세례명을 불러주는 것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어렸을 때 성당 주일학교를 학교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 그리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의 일부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이처럼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와 ‘너’로 관계를 맺고, 또한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무엇’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슬픔에 빠져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고 먼저 이름을 부르십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입니까? 어느 성인의 말씀처럼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눈을 감고
나를 부르시는 고마운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시지 않겠습니까?
그전에 물론 마리아처럼 우리의 영혼도 주님을 애타게 찾아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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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에게 영광을
- 여상훈-
얼마 전 어느 시위 현장에 갔습니다. 거기에는 옛날 이른바 시국 현장에서 날리던 남성들은 오간 곳이 없고, 소박한 여성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홀어머니에 누나만 네 분인 제가 타고난 페미니스트인 걸까요? 달변도 웅변도 아닌 그들의 외침이 가슴을 흔드는 소프라노로 울려 퍼졌습니다. 세상사 득실 계산이 복잡하고 성정이 변덕스러운 남성들이 눈치 보면서 숨어 있는 동안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 하나로 길바닥에 주저앉는 여성들이 주먹질 한번 없이 강력한 저항의 펀치를 날리고 있었습니다.
지혜의 스승, 카리스마 넘치는 왕, 무한능력의 초월자, 제자들이 이 모든 표현을 동원해서 떠받들던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이 상위 5퍼센트 세도가들에게 눈엣가시 같았을 나자렛 출신 교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추종자 가운데 핵심 인물에 속하던 열두 제자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으로 하늘나라가 이 땅에 오면 자신들이 복락과 권세의 주인공이 되리라고 기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를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해줄 거야, 하고 약속했던 연인이 그 사회의 가치관을 뒤흔드는 반역자가 되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처형당한 꼴이었겠죠.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풍찬노숙하며 온 나라를 헤매던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허망해서 숨어버렸습니다.
오로지 몇몇 여성만 비명횡사하신 분에 대한 믿음을 간직했습니다. 살아 계실 때도 허드렛일, 뒤치다꺼리만 맡았던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분의 장례를 예비해서 향유를 발라드린 사람도 베타니아의 어느 여성이고, 무덤을 지키다가 부활하신 그분을 처음 만난 사람도 두 여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포위한 군인의 귀를 칼로 베던 남성들의 기개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누군가가 스승의 시신을 빼돌린 것 같지만, 여성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슬픔의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여성들이 흘렸을 기쁨의 눈물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부활 소식을 전할 영광이 그들 것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다 부활하신 그분을 만난 여성들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을 이기는 것은 산을 무너뜨릴 힘과 열정, 무쇠 주먹이 아니라 가냘픈 손, 작은 목소리, 욕심 없는 헌신임을 배웁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더없이 힘 있는 웅변으로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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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영롱하고 찬란한 신제품, 마리아 막달레나>
유리병의 제조과정을 가까이서 지켜 본 적이 있습니다. 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규사, 소다회, 탄산석회 등의 원재료가 필요합니다. 이런 재료들을 고온으로 가열하여 녹인 다음, 냉각시키는 과정에서 고체화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유리입니다.
소주병을 만들려면 유리가 고체화되기 전에 틀로 흘려보내고 나서 서서히 냉각시키면 됩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 유리제품들은 파손되었다 할지라도, 때로 산산조각 났다 할지라도, 또 다른 유리제품의 원재료로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멋진 유리제품이 한번 깨트려졌다 해도 언젠가 또 다른 아름다운 유리제품으로 재탄생이 가능하다는 것, 얼마나 근사합니까?
이런 재활용, 재탄생은 오늘 우리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한 주부가 귀한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요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합시다. 정성껏 요리를 준비했습니다. 귀한 손님인 만큼 평소에 잘 쓰지 않던 아주 비싸고 멋들어진 수입품 고급 식기세트를 꺼냈습니다. 수저도 은수저입니다. 티스푼은 18K입니다.
다들 정성에 탄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식사를 끝냈습니다. 이런 저런 음식물을 담느라 지저분해진 식기세트들, 주부로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번 지저분해졌으니, 귀찮으니,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겠습니까? 정신 나가지 않은 이상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값비싼 고급 식기 세트인 만큼 설거지 할 때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룰 것입니다. 혹시라도 접시 이빨이라도 빠질까봐, 혹시 금이라도 갈까봐 지극정성으로 금 쪽 같이 다룰 것입니다.
다음 기회에 또 다시 활용하기 위해 잘 건조시켜서 조심스럽게 진열장에 넣어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분명히 우리를 이렇게 다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죄지었다고 해서, 우리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해서, 우리가 한번 옆길로 샜다고 해서, 우리가 한번 방황했다고 해서, 우리를 쓰레기통으로 절대 던져버리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로 다시금 조심조심 우리를 닦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고이고이 당신 품에 안으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찬란한 명품으로 재탄생시켜주실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마음은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삶 안에서 그대로 재현됩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삶은 한 마디로 깨진 소주병이었습니다. 아주 산산조각났습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구제불능의 삶이었습니다.
그녀는 일곱 마귀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 둘도 아니고 일곱이나 되는 마귀와 대적하느라 그녀의 심신은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녀의 삶에서 기쁨, 희망, 사랑, 감사...이런 긍정적인 단어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녀 삶의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비의 용광로에 집어넣어, 당신의 뜨거운 사랑으로 가열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키셨습니다.
그 영롱하고 찬란한 신제품이 열두 사도 못지않은 열성 여제자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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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만났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제가 주님을 만났습니다!"고 말한다.
주님을 만나뵈어야
우리는 확신을 갖고 주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된다.
그분을 어떻게 만나뵈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제가 주님을 만나뵈었다!" 고 증언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서 그 비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 방법은 간단하다.
