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눈이 확 돌아간 6.25事變인가 전쟁인가
내 나이 7살. 이북놈이 쳐들어 왔다고 방방 뛰던 밑의 집 '기철' 어머니
한강다리 끊어져 미처 피난 못간 우리 집 늘 들들 볶겨 밤마다 회의에 불려나가고 조 이삭에 몇개의 좁쌀알 세어서 가고 완장차고 눈날이 빨개서 펄펄 뛰는 발갱이들 인민 재판에 불려나와 발벌 떠는 사람들을 에워싼 구경꾼들
어린 사내 아이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막대기 끝에 시체의 머리칼을 들고 우리들을 쫓아다니며 으흐흐 귀신이다 하며 쫓아다니던 엽기적인 생활이 생각나 지금도 소름이 끼쳐 몸을 떤다.
1.4후퇴? 천태만상인 피난민이 꽉찬 거리에 우리도 있었다. 아주 추운 날씨 이불 둥치에 쌓인 채 버려진 아가 손에 가래떡을 들고 엄마를 부르며 우는데 죽었을까 살았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피난길. 한번은 피난 행렬을 놓쳐 숲을 헤메다 도로가 나오는데 그곳에 탱크 부대. 군인차. 총을 든 외국군인들, 그리고 국군의 어마어마한 행렬을 보고 우린 얼어붙었다.
그 중 국군 한분이 아버지를 보고 손짓을 하니 엄마 아버지 나도 머리에 손을 얹고 따라갔었다. 군인은 여기는 최전방이니 얼른 딴길로 피하라고 딴 외국인이 말 안 통하면 총으로 갈긴다고 아버지 얼굴은 하얗다 못해 노랗게 질렸었다.
길에서 만난 누런 솜누비 옷을 입은 인민군 서울이 얼마나 살기 좋은데 어서 돌아가라고 일장 연설 그래도 모두 고개 돌리고 피난길을 간다.
하루는 삐 29비행기(?) 한번 돌면 다음비행기 어김없이 폭격? 엄마 아버지는 짐 보따리를 내려놓고 그 밑으로. 폭격이 멎자 부모는 그제서야 나를 찾는데 이불 귀퉁이에서 "엄마 나 여기있어" "아이고귀여운 내 딸" "우리 식구 다 살았구나" 4식구는 좋아 길에서 방방.
그리고는 즉시 도망 가는데 좀 떨어진 논 바닥에 죽은 시체가 즐비 엄마 아버지는 내 팔만 붙들고 달려 난 무릎으로 시체를 스치며 질질 끌려갔다.
그날 저녁에 남의 집 외양간을 얻고 소금 주먹밥을 먹는데 4식구 다 살아서 먹는 그 밥이 그렇게 맛있다고.
피난민 행렬 중 어느 여인이 애기를 낳는다. 으앵~ 아가의 울음소리. 죽음의 바다에서 삶의 꽃 한송이 희망의, 축하의 물결이 넘쳤다. 죽음과 삶이 한자리에 공존했다. 여자 아가의 이름은 피난민 길에서 낳아 '필원'이라 즉시 지었다.
어느 날 저녁 엄마는 남동생에게 물색이 고운 비단 옥색 바지 저고리 그리고 연분홍 빛깔의 비단 두루마기 입히고 눈물을보인다. "우리 도련님 곱기도 하지." 다음날 한복과 두루마기는 곡식과 맞바꾸었다. 오랫만에 김치를 맛있게 먹었다.
우리는 늘 외양간을 빌려 잠을 청했다. 엄마 아버지는 밤마다 무슨 그리 많은 이야기를. 이 거친 상황에도 사랑도 했나? 어떤 때는 마주보며 웃기까지 한다. 하루 살이 인생이라 하루 산 것이 그리 기쁠까? 난 무서워 죽겠는데.
봄이다. 주위는 평화롭고 화사한 신록의 세상. 우리는 고향을 찾는 길 하염없이 걷는다. 남동생은 4살. 밭에는 김을 메던 농촌 아주머니들이 어머나 귀여워라 저 애기가 짐을 졌네 하며 웃는다.
옆을 지나가던 미군인이 차를 세우더니 피난 보따리 이고 지고 있는 우리 4식구의 사진을 찍는다.
여기는 김포. 남의 집 건너방에서 산다. 엉덩이가 썩는 안방 할머니 병간호를 엄마 아버지가 한다 아버지는 할머니 볼기 살에 입을 대고 피, 고름을 빨아낸다. 난 더러워서 웩웩하며 쩔쩔맸다. 때론 사는 것이 전쟁터보다 더 잔인하고 처절하다.
