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작은 예수’ 대신, 종종 끔찍한 마귀들을 키워내기도 한다. 이들은 기적 신비 권력의 냄새에 너무도 재빠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자리 잡은 교회는 무당의 신비와 정치가들의 수완, 경제전문가 광고기획자들이 사용하는 성공 툴 들을 완벽하게 조합한 다음, 교인들의 욕망을 정확하게 충족시켜준다. 그리고 그걸 성공한 목회, 성공한 교회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공생애 직전 광야에서 40일 금식하며 마귀와 대결하신 사건 속에 담겨 있다. 광야에 나가면서 예수님은 성인이 된 이후 최초로 ‘공식적인’ 삶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임무는 게임의 법칙에 관한 문제였다.
어느 게임이든 따라야 할 룰이 있다. 그리고 그 룰을 바꾸거나 따르지 않겠다는 것은 게임의 지배자가 되든 아니면 저항자(protestant)가 되겠다는 의미가 된다. 광야에서 예수를 찾아온 마귀는 세상을 움직이는 게임의 룰을 들고 와서 예수에게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늘의 대업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이루기 위해 규칙을 바꾸라고 제안한다. 거기서 제안한 세 가지 시험은 곧 기적 신비 권위를 사용하라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단호히 거절한다.
예수님의 이런 반응은 우리에게 꽤나 골치 아픈 부분이 있다. 돌을 떡으로 바꿔보라는 호기심, 자존심 한 번만 꺾으면 세상의 모든 왕국을 주겠다는 제안, 높은 곳에서 안전하게 뛰어내려보라는 요구에, 과연 악한 요소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세 가지 유혹은 하나님이 아들에겐 당연한 특권이고 세상을 구할 메시아에게 반드시 기대되어야 할 자질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로 얼마 안 되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도 보이고 그 보다 더한 기적도 보여주신 분 아니던가? 게다가 결정적으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신비도 실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완전한 왕이 되기 위한 사건들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광야에서 예수가 마귀의 요구를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탄의 유혹은 대단히 매혹적이다. 모두 인간에게 유익한 부분들만 가지고 예수를 시험했는데, 배고픔이나 땀 흘려 수고하여 벌어들이는 노동의 규칙들을 거치지 않고도 음식을 맛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 그 어떤 모험을 하더라도 위험 속에 던져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대 안전의 보장, 오해와 멸시, 거절이라는 뼈저린 수모와 고통을 각오하지 않고도 찬란한 명예와 권력을 누리게 해 주겠다는 것, 이것이 광야에서 마귀가 제시한 게임의 법칙이다.
이 유혹들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십자가 없이도 왕관을 줄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예수는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예수쟁이라는 우리들은 그 유혹을 여전히 갈망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게임의 룰을 따라 사는가?
쉬운 룰을 원하는 나에게 예수님의 방법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 20190310 사순절 첫째 주일 중앙루터교회 설교 초안 <광야의 유혹>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