만나려면 그분을 찾아야 한다.
간절히 찾기만 하면 된다.
아가서의 여인처럼
사랑하는 내 님 못보셨나요 하며 찾아헤메야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분이 너무도 보고싶고 그리워서
여인의 몸으로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다.
그 정도로 그분을 만나뵙고 싶었다.
그리워서 못 견딜 정도였다.
그렇게 간절히 그분을 찾아 헤메기만 하면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아무리 찾아도 그분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 그분을 찾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분을 만날 수가 없다.
마리아 막달레나마저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지 않았던가!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분이 나를, 내 이름을 부르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말씀 안에서,
성체 성사 안에서,
형제 자매들 안에서,
세상 사건들 안에서
그분은 나를, 내 이름을 부르신다.
그리고 소명을 주신다.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라는 소명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주셨던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분을 만나뵈올 수 있다.
이것이 하느님체험이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다.
그때 우리도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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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사랑해야만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
-경규봉 신부-
루카복음(8,2)을 보면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온 여자들도 따라 다녔는데 그들 중에는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를 포함하여 여러 여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기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도왔다고 한다.
마귀가 하나만 있었어도 힘들었을 터인데, 마귀가 일곱이나 있었으니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그녀의 삶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일곱 마귀에 시달려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지내야 했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삶을 겨우 살았을 것이다. 그러한 그녀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마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찾았으니 얼마나 컸을까?
그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예수님이 그녀에게 제 2의 인생을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녀는 새로 얻은 제 2의 인생을 온전히 예수님께 바치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았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마귀 들린 여인에서 세세대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성녀가 되었다.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손가락질 당하던 마귀 들린 여인이 어떻게 존경받는 성녀가 되었을까?
루가복음에 따라서 먼저 그녀는 마귀로부터 해방된 다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을 힘껏 도왔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사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분명 십자가의 길이며, 고난의 길이다.
그녀는 십자가와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바쳐 예수님을 도와드렸다. 마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진 것처럼 마리아도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십자가를 나누어 진 것이다.
둘째로 그녀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그녀는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 4복음서가 이 사실을 똑같이 전할 정도로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컸던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을 보면 빈무덤을 보고 마리아는 슬피 울면서 주님을 찾는다. 자신이 주님의 시신을 모셔가겠다고 청한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으면 시신을 모셔가겠다고 말하겠는가!
일반적으로 사람은 죽음을 싫어하고 기피하기에 시신을 꺼려한다. 율법에 따라 시신을 만지면 부정을 탄다. 그런데도 시신을 모시려고 할 정도로 그녀의 사랑은 컸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그녀의 사랑이 컸던 그만큼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모님이나 12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시지 않고,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점을 묵상하도록 한다.
먼저 하느님은 우리를 어느 한 순간의 죄와 악행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그녀가 마귀 들린 상태에 있을 때 그녀는 죄와 악행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내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녀가 변할 줄 믿고 기다리셨다.
주님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하셨다. 죄인이 성녀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지금 죄와 악행에 물들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벌하시지 않고 기다리신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성인성녀가 되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시다.
또한 성인성녀가 되려면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힘껏 도와야 함을 가르친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함을 가르친다. 비록 고통스럽고 힘들다할지라도 십자가의 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해야만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친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만큼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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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레나 마리아
-김대성 신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당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열 두 사도들도 있있고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도 많았는데 왜 하필이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 영광스러운 일을 맡기셨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극진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도들도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무모한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던지는 사랑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막달레나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에게서 가장 큰 사랑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막달레나는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위로를 얻었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온전히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머리로 생각으로 의지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다면 마리아는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 푹 빠졌습니다. 참된 스승님으로써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서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겨준 존재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대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마리아의 극진한 사랑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사흘된 시체입니다. 죽은 직후라면 모르지만 며칠 지난 시체를 보고서 제 주님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대단히 특별한 것입니다. 마치 자식을 잃은 어머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남녀를 떠오르게 하는 그런 장면입니다.
주님은 무덤에 묻히셨지만 마리아는 아직 예수님을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예수님, 자신의 사랑과 존경을 맘껏 드릴 수 있는 그런 예수님을 아직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극진한 사랑에 응답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당신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영광과 기쁨을 안겨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인간적인 사랑을 넘어서 더 높고 완전한 사랑으로 나아가라고 초대하십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주님과 함께 숨쉬고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아계시게 하는 그런 삶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 보면 볼수록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막달레나의 극진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우리 모두를 예수님을 향한 진실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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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지금 저는 하나의 꿈을 꾸면서 살고 있습니다. 올 여름에 자전거 여행을 하겠다고 결심했거든요. 그래서 어제는 서점에 가서 우리나라 대형 지도도 하나 구입을 했답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 시간 내내 지도를 보면서 여행 코스를 잡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기분이 좋더군요. 아직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아직 짐도 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벌써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그런데 문득 이런 걱정이 앞서는 것입니다. 제가 사실 길치거든요. 그러다보니 지도를 가지고 간다고 할지라도 ‘길을 잘못 들어서면 어떻게 하지? 엄청나게 고생할텐데…….’라는 걱정이 생기네요. 그래서 혹시 차량용 내비게이션이 있듯이, 자전거용 내비게이션이 없을까 라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있는 것입니다. 자전거용 GPS 기계가 번듯이 판매가 되고 있더군요.
‘구입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곧바로 그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고 구입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갈등이 생겼습니다. 결재 내역이 나오면서 가격을 보게 되었는데(이런 기계가 있다는 기쁨에 가격은 보지도 않았었습니다), 글쎄 백만 원을 훌쩍 넘는 고가의 장비였던 것입니다.
‘그냥 질러? 말아?’
