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신운이 공부 운과 별개라는 말씀...
이해하기 어렵군요.
여쭙거니와, 그렇다면 용신운은 공부를 못하는 운이라는 말입니까?
보나마나, -그렇지는 않다-는 말씀을 하시겠지요.
참, 그런데, 어느 누가 용신운에 절대적으로 공부를 잘 한다고 주장한 그런 무모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다만, 용신운에는 공부를 잘 할 개연성이 크다는 취지 아닌가요?
물론, 용신운이라고 해서 꼭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지요.
만약, 그럴 개연성이 크다는 취지의 보편적 주장을, 마치 절대적인 주장인 것으로 받아들여 반론을 편다면
가장 근본적 논리 오류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좀 우스운 꼴이 되겠지요.
이런 개연성을 말한 대다수 주장에는 공부 뿐만이 아니라 여타 모든 상황도 부합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용신운이라고 해서 잘 사는 것만이 아니다, 혹은 용신운이라고 해서 건강한 것 만은 아니다..등등..
당연한 말씀이겠지요...보편론이니까요...
그러나 !!
절대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개연성이 가장 크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면
명리학인으로서는 그야말로 말씀처럼[큰일 날 일]이요, 그런 주장을 한다면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식언이라 보겠지요.
사주 중에 가장 요긴하게 필요한 용신,희신이지만, 그 길운이 와도 결국 명주에게 아무 의미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일 것이니
기존의 명리이론은 완전 폐기처분 되어야 겠지요.
또, 다른 여러상황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공부 역시, [잘 한다] [못 한다]는 상대 비교적인 개념입니다.
그 비교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되는 경우가 있겠고, 또 그 자신의 인생행로에서의 각 시점별로
비교가 되는 경우가 있겠지요.
그래서 [..보다 더 ~하다] 라는 구체적 비교표현이 아닌, 그저 [잘 산다, 못 산다], [잘 생겼다, 못 생겼다],
[키가 크다, 키가 작다] 등의 막연한 추상적 비교는 불특정 다수의 사회 구성원에 비교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비교 대상에 있어서도, 어느 명주가 용신운에 있어서 공부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그 명주보다 더 좋은 용신운에 있는 명주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는 밀릴 수도 있겠지요.
그 예로 수재들만 따로 모여 공부하는 학교가 해당 됨직한데, 거기서 전체 10명중 비록 꼴찌를 하더라도
그를 [공부를 못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면 꼴찌더라도, 대다수 사회 구성원에 비교하면
보편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결론이 주어짐직하겠군요.
적어도 용신운에서는, 용신운이 아닌 때 보다 공부를 못하는 상황이 될 확률은 아주 적다!!
적어도 용신운에서는, 용신운이 아닌 사람 보다 공부를 못하는 상황이 될 확률은 아주 적다!!
물론, 용신이 상하지 않고, 또 사주외적인 요인인 명주의 제반환경이나 의지 등은 일정하다고 보는 가정에서 입니다.
이렇게 보아, 용신운이 공부 잘 함과 전혀 별개라는 주장의 성급함과 미흡함은,
1.비교 대상의 보편성을 잃어 비교가 적절하지 않았든가,
2.용신운이라 하더라도 용신의 피상여부를 간과했든가,
3.용신운이 아닌데도 용신운으로 오인했든가,
4.일반적인 용신의 개념 자체를 달리 인식하고 있든가,
또 예외로, 사주 외적인 명주의 특별한 환경,의지를 감안하지 않았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