우리 식구 저녁이면 여름 강가를 나가 강물을 바라본다. 출렁이는 물결 위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노을 진 하늘, 강 물결은 아름다웠다. 자연은 언제나 무심하다. 감상을 하는 우린 얼마나 숱한 죽음을 넘나들며 고생을 했는데...
강물을 내려다 보이는 얕은 언덕엔 그네가 있고 12살쯤 잘 생긴 남자 아이가 늘 걸터 앉아 있다. 폭탄? 총알이 안터진? 것을 만지다 눈이 안 보인다. 그 남자아이와 난 친구가 되었다. 물들인 예쁜 은행알 주면서 오빠라고 부르란다.
지금쯤 살았으면 85살쯤 됐을텐데... 72년전 내가 겪은 6.25 사변이 꿈속같이 아련하다.
세월이 가면 그 놈의 이념 때문에 한 민족이 죽이고 죽는 도저히희 용납못할 천인공노할 이시대에 후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냉철하게 비판하는 반드시 날이 올것이다. |
첫댓글 일곱살이면 철이 들만한 나이니 다 알았겠어요
전쟁을 직접 경험하신 연대시군요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요 우마도 아니고 외양간
에서 잠을 자면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몹쓸 전쟁 너무도 비극입니다
다시는 이땅에 그런 비극은 없어야 겠지요
글 잘 보고 갑니다
네 전쟁 때는 누구나 다하는 고생이지만
우리식구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다녔었지요
우리 나라에 또다시있어선 안될 민족의 비극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안녕하세요 까만 몸뻬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념이 무엇이길래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고...
정말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비극이랍니다.
낭만님~
동족상잔의 비극 6.25를 직접 체험 하셨군요
고생도 참 많이 하셨겠네요
전 전쟁때는 아기라서 잘 모른답니다
왜 그리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는지
이념과 사상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비극은 없어야겠지요
잘 읽고 갑니다
오늘도 건강하게 하루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네 저나이 7갈이니 모든 기억이 생생합니다.
시인님 말씀대로 이념과 사상이 참 무섭지요.
너무나도 끔찍한 영원히 일어나서는 안될 비극입니다.
감사합니다
누구나 겪었던 6.25지만 특히나 힘들게 보내셨군요
우리 민족이 겪은 이 끔직한 비극을 이제는 대부분 까마득히
잊고 살지요
지금 우리가 맛보며 살고있는 이 편안함과 풍요를 아주 당연
한양 생각하면서~~
사실 무서웠던 것은 북한 군대 보다도 남한내에 자생했던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양민들은 대부분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죠
이념이란 그토록 무서운 것인데 그 당시 태어 나지도 않았던
젊은 세대들이 주체사상을 부르짖는 걸 보면 너무나 불안합니다
이땅에 다시는 그런 비극이 생겨 나서는 안 되겠죠
송지님
우리 민족이 겪은 이 끔직한 비극을 이제는 대부분 까마득히
잊고 살고 있다는 말씀 맞고
정말 무서웠던 것도 남한내의 자생했던 공산주의도 맞고
송지님 말씀대로 젊은 세대들이 떠들어 대는 주체사상이 불안한 것도 사실입니다.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비극을 여기서 누가 알까요?
기록을 생생히 잘 하셨네요.
저와는 많이 다르지만, 대체적인 역경이었을 겁니다.
참 잘 살아오셨어요.^^
난석님 이 비극을 누가 알겠습니까
선거 때 90살 넘으신 저의 시집 어른들이 아이들 원하는 표를 안찍고
반대 쪽으로 투표를 했는데 왜 그쪽의 표를 찍느냐고 아이들이 물었어요.
그 때 그 어른들이 너희가 뭘 아느냐 우린 6.25때 직접 빨갱이와 싸운 사람이다.
너희가 그 빨갱이 속성을 알기나 하냐고 말씀하셨죠.
이제는 얼마 안 있으면 6.25겪은 사람들은 다 사라질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할텐데 철없는 아이들이 걱정이 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아직도 생생한
그 아픔이 몇십년도 안돼
까마득히 잊혀가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낭만 선생님
여백 선생님
우리가 겪은 6.25를 앞으로 누가 기억하겠어요.
지금 그래도 90살 넘으신 분들은 자손들에게 함부로 까불지 마라
우린 직접 전쟁터에서"빨갱이와 싸운 사람이다,
너희가 뭘 아느냐고 조심시키는 말이라도 하지만...
철 없는 아이들이 걱정이 됩니다.
댓글 주심 늘 감사드립니다.
낭만 선배님 글을 읽다보니
가슴시려옵니다
얼마나 힘든 고행길이였을까
그래도 가족 모두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 아버님은 대화로
가족들을 안심시키신듯합니다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지요
천년.만년을 사는 것도
아닌데
참 불쌍한 인생들
낭만 선배님
늘 고운모습으로
오래 함께하시길 희망합니다
오늘도 피이팅 합시다.