오랫동안의 갈등 끝에 문득 ‘내가 왜 여행을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전거 타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여행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라면, 길을 제대로 못 찾아서 목적지와 다른 길로 간다고 한들 그것이 자전거 여행 자체의 기쁨을 퇴색시키는 것은 아니거든요.
저는 길치라는 생각 하나 때문에 자전거 여행의 원 목적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섣부른 판단을 하면서, 목적지에 제대로 가는 것이 원 목적인 것처럼 착각했던 것이지요.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모습을 취했을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서 원 목적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모습과 행동을 취할 때가 얼마나 많았나요? 아마 주님에 대해서도 이랬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편함을 추구하다보니 이 세상 것들만을 생각했었고, 그래서 우리의 삶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면서 세상 것들만 바라보면서 살았던 것 같네요.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등장합니다. 그는 비천한 자신을 용서해주신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했지요.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직접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셔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하고 물으셨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너무나 사랑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서 묻히신 예수님을 찾아갈 정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오히려 따지듯이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바로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 날 수 없다’는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이 아닐까요? 즉, 예수님께 대한 섣부른 판단으로 인해서 바로 사랑하는 예수님이 앞에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은 무엇인가? 무엇이 주님을 제대로 못 보게 하는가?”
여행계획을 잡아봅시다. 언제 실현될지는 몰라도 기쁘지 않습니까?
빠다킹신부
그리움, 그리고 만남
-상지종신부-
요즈음 제게는 자그마한 기쁨이 생겼습니다. 본당 식구들 뿐만 아니라,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벗이라는 점 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분들로부터 뜻하지 않은 E-mail이 오기도 하고, 게시판 제가 올린 묵상 글에 대한 회신이 가끔씩 달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부족한 묵상 글들을 읽으시고 고맙다는 뜻으로 보내주시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나 묵상을 보내주시기도 합니다. 제게는 커다란 격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즈음 본당의 여름 행사 관계로 일일히 답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애초에 제 자신의 신앙 생활을 위한 복음 묵상을 좀 더 책임감 있게 해 나가자는 뜻에서 본당 게시판과 교구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한 이 작업이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만남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이제 어느덧 저의 묵상 글을 읽으실 벗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바라는 마음으로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분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벗들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이라고나 할까요. 비록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지만(물론 본당 식구들은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이미 마음으로는 서로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리움은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움은 어떠한 모습이든 만남으로 이어지고 만남은 반가움을 줍니다. 이 반가움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희망으로 이어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어두웠던 마음에 생기가 돋고, 억누를 수 없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축쳐진 어깨를 다시 세우고 흐뜨러진 다리를 곧게 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라는 느낌은 이렇듯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움이 간절할수록 이 모든 것은 보다 더 확실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행복한 여인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달레나의 그리움은 예수님을 만나뵙고 알아볼 수 있는 혜안이었습니다. 물론 이 그리움만으로 예수님과의 재회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막달레나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만 알았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야!" 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막달레나가 "라뽀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데는 그녀의 그리움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막달레나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전하라는 엄청난 사명을 주실 만큼 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외로움과 슬픔에서 다시 함께 한다는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사랑 담긴 그리움을 가지고 싶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리고 믿음의 벗들에 대한 그리움 말이지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랑 담긴 그리움을 더욱 간절히 가꾸고 싶습니다. 그리움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그리움이 일구어낼 값진 만남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만남이 가져올 참된 삶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
사랑의 방식
-여성국 신부-
칼릴 지브란의 책 <사람의 아들 예수>에는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아래와 같이 말씀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 자신을 위해 너를 사랑하나 나는 너를 위하여만 너를 사랑한다.”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는 너의 모든 유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의 사랑을 꽃피우면 또한 삶의 풍요와 성숙에 다다르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사랑의 거부, 사랑의 단절이 얼마나 많습니까? 항상 사랑을 갈구하는 듯하지만 일단 자신의 입맛을 거스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이를 모멸하고 짓밟아버립니다. 언제나 내 사랑만을 위주로 충동, 욕구, 이기심, 타산, 기분 등을 잡풀처럼 키워내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한번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사실 마리아도 자신만의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사랑했던 예수님만을 찾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질문합니다. “너는 왜 울고, 누구를 찾고 있느냐?” 사실 너를 위한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다면 마리아는 죽기 전의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정원순 신부-
◆사람은 오감을 통하여 세계를 경험하며 정보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 바탕 위에서 행동을 한다. 말하자면 체험이란 우리의 시각·청각·체각을 통하여 하고, 그것들을 통하여 체험한 것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발달하고, 어떤 사람들은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발달하여 들을 때 더 신속하게 정보를 알아듣고 수집하며,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몸으로 느끼는 것을 다른 기관보다 빨리 알아듣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사람은 네 가지 눈이 있다고 한다. 사물을 보는 육안, 지혜를 터득하는 지안,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심안, 그리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세상을 보는 영안이다. 세상 어떤 사람도 이 네 가지 눈을 모두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한두 가지 눈이 부족한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두 천사와 대화하고 나서 뒤로 돌아서자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요한 20,14-15).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요한 20,16). 그 순간 마리아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들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는 그 순간에 마리아의 영안이 뜨여 스승님을 알아본 것이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체험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통합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인생이란 자신이 인생을 아는 만큼 살 수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체험한 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양승국신부-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주님께로>
오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맞아 사순이나 대림 특강 때 제가 단골로 사용했던 강의록을 복음묵상 대신 올립니다. ‘이거다’ 하는 내용은 없지만 존경하는 성녀의 기념일을 맞아 성녀의 신앙 전반을 천천히 음미해보시길...
