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81
5월6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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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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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lXnqc71VQs
[서울대교구 김산 세례자요한(고척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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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죄보다는 죽음을!>
오늘은 저희 살레시오회에 참으로 특별한 날입니다.
저희 창립자 돈보스코(1815-1888)에 의해 창안된 독특한 청소년 교육 방식인 예방 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것인가를 만천하에 선포한 기념비적 인물의 축일입니다.
그는 돈보스코의 애제자로서 그가 제시한 교육 노선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갔던 도미니코 사비오(1842-1857) 성인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를 일컬어 성령의 걸작이요 돈보스코 교육 방법의 결실이라고 표현합니다.
열두살 되던 해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첫눈에 반한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에게서 착한 목자요 따뜻한 아버지요, 스승이요 친구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한 마디로 홀딱 반한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온 도미니코 사비오의 시선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돈보스코의 사무실 문에 붙어있던 작은 현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저에게 영혼을 주십시오. 나머지는 다 가져가십시오.)
그 현판을 아무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보스코, 저는 알았습니다. 이곳을 이익을 창출하는 곳이 아니라 영혼을 구하는 곳이군요. 저도 돈보스코의 소중한 사업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후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 안에서 돈보스코의 제자였지만, 또래 청소년들을 선으로 인도하는 돈보스코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오라토리오에 살아가던 셀수도 없이 많은 장난 꾸러기들을 하느님께로 안내하는 과정에서 도미니코 사비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도미니코 사비오의 성모 신심은 참으로 각별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토리노 시내를 걸어가던 중 한 친구가 도미니코 사비오에게 물었습니다. “사비오, 여기저기 온통 볼거리들이 엄청 많은데, 어찌 너는 그렇게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니? 너는 그 눈을 대체 언제 써먹으려고 그러니?”
사비오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쓸모없는 곳에 시선을 두지 않는 대신, 내가 천국에 갔을 때, 거룩한 성모님의 모습을 볼 때, 비로소 내 눈을 사용할거야.”
도미니코 사비오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각별했습니다. 그는 수시로 이렇게 성모님께 아뢰었습니다. “성모님, 저는 항상 당신의 사랑받는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제가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죽게 해주십시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죄보다는 죽음을!”
도미니코 사비오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1854년 비오 9세 교황님께서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교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거듭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어떤 고민? “많은 것을 베풀어주신 성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뭔가 꼭 해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별로 없고...”
고민 끝에 도미니코 사비오는 오라토리오 내 몇몇 마음 맞는 친구들을 모아 작은 모임 하나를 결성했습니다. 모임의 이름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회’였습니다. 회원들은 세세한 규정도 만들면서 자신들을 성모님께 온전히 봉헌하고, 성모님께 매일 사랑과 희생과 봉사라는 꽃다발을 봉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세례 받은 지 30년, 40년, 50년이 지난 아직도 성모님께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졸라대고 투정 부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그 어린 소년들이 성모님께 청하기보다 그분께 해드릴까 고민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니다.
신앙의 깊이는 결코 나이나 연륜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도미니코 사비오는 오늘 우리에게뚜렷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도미니코 사비오처럼,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끊임없이 성장하고 또 성장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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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VO5F2hGo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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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것만큼 큰 활동은 없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찬미 예수님! 부활 제5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참포도나무로, 우리를 가지로 비유하시며 단 하나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가서 무엇을 하라"가 아니라,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종종 이런 의문이 듭니다. 세상은 1분 1초가 다르게 변하고, 우리는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데, 주님은 왜 자꾸만 가만히 '머무르라'고만 하실까요? 무언가를 쟁취하려면 역동적으로 움직여야지, 나무에 붙어 가만히 머무는 것은 너무 수동적이고 게으른 태도가 아닐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착각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머무름'은 가만히 쉬는 수동적 상태가 아닙니다. 머무는 것만큼 힘든 활동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가장 격렬하고 역동적이며, 생존을 위해 내 생각을 완전히 부숴야 하는 가장 치열한 활동입니다.
