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로펌 사건 회피로 대법원 ‘민폐’가 된 권영준 대법관
대법관 한 명이 한 해 주심을 맡아 처리하는 사건이 지난해 평균 4038건이었다. 2000년대 후반 2000건대에 진입했고 2010년대는 대체로 3000건대였으나 지난해 4000건대로 올라섰다. 매주 77건의 사건을 처리하는 셈이다.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해도 매일 11건씩 처리해야 할 정도로 사건이 많기 때문에 상고법원 얘기도 나오고 대법관 증원 얘기도 나온다.
▷권영준 대법관은 7월 중순 취임 후 사건 59건의 주심을 회피했다. 회피는 재판관 본인이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고 여기는 사건의 취급을 피하는 제도다. 권 대법관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때 대형 법무법인(로펌) 7곳이 맡은 사건 38건에 대해 법률의견서를 써주고 18억 원을 받았다. 권 대법관은 이 사실이 논란이 되자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대법관이 되면 제가 관여하지 않은 사건이라고 해도 관계를 맺은 로펌의 사건은 2년간 모두 회피 신청하겠다”고 약속했다. 2년으로 한정한 것은 이해충돌방지법에서 이해당사자로 간주되는 기간이 2년이기 때문이다.
▷59건은 대법관 한 명이 두 달간 처리하는 사건의 약 10%에 해당한다. 권 대법관이 약속을 지키려면 매년 350여 건씩, 2년간 700여 건을 회피해야 한다. 물론 본인이 회피하는 사건의 수만큼 다른 사건을 넘겨받기 때문에 처리하는 사건 수는 차이가 없다. 다만 대형 로펌이 수임한 사건은 복잡할 가능성이 커 다른 대법관들이 처리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 수 있다.
▷회피는 본래 사건의 주심을 맡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선고를 위한 합의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회피를 제대로 한다면 권 대법관은 다른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사건이 대형 로펌과 관계돼 있을 때도 합의에 참여할 수 없다. 대법원 사건은 일단 소부(小部) 처리가 원칙이다. 소부에서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파장이 예상되는 사건만 전원합의체에 회부된다. 대법원에는 3개 소부가 있고 각 소부는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다. 대법관 각자가 주심을 맡은 사건 중 대형 로펌 사건이 약 10%라고 한다면 권 대법관은 자신이 속한 소부의 사건 약 10%에 대해 ‘없는 재판관’이나 다름없다.
▷대법관은 자신이 주심을 맡은 사건도 산더미이기 때문에 다른 주심이 맡은 사건까지 세세하게 검토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법리적으로는 엄연히 4인 합의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소부의 선고다. 권 대법관이 속한 소부는 상당수 사건을 3인 합의로 부실하게 선고하는 셈이 된다. 권 대법관도, 국회도 논란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과도한 약속으로 우회했다가 대법원 운영에 2년 내내 부담을 주게 됐다.
송평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