강의주제: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주님께로
오늘 이 시간 저는 복음서 안에서 열두 사도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로 언급되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신앙여정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기구한 운명을 살아온 여인이었는지, 어떤 상처를 받았었는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였는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나갔는지 살펴보다보면 우리 신앙생활의 아주 좋은 지침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왜 이 여인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 혹은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불렸을까요?
이 여인의 이름은 당시 가장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였던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 주변 인물 가운데는 마리아란 이름을 지니 사람만 해도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름 앞에 지명을 붙였습니다.
‘막달라’란 곳은 예수님 시대 당시 갈릴래아 호수 서쪽 편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오늘 날 메이델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바로 이곳 막달라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 또는 막달라 마리아, 또는 마리아 막달레나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호칭은 요즘 우리도 많이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도 제가 알고 있는 분들 가운데 글라라란 본명을 가진 자매님들이 여러 명이라서 이렇게 구분합니다. 압구정동 글라라, 불광동 글라라.
아무튼 마리아 막달레나는 갈릴래아 호수 서쪽 편에 위치한 막달라라는 도시 출신의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교회 전통 안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이야기할 때 마다 큰 혼선이 빚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교회는 그녀가 한때 행실이 좋지 않던 여자, 매춘부였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회개의 모범으로 제시했습니다.
특히 루가 복음 7장 36절에 등장하는 여자와 동일시했는데, 그 여자는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으며,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거기다 값진 향유까지 발라드를 발로 여겼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머리카락으로 남정네 발을 닦고 발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매춘부들이나 하는 행위였기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통념상 마리아 막달레나 하면 통회와 회개의 전형적인 인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여러 성서학자들께서는 그러한 주장들이 성서상의 정확한 근거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은 이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무엇에 앞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던 환자였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치유를 받게 되었다.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내신 예수님이 너무나 고마워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 대한 애정이 깊었던 여인, 애정이 깊었던 만큼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큰 격려와 지지를 받은 여인임이 분명합니다.
루가복음 8장 1-3절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여기서 보시다시피 확실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마귀가 한 마리 두 마리가 아니라 일곱 마리입니다. 일곱 마귀에 들렸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녀의 삶은 갈 때 까지 갔었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향해가는 깊은 수렁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것입니다.
1마리도 아니고 7마리의 마귀가 들린 사람의 상태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우리가 잘 상상해볼 수 있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발작은 거듭됐을 것입니다. 수시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불경스런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7마귀의 횡포로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몰골은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7마귀 들린 그녀를 보고 뭐라고 했겠습니까?
“얼마나 몹쓸 짓을 많이 했으면 7마귀까지 들렸을까?” 손가락질하며 그녀를 피해갔을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 혹은 위로가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만 생각하면 힘이 생깁니다. 희망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다 볼 때 이토록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여인 안에 깃든 가능성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서 7마귀를 쫒아내 주시고 그뿐만 아니라 당신의 제자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제 가장 예수님의 측근에서 예수님을 잘 보필하는 ‘여비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 누구보다도 섬세하게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배려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때 일곱 마귀 들렸던 마리아는 마침내 가장 예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여 제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어떻게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악령에 시달리며, 고통당하며 살아갑니다. 때로 심각한 죄 속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최악의 상황 앞에서도 개선에로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하십니다. 우리의 죄가 하늘을 찌른다 할지라도,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이 붉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토록 기다림의 주님,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다시 한 번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로 돌아오겠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마귀로부터 해방되어 극적으로 인생을 전환하게 된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뒤로 삶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의미요 전부가 되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휴대폰 입력 넘버 1번이 되셨습니다.
그 뒤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따라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도움의 손길을 드리면서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바로 옆에 서서 위로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위험에 처한 순간 더욱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극진히 보필해드렸습니다.
특별히 한때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기세가 등등하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이 거의 다 도망가 버린 갈바리아 십자가 아래 그녀는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요한복음 19장 2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장례식 때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르코 복음15장 4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또 한 가지 복음구절이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열렬한 사랑을 엿보게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무덤가에 도달했을 때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물었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십시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재가 너무나 안타깝고,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허전했던 그녀는 안식일 내내 안절부절 했습니다. 빨리 안식일이 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안식일에는 무덤을 방문할 수도, 향유를 가져다 바를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예수님 시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한 잠도 눈을 붙이지 못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도 애통해하면서 그리워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가슴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예수님을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이상의 몇몇 복음구절들을 종합해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란 인물에 대해서 몇 가지 정리를 해볼 수 있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루살렘 부인회 회장, 예수님 팬클럽 회장이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루살렘 부인회 회장, 예수님 팬클럽 회장으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성한 활동력, 추진력, 자금동원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일행의 먹거리며, 숙소며, 활동비며, 판공비 등등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공생활 당시 예수님 주변에는 12제자뿐만 아니라 72제자를 비롯한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는데, 때로 그들은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보니 한 끼 해결하려고 하면 막대한 돈이 들어갔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몇몇 여인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예수님을 돕고 있었는데,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들 가운에 회장격이었습니다. 성모회장님이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스토커였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골치 아프게 하고, 시간 엄청 빼앗고, 마음 산란하게 만들면서 공생활을 방해하던 그런 스토커와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조용히 뒤에서 예수님과 그 일행의 불편한 점들을 알아서 척척 해결해주던 분별력 있던 여인이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장례식 주관자 마리아 막달레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더불어 예수님의 장례식 일체를 꼼꼼하게 총괄했습니다. 세심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챙겼습니다. 다들 두려워서 감히 나서지 못하던 판국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도적으로 장례절차 일체를 진두지휘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어떻게 이런 용기가 생겼을까요? 자칫 잘못했으면 반역자와의 한패로 몰려 똑같이 죽음에 처해질 가능성도 많았습니다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용감하게 앞장섭니다. 향유를 삽니다.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도무지 겁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온몸으로 극진한 예수님의 자비를 맛본 마리아 막달레아였기에 이제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심각한 병고로 고통당하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늘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늘 이상한 사람 취급 받으면서, 그렇게 인간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 당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예수님만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한 평생 겪어왔던 극심한 고통을 눈여겨보시며 함께 눈물 흘려주셨습니다. 일곱 마귀에 걸려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시며 힘내라고 용기를 불어넣어주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그 지긋지긋한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셨습니다.
