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후 중국 조선족,중국 정착 과정에서의 슬픈 역사-25]
중국은 1950년 10월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을 돕기 위한 대규모 군사지원을 단행했다. 문제는 인민지원군이 전쟁에 투입된 후 불거졌다.
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이 함께 전쟁에 임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통합 지휘해야 하는데 지휘권을 누가 갖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지휘체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북한과 중국 간에는 상당한 입장차이가 드러났다. 인민지원군의 참전 초기에는 이들과 북한군은 각각 독자적인 지휘체계 하에서 운영됐다. 당연히 여러 문제가 제기됨으로써 통합지휘권 문제가 부각됐다. 그러나 양측은 지휘권을 통합해야 할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 함에 따라 지휘권을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결국 양측 군대를 통합 지휘할 연합사령부를 설립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이 역시 미봉책에 불과했다. 연합사령부가 북한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또 다른 갈등을 낳은 것이다. 점차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이 잇따라 나타났다. 문제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제기됐다.
하나는 국제사회주의운동에서의 변화 움직임과 관련된 서로 다른 반응 속에서 제기됐으며, 다른 하나는 각 국가가 체제정비 과정에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투쟁의 反작용 형태로 나타났다. 스탈린이 1953년 3월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등장하면서 소련은 스탈린 격하운동과 함께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새로운 노선을 제기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과의 평화공존 문제가 제기됐고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의 다양성이 주창됐다. 이른바 수정주의노선이 제기된 것이다. 이후 사회주의진영 내에서는 변화의 물결이 소용돌이 쳤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에서는 상대적으로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소련과 중국이 노선상의 갈등을 일으켰다.
소련과 중국이 상대를 교조조의와 수정주의로 부르며 비난하면서 긴장을 조성한 것이다.
북한은 이 과정에서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펼치는 가운데 196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소련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북한과 중국은 모두 1950년대 중반 이후 체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체제내부에서 반대파를 척결하기 위한 정치투쟁을 단행했다. 이 움직임은 상대국에게까지 그 파장이 미쳤다.
특히 1950년대 중후반 북한에서 일어난 종파사건에서 김일성파가 친중국공산당 계열의 연안파를 숙청하면서 중국의 불만을 샀다. 또 1966년에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북한과 김일성을 싸잡아 비난하자 북한도 중국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시 북한과 중국 간의 갈등은 사회주의진영에서 벌어진 노선갈등과 맞물려 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촉발된 양측관계의 갈등은 1970년대 초 주은래가 북한을 방문한 이후에야 복원될 수 있었다.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곽승지 지음, 인간사랑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