이 '머무름의 신비'를 완벽하게 증명해주는 우주 물리학의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정지궤도(Geostationary Orbit)'입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수많은 인공위성 중에서도 통신이나 기상을 담당하는 위성들은 지구에서 볼 때 항상 똑같은 자리에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들은 하늘 한가운데 둥둥 떠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주 물리학의 진실은 우리의 눈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 위성이 지구의 한 지점 위에 완벽하게 머무르기 위해서는, 지상 3만 5천 킬로미터 상공에서 자전하는 지구의 속도와 정확히 똑같은 속도로 날아가야 합니다. 그 속도가 무려 시속 11,000킬로미터, 즉 1초에 3킬로미터를 날아가는 엄청난 초음속입니다. 만약 이 위성이 엔진을 끄고 진짜로 '가만히' 쉬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중력에 이끌려 지구로 추락해 산산조각이 나거나, 우주 미아가 되어 영원히 사라져버립니다.
우리의 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화롭게 머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정지궤도 위성은 지구와의 완벽한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1초에 3킬로미터라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우주 공간을 질주하는 '가장 치열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머무름은 멈춤이 아닙니다. 대상과 완벽하게 속도를 맞추기 위한 초고속의 동기화 작업입니다.(출처: 아서 C. 클라크, 『정지궤도 통신 위성의 원리』)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다." 이 말은 "나는 여러 포도나무 중 하나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그 참 열매를 내가 맺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완전히 머무르신 분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의 뜻이고, 아버지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야 합니다. 옛 이스라엘이 계약을 잃어버려 들포도를 맺었다면, 새 이스라엘인 교회는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붙어야 참 열매를 맺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겉보기에는 그저 나른하게 매달려 바람을 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지의 내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거대한 공장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가지는 나무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 순간 거센 바람의 저항을 견뎌내고, 중력을 거슬러 나무 기둥으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필사적으로 빨아들이며, 광합성을 통해 에너지를 변환시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내 안의 이기심과 싸우고, 밀려오는 세상의 유혹을 필사적으로 쳐내는 맹렬한 영적 투쟁입니다. 이러한 '머무름이 곧 가장 위대한 활동이다'라는 진리를 증명하는 또 다른 생물학적 법칙이 있습니다. 바로 번데기(Chrysalis)의 법칙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고치를 틀고 번데기가 되면, 겉으로는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머무름의 상태입니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이 번데기 내부를 조사해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번데기 안에서 애벌레는 소화 효소를 분비해 자신의 몸 전체를 완전히 녹여버립니다. 형체조차 없는 영양 수프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수프 안에서 '상상 원반(Imaginal disc)'이라는 새로운 세포들이 미친 듯이 분열하며 나비의 날개와 다리를 조립해 냅니다.
가장 조용히 머무는 그 시간 동안, 내부에서는 옛 자아를 완전히 해체하고 하느님의 본성(나비)으로 재창조되는 가장 맹렬한 활동이 폭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머무름은 옛 자아를 죽이는 피눈물 나는 작업입니다.(출처: 리처드 도킨스, 『지상 최대의 쇼』)
성경은 이 '머무름의 지난한 노력'을 구약의 탈출기 14장 홍해의 기적에서 명확히 보여줍니다. 뒤에서는 이집트의 전차 부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죽일 듯이 달려오고, 앞에는 시퍼런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생각과 본능을 꺾고 하느님의 대리자인 모세에게 온전히 머무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고 싶은 생존 본능이 솟구쳤을 것입니다. "당장 무엇이라도 해보시오!"라며 원망하는 그들에게 하느님은 상식을 파괴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꼼짝하지 말고 서서(Stand firm), 주님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탈출 14,13) 인간의 눈에는 발버둥 치는 것이 생존 같았지만, 하느님은 "내 은총의 궤도 안에 가만히 머물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갗을 찢는 듯한 두려움을 삼키고, 자신의 얄팍한 생각을 꺾은 채 모세의 말씀 안에 '머물렀을 때',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구원은 나의 행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수액이 내 영혼을 관통하도록 나를 치열하게 묶어두는 '머무름'에서 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종종 본당에서 수많은 직책을 맡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땀을 흘려야만 하느님을 위해 큰일을 한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내 영혼이 성체대전에 고요히 머무는 시간 없이 겉으로만 바쁘게 움직인다면, 그것은 포도나무에서 잘려 나간 가지가 바닥에서 혼자 뒹굴며 먼지를 일으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는 봉사라면 차라리 봉사를 하지 않고 성체조배하는 것이 더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변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헛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된 종교』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밖으로 나다니지 마십시오. 당신 자신 안으로 돌아가십시오. 내면의 중심에 진리이신 하느님이 머물고 계십니다. 당신이 그분 안에 머물기만 한다면, 멈춰 있는 당신의 발걸음이 이미 하늘 끝에 닿아 있을 것입니다."(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참된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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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꾸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함께 있지만, 마음과 방향은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겸손과 희생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영광과 자리, 명예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정신, 곧 사랑과 생명을 말씀하셨지만, 율법학자들은 규정과 형식에 머물렀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사람을 안식일의 틀 안에 가두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큰 ‘동상이몽’입니다.