새 삶을 되찾아주신 예수님 앞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너무도 감격해서 목이 메일 뿐입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존재의 유일한 이유가 되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그녀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의 삶에서 예수님이란 존재를 빼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였기에 빈 무덤가에서 이런 표현을 씁니다.
“누가 제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보십시오. 냥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 아니라, 제 주님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어 앞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과제 한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온전히 예수님께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힘드실 때, 필요로 하실 때, 가장 곤경에 처하셨을 때,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장례식 때 끝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를 확인해볼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상대방의 상황이 잘 풀릴 때,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진정한 사랑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순간, 임종의 순간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고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께 보여준 사랑과도 같이 말입니다.
진정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잘 나갈 때보다도 상대방이 아프거나 병들었을 때 함께 합니다. 끝도 없는 방황을 거듭할 때 지속적으로 위로와 격려를 그치지 않는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앞둔 순간 그 죽음이 너무 아쉬워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마리아야! 라뽀니!
-강영구신부-
+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뽀니!”하고 불렀다.
그대에게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날입니다.
복음서의 증언으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어떤 여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는 그녀가 일곱 마귀에게 시달리다가 치유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루가8,2, 마르코16,9)과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보았다는 사실(마태오27,56 마르코15,40 요한19,25),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다는 사실(마태오28,1 마르코16,1루가24,10 요한 20,1)을 증언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통적으로 그녀가 창녀였다거나 예수의 발을 눈물로 씻고 값진 나르드 향유를 바르고 머리털로 닦아드린 여인(루가7,36 요한 12,1이하)이라고 해석하지만 베다니아에 살았던 나자로의 누이 마리아와 막달라에 살았던 마리아는 분명히 다른 여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어떤 인물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죽음을 뛰어넘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안에서 예수를 찾지만, 예수는 무덤 안에 없습니다.
무덤은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한과 원망을 쌓는 사람들이 갇혀서 썩는 자리이지
사랑의 사람 예수가 머물 자리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사람을 무덤 밖에서 만납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의 찬미가 중 한 구절을 옮기려고 합니다.
‘막달라 향기로운 고운 꽃이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타신이여/ 당신의 타오르는 사랑의 불로/ 우리의 찬 마음도 데워주소서.’
당신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막달라 마리아의 신앙생활
-하화식 신부-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의 열정은 그 삶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던진 이 여인은 그만큼 자신의 삶의 체험 현장에서 모든 것을 깨닫고 주님을 만남으로써 삶이 완전히 바뀐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구원 여정에서 가장 가까이할 수 있었던 이 여인이 자신이 갖고 있는 삶의 열정을 오로지 한 곳으로 모아 마지막 순간까지 온전히 바친 이 여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어느 누구의 주님도 아니고, 제 주님이라고 강조한 이 대목에서 잠시 멈춰 생각한다.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밀접히 살아 계시는가, 아니면 그냥 머릿속에서 하나의 표징으로만 존재하는 분인가? 나도 이 여인과 같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내 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정말로 내 삶의 주인으로서 그분을 맞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없어지고 오로지 자신을 몽땅 내어놓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긴다고 하던데….
내 삶의 주인이신 그분을 누군가 꺼내갔다면 그건 정말 가만있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이다. 매일 영성체를 하면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는 누군가 꺼내가도록 내버려두기는 커녕 주님을 밖으로 내쫓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장동현 신부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서에서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루가 8,2)로 전해집니다. 또 교회의 전승은 복음서에 언급되는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루가 7, 37)를 마리아 막달레나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믿어왔습니다. 이처럼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귀의 종에서 주님의 종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죄에 얽혀
꼼짝 못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께로부터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사랑받은 만큼 사랑을 되갚을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그 밑에서 자리를 지켰습니다(요한 19, 25).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렸습니다. 수난과 부활의
목격자요, 증거자이며 부활 소식을 전함으로써 선포자가 된 것입니다.
성인들의 삶은 우리를 성덕으로 부르는 강한 초대장입니다.
‘그가 할 수 있었는데 나는 왜 못하랴’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우리를 분발시킵니다
부활의 증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조욱현 신부-
성녀 마리아 막달레 나는 루가 복음에 "일곱 마귀가 들였던 여자"(루가 8,2)로 나타나고 있고,
요한 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 가에 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 있던 부인들 중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으며(참조:요한 19,25), 마르코 복음 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제 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마르 16,9- 11).
전승에 의하면,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공경해 왔다.
성령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 서 선종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마르세이류 근처에 가면 막달레나 동굴이 있다.
그곳이 막달레나 성녀가 거처하시며 기도하셨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성녀의 손을 잡고 하늘에 오르시면서 성녀를 그곳에 내려 주셨고
성녀는 그곳에서 관상과 기도로 일생을 바치셨다는 전설이 있고,
지금도 그곳은 성지로 꾸며져, 잘 보존하고 있다.
아마 성녀를 공경하던 사람들이 모여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제목 : 부활의 증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녁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 절).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
그 이유는 자기 위주의 눈물 때문이었고, 그녀의 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빈 무덤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것에만 그의 생각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 마디로 "선생님 !" 하 고 기뻐한다.