청담님의 고운 댓글을 늘 저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그 힘으로 이 삶방에 글을 올리고 있는지도 모습니다.
6.25때는 나라 전체가 다 난리를 겪는 때라 고생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서울 사람들은 집이 불타고 빨갱이한테 목숨까지 위협을 받아
피난 살이를 했지요
고운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난와중에도 아름다운 강물과 노을진 하늘이 어린소녀의 눈에 아름답게 비쳐져 처연합니다
제 어머니도 마포에 사셨는데 6.25때 피난못하고 1.4후퇴때 고향 청주까지 걸어서 내려오셨던 얘기를
가끔 하셨습니다. 인민군들이 나오라 해서 무슨 단체도 가입하고 노래도 배웠다는 얘기도 하셨습니다
부모님이 마포에 사셨네요
서울 사람들이 한강다리 끊어지는 바람에
피난을 못가고 저희와 비슷한 생활을 하셨군요
그리고 거의 1.4후퇴 때 피난을 갔지요 .
서울서 청주까지 가시는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요.
당시는 살아있는것 만이라고 다행이라 생각했지요
어머니를 뵈오면 이야기꺼리가 많을 것입니다.
낭만 선배님~
생소하게 그때의 일들을 기억하십니다.
곱고 예쁜 한복 다음날 한복과 두루마기는
곡식과 맞바꾸시고 오랫만에 김치를 맛있게
먹었다는 이야기가 가슴을 찡하게 만드네요.
다시는 비극적인 전쟁은 없어져야 합니다.
행복 넘치는 날 되세요.
네 샛별사랑님
남자 동생 옥색 비단으로 만든 바지 저고리와 분홍 두루마기인데
너무 고왔지요. 당장 먹고 살려니 곡식과 맞바꾸었지요
다 72년전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너무 잘 들 살고 있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전쟁의 이런 저런 이야기 들을때마다 나이 들어도 무섭습니다 우리 얘들
그런거 겪지 않고 살아야지요
서로 싸우고 니편 내편하니
정신들 차려야 되지요
정말입니다
단일민족인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튼튼하게 자리잡아
잘 살았으면 합니다.
아이들 세계에서 이런 비극이 전혀 없는 대한민국이 되길 바랍니다.
늘 고운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6.25 전쟁당시의 경험을 일목요연하게 나열해주셨네요.
저는 충청북도 산골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전쟁의 실감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다만 북한 전투기한대가 논바닥에 떨어진 것을
동네사람들이 목도를해서 꺼집어내던 것만 생각이 납니다.
올려주신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 서울이서 일어난 6.25가 얼마나 처절하고 무섭고
두려운 비극인지 겪어본 사람을 다 압니다.
그래도 전쟁 때 편안하게 보내셨다니 다행입니다.
이제 이런 글도 몇년지나면 누가 올릴 까요.
젊은이들의 주체사상이니 주사NL(민족해방)파니 주사파를 떠들고 있지만
걱정이 되기도 합닏.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으로 생생한 6.25 피난생활 이야기를 읽습니다.
7살 4살 남매를 데리고 김포에 피난가셨군요.
7살짜리가 본 끔찍한 상황
아 전쟁이 다시는 일어 나지 않기를 !!!
네. 별꽃님 다시는 이런 전쟁이 나지 말아야 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부모남이 피난살이 하시느라 무척이나 고생하셨어요.
충청도까지 피난 갔으나 서울을 찾기 전 김포에 잠깐 머물렀어요.
거기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서울인 고향을 찾아 다시 자리잡았지요
그 때 남한이 적화됐더라면 어땠을까요?
지금 북한사람들 삶을 보면 끔찍합니다
낭만님의 생생한 6.25의 기억이 놀랍습니다
덕분에 온 몸으로 6.25를 느끼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읽는 내내 제가 의문을 품었던 이념간의 갈등
그 갈등에 의하여 일어난 비극들 참 아픈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아프다고 말은 하지만 겪은 사람들의 고통을 어떻게 표현 할 수가 있을까요
그저 고개만 숙일 뿐입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을 탓하지만 그들을 옳게 가르치지 못한 우리들의 잘못도
크리라 생각합니다. 도심의 한복판에서 김정은을 찬양하는 무리들을 보면 솔직히
똥물을 퍼붓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렇게 좋으면 그리로 가서 살면될 것인데.....
님의 글은 언제나 수려하며 현실을 볼 수 있게 만드시는 마법의 글입니다.
읽는 내내 그 현상들이 보이는 곳 같았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