이 모습은 2천 년 전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특별히 ‘교포 사목’의 현실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사목하다가 미국으로 오게 되면,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다르게 느껴집니다. 신앙은 같지만, 표현이 다르고 공동체의 분위기도 다르고, 기대하는 것도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부담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이곳의 방식이 한국에서 온 사제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했는데 왜 여기서는 다르게 하십니까?”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는 미국입니다. 미국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두 분의 말씀은 모두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서로 다른 기대와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동상이몽’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동체는 조금씩 지치게 됩니다. 작은 오해가 쌓이고, 서운함이 생기고, 때로는 말하지 못하는 거리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마치 같은 기차선로 위에서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두 기차와 같습니다. 방향이 다르면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상동몽(同床同夢)’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같은 꿈을 꾸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서로를 마주 보면 부족함이 보입니다. 고쳐야 할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곳을 바라보면 목적이 보이고,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서로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향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이 되어 오셨고,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하기 위해 낮아지셨습니다. 이것이 ‘동상동몽’의 시작입니다.
초대교회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음식 나눔의 문제로 불평이 생겼을 때, 사도들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봉사자 일곱을 세워 역할을 나누었습니다. 각자의 은사에 따라 공동체를 섬기도록 했습니다. 또한 할례의 문제로 큰 논쟁이 있었을 때, 사도들과 원로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토론하며 식별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상황에 맞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동상이몽’을 ‘동상동몽’으로 바꾸어 갔습니다. 저도 사목을 하면서 한 가지를 늘 마음에 새기려고 합니다. 바로 ‘만남, 경청, 식별’입니다. 먼저 만나야 합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어야 합니다.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 안에서 식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걸어온 길이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기능이 아무리 좋아도, 디자인이 아무리 훌륭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떨어지면 말라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붙어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우리가 있는 곳이 미국이든, 한국이든,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떨어지면,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결국 ‘동상이몽’이 됩니다.
우리 공동체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분명합니다. 바로 포도나무인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같은 꿈을 꾸게 됩니다. 우리 교포 공동체가 ‘동상이몽’을 넘어 ‘동상동몽’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함께 바라보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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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삐뚤어질 테다.” 부모나 주변 사람이 내가 바라는 것을 해 주지 않을 때 일부러 반항하겠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망가지는 것을 가장 마음 아파하기 때문이지요. 자녀들은 반항심으로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참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어린 자녀들은 그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깨닫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갖는 관계에서도 “삐뚤어질 테다.”라고 말하는 자녀들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 막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시련에 아파하다가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경우를 때때로 봅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시련이 와도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습니다. 성당에 다니며 실망하게 되는 일도 많고, 본당 신부나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는 형제자매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날마다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며 성당을 떠나지 않습니다. 신앙의 든든한 힘은 거창한 환시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예수님께 의지하는 끈기와 인내에서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이 신앙의 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요한 15,1-8 참조). 성당에 꾸준히 나온다고 모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실망스러워도 예수님께 붙어 있다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화가 나도 예수님 안에서 화내고, 슬퍼도 예수님 안에서 슬퍼합시다. 어떤 상태에 있든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결국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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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1-8: 내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참 포도나무”라 부르시며, 제자들을 가지라 하신다. 이 비유는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러야만 생명을 얻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드러낸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당신의 존재를 밝히신다. 아버지는 농부로서 포도나무를 가꾸시고, 아들은 생명과 은총의 근원인 참 포도나무이시다. 우리가 그분께 접붙여진 가지라면, 우리의 생명은 전적으로 그분께 의존한다. 성 치릴로는 이렇게 말한다. “포도나무의 뿌리가 가지에 자기 힘을 퍼뜨리듯, 하느님의 말씀은 성령을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생명을 부어 주신다.”(Commentarius In Joannem 의역) 곧,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절).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때로는 고통과 시련으로 정화하신다. 이는 벌이 아니라, 더 큰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사랑의 손길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주석한다. “머무르기를 원치 않는 가지만 잘려 나가고, 머무르는 가지는 더욱 깨끗하게 다듬어진다.”(Homiliae in Ioannem 75 의역) 따라서, 우리의 시련은 버림받음이 아니라, 더 큰 열매로 이끄는 하느님의 섭리이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절)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분과 단절된 채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다. 우리의 생명과 선행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에서 나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마르듯이,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Tractatus in Ioannem 81, 요한 15,5 의역) 따라서, 우리의 겸손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 안에 뿌리내리는 데서 시작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절). 우리의 착한 행실과 사랑의 열매는 단순히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결합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맺고, 그들의 삶 전체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된다.”(736항 요약) 곧,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명이다.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 머무를 때만이 살아 있고 열매 맺으며, 참된 제자가 된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라는 말씀처럼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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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요한 15,1-8 (나는 참포도나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함께>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당신