이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
막달레 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즉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게되는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 와 같은 태도를 취하면서 살아가기 일쑤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도 차디찬 무덤, 땅에만 쏠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곳에서 눈을 돌려 승리를 거두시고 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 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 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 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 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 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시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부활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
무엇을 찾고 있소?
-이인옥-
요한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말씀은 이렇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요한 1,38)
공동번역의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다.
"당신들은 무엇을 찾고 있소?"
첫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요한복음 안에는 무엇인가 찾아 헤매는 군중들의 모습이 유난히 많다 .
"당신들은 무엇을 찾고 있소?"
인간 존재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시는 예수.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와 갈망을 꿰뚫는 질문이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 사랑하는 임 그리워 애가 탔건만,
찾는 임은 간데없어, 일어나 온 성을 돌아다니며, 이 거리 저 장터에서,
사랑하는 임 찾으리라 마음먹고,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였네."
한낮에는 바쁜 일상에 쫓겨 자신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
그러나 어둔 밤이 오면 근원으로 회귀하려는 깊은 갈망이 슬며시 찾아온다.
하지만 그 갈망과 욕구는 언제나 다른 무엇에로, 다른 누구에게로 전이(轉移)되고.
그 무엇에, 그 누구에 실망하고 상처를 입고 또 다른 무엇을 찾아 나서는 우리.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러했다.
루가 복음에서는 그녀가 "일곱 마귀가 나간 여자"였다고 한다.
온갖 것으로 자신을 채우려했어도 그녀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녀의 갈증과 허기는 예수를 만난 후, 비로소 잦아들어갔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그녀를 다시 못견딜 슬픔 속으로 빠뜨렸다.
사랑하던 분의 무덤.
그리울 때 찾아와 지난 날의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곳.
살아가기 힘이 들 때, 울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찾아와
용기를 얻고, 힘을 얻고, 다짐을 하고 일어설 근거지가 지금 비어있다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근원지를 상실한 마리아의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 세상에서 다시 못 만난다는 인간적 슬픔과도 다르다.
예수의 무덤 앞에서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마리아.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마리아에게 물으신다.
"누구를 찾고 있느냐?”
그분이 누구신지 아직도 모르는 마리아.
그분이 누구신지 몰랐던 것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사실상 마리아는 그분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이제까지 마음의 안식을 느껴왔던 것이다.
"마리아야!"
평소의 다정한 부르심을 듣고서야 그분이 "라뽀니"라는 것을 알아본다.
"라뽀니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라고 복음사가는 친절하게 해설해 주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라뽀니는 "나의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마리아는 아까부터 동산지기로 보이는 사람에게 누가 "제 주님"을 모셔갔다고 말했고,
여기서는 "라뽀니"(나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자신에게 한정된 분, 자신만이 그분을 차지하고 싶은 것이다.
그분의 시신이라도 자기가 모시고 싶어하는 마리아.
그런 마리아에게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자기 혼자 지속적으로 그분과 개인적인 친밀감을 나누고
위안을 받고 안식을 얻으려는 마음은 이제는 그만두어야 한다.
이제는 그동안 받은 그 사랑을 공동체의 형제들과 나누어야 한다.
마리아 안에 그분이 머물러 살듯, 그분의 형제들 안에 그분이 머물러 살기 때문이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러 주신 말씀을 전하였다."
그렇다.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주님의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던 마리아.
이젠 거꾸로 마리아,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가두어 놓았던 무덤 앞 돌이,
"이미 치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부활하신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이젠 그녀만의 무덤에 갇혀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더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낄 것이다.
더이상 다른 대상들을 찾아 떠돌아 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없는 빈자리를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채워 나갈테니까.
오 주님, 저희도 당신을 찾습니다.
진리이신 당신을.
생명이신 당신을.
빛이신 당신을.
무한한 사랑이신 당신을.
당신 안에 이 고단한 영혼의 닻을 내리게 하소서!
당신이 만들어준 이 아름다운 항구에서
당신이 맺어준 사랑하는 형제들과 함께
저희의 삶을 새롭게, 고결하게, 의미있게 변화시켜 주소서!
마귀들린 여인에서 주님을 모신 성녀로 거듭난 마리아 막달레나
-경규봉신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루가 8,2)라고 전해지는데, 그녀는 자기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도왔다고 한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그 밑에 서 있었다(요한 19,25).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일요일 이른 아침에 가장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마르 16,9). 또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린 사람이다(요한 20,11-18). 교회는 루가복음에 기록된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루가 7,36-50)가 곧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생각하여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믿어왔으며, 성령 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님과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에 가서 전교하다가 그곳에 묻혔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기 전의 마리아의 삶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일곱 마귀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 그녀의 삶은 처절한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도 모두가 그녀에게 손가락질 하며 아무도 그녀와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만 보면 슬금슬금 피해 달아났고,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부정을 쫒는다고 소금을 뿌리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마귀에게 시달릴 때, 그녀 자신도 도무지 어찌할 수 없었다. 죽고 싶어? 죽을 수도 없었다. 마귀가 죽을 수도 없게 했던 것이다. 일곱 마귀에 사로잡힌 그녀는 온전히 마귀의 노예가 되어 매일 시달려야만 했다. 어쩌다가 제 정신이 들면 마음과 정신이 몽롱하여 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한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다가오셨을 때, 자신 안의 마귀는 악을 쓰며 주님을 거부하고, 그녀로 하여금 발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한 마디 말씀으로 호령하시자 마귀는 언제 그녀 안에 있었는지도 모르게 도망쳐버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찾았다. 그녀는 이제 비로소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지금부터 그녀가 사는 삶은 오직 주님께서 주신 삶이며, 때문에 그녀는 오직 주님을 위해 살고자 결심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주님을 도우며 주님을 따랐다. 주님의 제자들까지도 모두가 도망쳤지만, 그녀만은 결코 도망치지 않고 주님의 어머니 성모님과 함께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주님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무덤에 묻히셨을 때에도 결코 주님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시신을 찾아갔다. 마귀가 나간 그녀의 마음에는 오직 주님만이 가득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마귀 들린 여인에서 주님을 마음속 깊이 모신 성녀로서 세세대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공경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녀를 그처럼 사랑하시어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손가락질 당하던 마귀 들린 여인이 존경받는 성녀가 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녀가 일곱 마귀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녀는 분명 죄와 악행에 빠져 있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벌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하여 그녀가 주님을 만남으로써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하셨다. 마음속에 마귀를 가득히 담았던 죄인이 주님을 가득히 담은 성녀가 되게 하시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행했던 여인이 주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는 여인이 되도록 변화시켜주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일곱 마귀에 사로잡힌 그녀를 주님께 사로잡힌 성녀가 되도록 변화시켜주셨던 것처럼 우리를 변화시켜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의 한 순간의 죄와 악행을 물어 벌하시지 않으시고, 참고 기다리시며 우리가 주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지금 죄 속에서 헤매고 있다할지라도 결코 실망하지 말자.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함으로써 우리 모두 주님의 은총으로 성인성녀가 되자.
