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처럼 생겼지만 나방… 천적인 박쥐 피하려 초음파 쏘는 종류도
박각시
▲ 지난 5일 충북 청주에서 꼬리박각시가 해바라기에서 꿀을 채취하고 있어요. /연합뉴스
얼마 전 충북 청주에서 대롱처럼 생긴 주둥이를 꽃에 꽂고 열심히 꿀을 빠는 동물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어요. 쉴 새 없이 날갯짓하는 모습이 벌새와 빼닮았지만, 더듬이 한 쌍이 있어 새가 아니라 곤충임을 알 수 있었어요. 주인공은 박각시의 한 종류인 꼬리박각시였답니다. 박각시는 나방의 한 무리로 큰 몸집과 굵직한 몸통, 독특한 무늬, 천적을 피하기 위해 벌이는 기묘한 습성으로 유명해요. 박각시과(科)에는 전 세계에 2000여 종류가 있고,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것이 58종에 달합니다.
이들 대부분은 나비처럼 꽃의 꿀을 빨아 먹고 사는데, 이 때문에 박각시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보여요. 밤에 피는 박꽃으로 날아들어 꿀을 먹는 모습을 보고 옛사람들이 '박'과 갓 결혼한 여성을 뜻하는 '각시'를 붙여서 이런 이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나방처럼 밤에 활동하면서 밝은 곳으로 몰려드는 종류가 많아요. 꿀을 빨지 않을 때는 나비처럼 주둥이가 동그랗게 말려 있답니다. 주둥이 길이는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종류는 자기 몸의 두 배 이상 길고, 어떤 종류는 보일락 말락 하게 퇴화했어요.
박각시 주둥이는 과학자 찰스 다윈의 진화론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답니다. 다윈은 마다가스카르에서 30㎝ 깊이에 꿀 주머니가 있는 난초를 발견하고, 이 깊이만큼의 기다란 주둥이로 꿀을 빨고 가루받이도 해주는 곤충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대요. 동료 과학자들이 코웃음 쳤지만, 다윈이 죽고 난 뒤 박각시가 발견되면서 예측이 결국 들어맞았죠.
박각시 중 특히 유명한 건 벌새와 닮은 꼬리박각시예요. 실제로 이 곤충을 보고 "와! 한국에 살지 않는 벌새가 발견됐다"고 제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대요. 꼬리박각시는 생김새뿐 아니라 1초에 날개를 50회나 퍼덕이며 제자리에서 정지 비행을 하는 것도 벌새와 빼닮았죠. 이처럼 종류가 완전히 다르지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김새가 비슷해지는 현상을 '수렴 진화'라고 해요. 물속을 헤엄치는 고래와 물고기, 하늘을 나는 박쥐와 새, 땅굴이나 나무 구덩이에 무리 지어 사는 개미와 흰개미 등이 모두 수렴 진화 사례랍니다.
박각시는 비행 능력이 아주 뛰어나 어떤 것은 시속 50㎞까지 속도를 낼 수 있대요. 빠르게 날아가는 모습 때문에 미국에서는 박각시를 매나방(hawk moth)이라고 불러요. 박각시 무리 중에는 현란한 날개 무늬를 가진 종류도 많아요. 그중 뱀눈박각시는 이름처럼 날개 한 쌍 아래쪽에 마치 뱀의 눈이 연상되는 무늬가 있어요. 이 무늬는 천적이 멈칫하게 하는 효과가 있죠.
외국의 어떤 박각시는 천적인 박쥐가 초음파로 자신의 위치를 포착하지 못하도록 이를 교란하는 초음파를 쏜대요. 또 일부 박각시 애벌레는 몸에 기괴하고 섬뜩한 무늬가 있어 천적을 오싹하게 한대요. 박각시 애벌레는 대개 엉덩이 부분에 기다랗게 뿔처럼 돋은 부분이 있어 다른 곤충 애벌레랑 구분돼요. 짝짓기를 한 뒤 암컷은 최대 500개까지 알을 낳는대요.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는 대부분 번데기 상태로 겨울을 난 뒤 이듬해 성충이 되죠.
정지섭 기자 도움말=안능호 국립생물자원관 생물종다양성연구과 환경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