없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사오니
나와
함께
당신께서
몸소
하소서
나
없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니
당신과
함께
내가
기꺼이
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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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원하는 바를 다 이루어 주리라>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한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달라고 떼를 쓴다. 그러나 그분의 뜻을 알아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소망하며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는 기도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7).하고 말씀하셨다. 결국, 주님 안에 머물고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과 일치할 때 효과적인 열매를 맺는 기도가 된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예수님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나를 이끌도록 맡기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만큼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다. “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이다.”(성 마더 데레사).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그 열매는 하느님의 열매가 맺어진다. 그러므로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의 일치된 마음을 살펴야 한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있을 때 생명력을 지닌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들지 않는다. 몸통이 튼튼해야 가지의 열매도 튼실하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이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하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종’이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이가 늘어난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로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길 희망한다.
“주님,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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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가자마자 보게 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입니다. 사실 처음에 이 작품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의 비판이 많았다고 합니다. 피에타를 정면에서 바라보면, 성모님의 모습만 도드라지고 그 품에 안긴 예수님은 옆 모습만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성모님이 주인공 아니냐며 항의했던 것입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조각은 하느님께 바친 것이니, 감히 인간의 시선으로 평가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성모님이 주인공이었을까요? 신기한 것은 실제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작품의 중심에 예수님의 섬세하고 신비로운 얼굴이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중심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피에타만 그럴까요? 세상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시선과 인간의 시선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시선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시선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느님 안에 머무를 수 없으며, 하느님의 뜻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참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명백하게 정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부르신 것은 당신만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 참된 생명을 주는 유일한 구원한 통로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아버지는 이 포도밭을 정성껏 돌보시는 농부이시며, 우리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고 오직 이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다는 것은 단순한 소속감이나 회원 자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액이 나무에서 가지로 끊임없이 흘러야 살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생명, 성령, 은총 등을 끊임없이 흘러나와야 가지인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즉, 진정한 결합을 이루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무능함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현실입니다. 가지 스스로의 힘으로는 단 한 알의 포도도 맺을 수 없듯이, 우리의 모든 결과물은 주님과 연결되어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는 존재 목적을 잃고 결국 메말라 불에 던져질 뿐이라는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힘으로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인간의 시선에만 머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단단히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시선입니다. 사랑으로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열매를 맺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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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머물다'는 말의 의미>
오늘부터 예수님의 고별 담화의 두 번째 부분이라 할 수 있는 15장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15장은 흔히 말하는 ‘관계의 장’으로 아버지와 예수님,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과 제자들과 세상과의 관계를 계시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참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예수님의 진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붙어있다, 머물다, 열매 맺다'라는 동사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특히 '머물다'라는 단어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정주'를 서원하고 살아가는 우리 수도승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머물다'의 의미는 우선 '붙어있음'을 뜻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 그 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음이듯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죽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머물다'라는 말은 생사를 담보로 맺어지는 유대의 끈을 말합니다. 곧 뗄래야 뗄 수 없는 생명으로 유착된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를 뜻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코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다 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려져 불에 태워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머물다'는 말의 의미는 그분 말씀의 권능이 우리 안에서 열매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에 속해 있을 뿐 결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는 없듯, 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이처럼 '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자신을 내어주는 ‘상호 친교’요 ‘상호 교제’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삼위 하느님의 내주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그분과 결합하여 한 영이 됩니다.