예수의 주검을 마음속에 묻은 성녀
-박상대 신부-
오늘은 신약성서상의 인물이자 예수님 당대에 살았던 마리아 막달레나, 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축일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막달레나는 그녀의 고향을 딴 이름이다. 성녀는 갈릴래아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 지방 출신으로서 성녀의 이름은 단지 복음서에만 12번 언급된다. 그것은 마태오복음에 3번(마태 27,56; 27,61; 28,1), 마르코복음에 4번(마르 15,40; 15,47; 16,1; 16,9), 루가복음에 2번(루가 8,2; 24,10), 그리고 요한복음에 3번(요한 19,25; 20,1; 20,18)이다.
복음서에서 성녀를 언급하는 곳은 거의 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및 부활과 관련이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와 어떠한 관계에 서 있는 지에 대하여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곳은 루가복음에서 ‘예수를 도와 드린 여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대목이다.(8,2) 여기서 마리아는 일곱 마귀가 들려 시달리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된 여인으로 지목되며, 이 사실은 마르코복음에도 증언된다. “일요일 이른 아침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셨는데, 그녀는 일찍이 예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어 주셨던 여자이다.”(마르 16,9) 이 점을 미루어 볼 때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예수님으로부터 구마치유를 받고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선교활동에 협조하였으며,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라 결론지을 수 있다.
종합하여 보면, 막달라 지방 출신의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들려 고생하다 예수로부터 치유되어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루가 8,2)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단은 12제자뿐 아니라 여인들까지 포함한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여성제자단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고,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재산을 털어 예수와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고, 그들의 의식(衣食)을 돌보았다.(루가 8,3) 마리아는 예수를 따라 모든 제자들과 예루살렘까지 갔다. 그러나 예수의 예루살렘 마지막 날에는 많은 제자들이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예루살렘뿐 아니라 스승의 십자가 죽음 끝까지 따라 갔다.(마태 27,55-56) 마리아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예수를 장례 치르는 동안 줄곧 스승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마태 27,61; 요한 20,11)
그녀는 경황이 없어 스승의 시신에 다 하지 못한 예를 갖추기 위해 안식일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스승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갔다. 그 일로 그녀는 빈무덤의 첫 증인이 되었고, 예수부활에 관한 천사의 기쁜 소식을 맨 처음 들은 자가 되었고, 이 소식을 모두에게 전해야 할 사명을 받게 되었다.(마르 16,6-7) 요한복음은 부활절 이른 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혼자 예수님의 무덤에 있었으며 그녀 혼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본 것으로 전한다.(요한 20,15-17) 마리아는 예수님의 살아생전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에도 각별한 친분으로 함께 한 증인이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다보면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복음서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다른 ‘마리아’로서 그녀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한 인물인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우선 요한복음에 의한 마르타와 라자로의 누이로서의 마리아인데, 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적이 있다는 것이다.(요한 11,1-2)
요한복음사가는 실제로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 바로 전, 마지막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라자로를 다시 살렸던 베다니아에서의 환영만찬에서 마르타가 시중을 들고 있던 중에 마리아가 나타나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 드렸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요한 12,1-8) 이 대목은 마태오(26,6-13)와 마르코(14,3-9)복음에도 똑같이 실려 있는데,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최후만찬 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매우 신빙성이 있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비싼 향유를 아까워했으나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으로 풀이하셨다.
문제는 루가복음이다. 루가복음에는 이 대목이 생략되었다. 그러나 루가복음에도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 중에 이름 없이 죄인으로 묘사된 한 여인이 예수께 와서 그 발치에서 눈물을 흘리고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향유를 발랐다는 기록이 있다.(루가 7,36-50) 여기서 이 여인은 예수께 행한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 이 여인이 베다니아에 살고 있던 마르타의 누이 마리아(루가 10,38-39)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은 같은 마리아 막달레나로 본다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무덤과 예수부활의 첫 증인이며, 일찍이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라는 것이다.(마르 16,9; 마태 28,1; 루가 24,10; 요한 20,1; 마르 16,9; 루가 8,2) 오리게네스(185-254?)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마르타의 누이 마리아와 이름 없이 묘사된 죄 많은 여인을 모두 구분하였으나, 373년 시리아 출신 에프라임의 복음주석서에는 모두 동일한 인물로 주장되었고, 교황 대 그레고리오(540-604)는 이를 재차 확증하였다.