이를 가리켜 사도 바오로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 분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 6,17)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우리 안에 당신이 머무르신다는 이 놀라운 사랑의 신비 앞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신비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이 머무시는 현존의 자리요, 그분이 사랑의 열매를 이루시는 활동의 공간이요, 장소인 것입니다.
실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우리 안에 정주하십니다. 이 얼마나 큰 감사와 감격인가요. 그러니 지금 여기 공동체 안에 머물러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행복입니다. 이미 차고 넘치는 자비요 은총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단지 공동체에 정주하는 회원으로 지탱하는 것을 넘어, 사랑의 실현인 열매를 맺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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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주님!
당신께서는 무너뜨리지만 열매를 맺어주셨고, 부서뜨리지만 새싹을 틔워주셨습니다.
이토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서야, 제 자신을 건네주고서야, 당신께 머무르는 법을 배워갑니다.
꽃이 지듯, 제가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게 하소서.
열매가 떨어지듯, 제가 사라지는 것을 서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저는 오늘도 떨어져야 머물게 되는 이 신비로운 사랑 앞에
떨어지지 못함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고개를 떨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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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 15,1-8)
1)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는 가지”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신앙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산상설교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
예수님에게 ‘주님, 주님!’ 하는 사람들은, “나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다.”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는 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킨 것은 다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라고 그들을 꾸짖으셨음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킨 것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일들이고, ‘불법인 일들’, 즉 ‘악한 일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한 예언은 ‘거짓 예언’이고, 마귀를 쫓아낸 일은 ‘가짜’이고, 그들이 일으킨 기적은 ‘속임수’입니다.
그들 자신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 일들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자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님의 이름을 모독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 “안에 머무르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 말씀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집 안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먼 고장’으로 떠났다가(루카 15,13), 회개하고 돌아와서 ‘집 안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큰아들의 경우를 보면, ‘몸’은 계속 아버지의 집 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마음’은 떠나 있었고(루카 15,29), 동생이 돌아온 뒤에는 몸도 마음도 모두 ‘밖에’ 있습니다.(루카 15,28) 쫓겨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하늘나라로 바꿔서 생각하면,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자격을 얻지 못해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밖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경우가 많이 다르게 보이는데, 사실은 같은 경우입니다.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들어갈 수 있도록, 즉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원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사실상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3) 착하고 순하게 살면서, 죄를 짓는 일도 없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이 바로 그 경우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9-30)
세 번째 종과 같은 경우에 해당되는지 아닌지를 남들은 잘 모르고, 본인 자신도 모를 때가 많은데, 예수님께서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서 주신 가르침은 분명하고 단호합니다. “죄를 안 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선’과 ‘사랑’을 실천하여라.”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생활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의 일을 함께하면서, 즉 선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은총에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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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류해욱 요셉 신부님]
<진짜 순 참 포도나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여러분들, 포도나무 또는 포도덩굴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는 이육사의 싯귀가 떠오르는 분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큰 느낌이나 별 이미지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을까요? 우리가 ‘나는 포도나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바르게 알아듣기 위해서는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해야 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포도나무는 바로 그들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상징이 있다면 머리에 쓴 빵모자나 가슴에 단 별이 아닙니다. 바로 포도나무였어요.
구약에서 수없이 이스라엘은 포도나무나 하느님의 포도원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 몇 개를 듣기로 해요.