이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동방정교회의 증언에 의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가 살았던 에페소에 살다가 죽었으며, 그녀의 유해는 899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13세기부터 뉘우치는 여인들을 위한 막달레나 수녀회가 창설되었고,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막달레나의 전구로 승리하였다는 것을 기념하여 ‘뤼벡’이라는 도시가 건설되기도 했다.
14세기부터는 ‘멀리 서서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루가 23,49) 가운데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아래로 끌어와 그린 성화들이 등장하였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뉘우치고 용서받고 구원받은 죄인으로 중세기 시인들과 화가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1844년 프리드리히 헤벨스의 ≪마리아 막달레나≫나 1983년 루이제 린저의 ≪미리암≫은 이런 모티브를 사용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과거 행실이 나쁜 죄인이었다는 주장은 그 정확성의 여부(與否)를 접어두고라도 교회적으로 볼 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그러나 죄인이 아닌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예수께 믿음과 사랑을 가졌었고, 이 믿음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마리아처럼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리는 극진한 사랑을 보인다면, 그 또한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자는 예수님과 마지막까지를 함께 한다.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지만(마르 14,40), 그는 십자가 곁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을 아파하며, 그분의 주검을 마음속에 묻었다.(마르 15,40-41)
예수님의 시신(屍身)을 마음에 묻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송장을 묻어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님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죽음으로부터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은 매일 아침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뵈올 것이며,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요한 20,18)...........◆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라뽀니!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글로 오늘복음 묵상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가까이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름 '마리아야!'라고 부르기 전에는 무덤을 지키는 동산지기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라뽀니"하고 대답하면서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곁에는 항상 주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원하면 불러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대답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제복음에서 우리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들어라, 볼 수 있는 눈만 있는 사람이 보아라...고 하시던 주님의 말씀과 같이 오늘 복음에서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막달레나 마리아 여인입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계심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마리아야!"라는 부르심을 듣는 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만 듣고도 주님이심을 확인하며, "라뽀니!"라고 부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는 눈도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고, 단지 무덤에서 시신만 수습하려던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귀와 눈이 열려진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주님의 부활을 처음보는 복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성서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 여인이 참으로 복된 여인입니다. 물론 이 말은 이 여인이 태생부터 복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여인은 갖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처음투터 고결한 여인이 아니고, 죄많은 여인, 마귀들린 여인으로 표현되다시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여인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면, 이 여인은 죄 지은 자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며, 또 주님의 죄사함을 통해서 가장 영적으로 완성(구원)된 대표적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은 성서에서 가장 많이 이름이 오르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가장 영광스러운 핵심장면이 부활의 첫증인이 되는 영광을 않았습니다. 이러한 영광을 않게 된 원인은 바로 이 여인의 위대한 신앙입니다. 다시말하면 마음과 행동으로 온전히 주님과 일치하는 신앙의 길을 걸어온 열매입니다.
우리도 막달레나와 같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말들은 잘 합니다. 그런데 막달레나가 볼 수 있던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보다 더 심각한 시련과 근심 걱정 속에서도 막달레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우리는 그녀 보다는 훨씬 편한 상황인데도 주님이 부르는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신앙.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신앙, 그런 모습이 바로 우리들 신앙의 현주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은 부활의 첫증인으로서 에수님의 수난과 영광의 길에 함께 동행했던 위대한 믿음의 여인, 성녀 마라아 막달레나의 기념일로서 요한복음 11-18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바라보고 있던 마리아! 그녀는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부활에 대한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가 예수님을 꺼내 갔다고 생각했기에 슬픔에 잠겨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참으로 멋진 말씀을 하십니다. “제 주님”이라는 말씀. 참으로 가슴 깊이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따랐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부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물으십니다. 왜 울고 있느냐고?
하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부활 예수님인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곳(무덤)의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이렇게 이른 새벽에 무덤에서 돌아다닐 사람은 동산지기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동산지기에게 간청을 합니다. "여보셔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 주셔요. 내가 모셔 가겠습니다."...여기서도 너무나 감동적인 말이 또 나옵니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마리아는 동산지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 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랑입니다. 죽은 시신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이렇게 슬픔에 잠겨서 무덤 안을 바라보고 있는 마리아를 향하여 부활 예수님이 뒤에서 부르십니다...너무나 극적인 장면입니다. "마리아야!"... "라뽀니"
그러자 마리아는 들을 귀가 있는 복된 여인이었기에, 뒤에서 부르는 주님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 분이 주님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뒤돌아서면서 "라뽀니"라고 부릅니다. 흔히 모습만을 보고는 알지 못하더라도 음성을 듣는다면, 그것도 그 사람이 기억하는 음성으로 부른다면 귀가 밝은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는 마리아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는 단숨에 알아차립니다.
마리아는 너무 기쁜 나머지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잡고 예의를 표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 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 간다' 고 전하여라"
마리아는 예수님 발밑에 꿇어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마리아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러 주신 말씀을 전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어 예수님의 명령을 이행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참된 귀와 눈을 가진 복된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사도가 되어 부활의 증인이 된 복된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미라아 막달레나입니다. 그녀는 막달라라는 작은 마을에서 보잘 것없이 살았던 죄 많은 여인이었으며, 주님을 만난 이후 영적성숙을 거듭하여 완전하게 주님과 일체(Co-incidence)가 된 믿음의 여인이었으며, 주님 부활의 찻증인으로, 또 부활을 증거하는 첫사도로 부름받은 영광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여인이 주님을 부를 때, "라뽀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그녀의 이름 '마리아!'를 불러주었을 때, 그녀는 주님께 나바같이 날아가서 '라뽀니!'라고 부르고는 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체험한 우리도 주님을 "라뽀니"하고 부르면서 나비같이 날아가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되지 않게습니까...........◆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