시편 80, 8입니다. “이집트에서 빼내어온 포도나무, 이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 자리에 심으신 후 그 앞에 땅을 가꾸시니 뿌리박고 널리 퍼졌사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하는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드리리라.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 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 포도가 웬 말인가?”(이사 5, 1-3)
예언자 예레미야도 한탄합니다. “특종 포도나무를 진종으로 골라 심었는데 너는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변했구나.”(예레 2, 21)
호세아 예언자도 참담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이스라엘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를 맺기는 했으나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만 늘어갔다.”(호세 10, 1)
예제키엘 예언자는 15장 전체를 ‘포도덩굴의 비유’로 할애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를 외칩니다. “너 사람아, 포도덩굴이 무엇이냐? 숲 속에서 자란 포도덩굴을 땔감으로 불에 지어 넣듯,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을 나는 불에 집어넣으리라.”
이렇게 구약성서에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했고, 포도나무는 바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포도나무가 원래의 좋은 품성을 잃고 열매 맺지 못하는 잡종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통탄하며 경고를 퍼붓고 있습니다. 원래는 좋은 포도나무, 진짜, 순, 참 포도 나무였는데 생명이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면서 변종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징으로 가장 잘 드러난 외적인 표징이 바로 성전 중앙에 있던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포도덩굴이었지요. 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성전의 중앙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포도덩굴은 다시 한번 이룩할 이스라엘의 번영과 영광을 상징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저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포도덩굴이 아니라 사람들 눈에 힘없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당신이 바로 진짜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말로 ‘참’으로 옮긴 희랍어 단어는 alethinos (에이레씨노스)인데 정통적인, 가짜가 아닌 진짜, 순수한 등의 의미를 지닌 낱말이지요.
우리가 참기름을 사려고 보면 ‘진짜 순 참기름’이라고 선전해 놓은 간판을 보지요. 알다시피, 가짜가 판을 치고 있는데 이 참기름은 가짜가 아닌 진짜 순수한 참기름이라는 말이지요. 그래도 사람들이 잘 안 믿어요.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실 때 가짜가 아닌 진짜, 진종의 포도나무라는 의미이고 여기서 ‘진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가짜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휘황찬란하게 보이는 성전의 황금으로 만든 포도덩굴은 가짜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셨을 말씀을 귀 기울이고 들어봅니다.
“그대들은 이스라엘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요. 만일 그대들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구원받으리라는 생각을 지니고 안심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산일 뿐만 아니라 찬란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오. 그대들은 예언자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시오! 하느님께서 좋은 참 진짜 진종의 포도나무를 심으신 것은 사실이지요. 시편 말씀대로 그 좋은 포도나무를 이집트에서 빼내온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말이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대로 그대들은 점점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변했어요. 예언자 호세아 애통해하면서 한탄한대로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만 늘어갔구료. 하느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제단의 향이 아닌데 말이오. 예제키엘 예언자의 예언대로 마치 잘못 자란 포도덩굴을 땔감으로 불에 집어넣듯이 그대들이 불에 던져 질 것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소이다. 이제라도 그 불을 면하려거든 제발 아버지께서 보내신 나 예수를 믿으시오.
내가 참 포도나무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그대들을 구원한 진정한 구세주란 말이오. 그대들이 구원을 얻으려거든 모두 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사실 단순히 나에게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느냐고요? 내 말을 실행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내가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내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형식과 허례허식으로 전락한 율법, 그 중에서도 안식일 법, 정결례 법, 제사 등의 외적인 것에 매달리지 말고, 그대들 자신의, 그리고 서로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고, 가진 것을 나누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는 유일한 길이지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른다고요? 우선, 나와 함께 머무르시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하듯이 나에게 머물러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사랑이시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서는, 다시 말해, 사랑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지요.
그대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봄이 오기 전에 가지치기를 당할 수밖에 없지요. 사실 아버지께서 굳이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셔도 나를 떠난 가지는 이미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리게 마련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 불에 태워 버리게 됩니다. 불을 보듯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아시오. 그러니 제발 그대들은 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는 자양분을 받고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런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 말씀들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말씀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제 진정으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 다투지 말고 아껴주고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기로 합시다. 제발 당신이 진짜 순 참 포도나무라고 외쳐야 하는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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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정민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사랑>
포도에 관련된 비유들이 성경 안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포도가 성경의 땅인 이스라엘의 주된 농작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오늘 포도나무에 비유하시며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가지에 싹이 돋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영글어가는 과정은 신앙인의 삶과 같습니다.
포도가 익어가려면 나무로부터 끊임없이 양분과 수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신앙인도 주님 안에서 자신의 성숙을 위한 양분과 수분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무슨 뜻일까요? 포도나무의 열매는 물론 포도이지만 이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열매’는 바로 신앙인의 삶의 거룩함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1,45)는 말씀처럼 우리 삶의 성화야말로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의 참된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성장시키는 양분과 수분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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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신부님]
자신이 애써 가꾸어 얻은 농작물에 대해 더 좋은 값을 받으려는 것은 모든 농부들의 공통된 심정이겠지만, 저희 아버지는 그 정도가 더 심하셨고, 굉장한 자부심까지 가지고 계셨습니다.
또한 어떻게 하면 더욱 품질이 좋은 수확물을 거둘 수 있을까 고심하시면서 나름대로 연구도 하셨고, 포도나무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으셨습니다.
포도 수확철이 되면 아버지와 함께 포도를 따고, 상자에 포장하여 도매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자주 했습니다.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볕 아래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포도를 따고, 그것들을 가지고 저녁 무렵 차에 싣고 서울까지 가야 하는 그 일이 젊은 저도 힘들었는데 아버지는 얼마나 더 힘드셨을까요? 그런데도 아버지께서는 늘 싱글벙글이셨습니다.
도매시장에 도착하면 아버지의 성함이 적힌 포도들이 다른 포도들보다 훨씬 좋은 가격에 많이 팔리기 때문이었지요. 정말 정직하게 땀 흘려 얻으신 결실이 아버지의 피곤을 말끔히 씻어 주었고, 그로 인해서 아버지의 이름 세 글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영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포도밭에 나가면 ‘애들아, 너희들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겠니. 부탁한다’ 하고 혼자 중얼거리곤 합니다.
우리 모두도 주님의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늘 좋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이네’ 하고 칭찬할 테지만, 결국 더욱 커다란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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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5)
당신과 항상 머무르고 싶지만, 제 삶은 자주 당신과 멀어집니다. 당신은 제게 가까이 오시려 하지만, 저는 당신을 밀쳐냅니다. 당신은 늘 그곳에 계시지만 저는 다른 곳을 바라봅니다.
다른 곳을 바라보기에 당신을 자주 잊습니다. 당신의 꿈보다 제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꿈보다 헛된 세상의 꿈을 우리 안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꾸는 꿈은 하늘나라의 꿈 보다 자주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꿈은 이 세상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천지창조 때 만드신 에덴동산을 이 땅에 다시 가꾸시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사랑의 열매로 채우고, 모든 사람이 사랑의 에덴동산에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다시 탐하는 꿈을 꿉니다. 모든 것이 주어져도 모자라는 한 가지마저 채우려는 욕망입니다. 그 한 가지마저 채우려는 것은 우리가 에덴동산의 아픔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멀어져 아벨을 죽이고, 말씀에서 멀어져 예수님을 죽이며,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우리는 자신을 죽입니다. 천지창조 때부터 우리는 하느님을 더욱더 멀리하지만, 주님은 더 가까이 오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애타게 찾는 것보다 당신은 우리를 더욱더 애타게 찾습니다. 엄마를 잃은 아이는 자라면서 엄마를 잊을 수 있지만, 아이를 잃은 엄마는 평생 아이를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를 떠난 가지인 우리를 잊지 못하시는 주님께서 애타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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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
머무름은
가장 좋은
오월의
사랑입니다.
머문다는 것은
단순히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이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생명도, 열매도
없습니다.
삶의 깊이는
성과가 아니라
관계의 뿌리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는 것입니다.
뿌리가 건강하면
열매도 건강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먼저 열매가 아니라
머묾을 말씀하십니다.
머문다는 것은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듯
열매의 시작은
머무름입니다.
머무름은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 안에 거하는
상호적 만남의 완성입니다.
열매는 진정한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존재의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치고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는
열매가 없어서라기보다,
머무는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분주할수록 잠시 멈추어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우리의 오늘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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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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