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굴복시키다
F-35는 미 공군, 해군, 해병대(美空軍海軍海兵隊)의 노후 전술 작전기(老後戰術作戰機)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대체(代替)하려는 JSF 계획(計劃, Joint Strike Fighter, 합동타격기)에 따라 탄생(誕生)했습니다.
그런데 성격(性格)이 다른 여러 기종(機種)을 하나로 대체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워 개발(開發)은 난항(難航)의 연속(連續)이었습니다.
흥미(興味)로운 점은 이런 시도(始睹)가 50년 전에 이미 달성(達成)했었다는 사실(事實)입니다.
미 공군, 해군, 해병대가 함께 주력 전투기(主力戰鬪機)로 사용(使用)했던 불멸(不滅)의 도깨비 F-4 팬텀 II(Phantom II)가 바로 그 주인공(主人公)입니다.
↑ JSF 사업 당시 끝까지 경쟁한 보잉 콘소시엄의 X-32
↑불멸의 도깨비 F-4 팬텀
제2차 대전 당시 활약한 F6F, F4U처럼 뛰어난 기종(機種)도 있었지만 일반적(一般的)으로 함재기(艦載機)는 동급(同級)의 공군기에 비한다면 성능(性能)이 뒤졌습니다.
좁은 항공모함(航空母艦, 이하 항모)에서 운용(運用)하기 위해 제약(制弱)이 많았기 때문인데, 종전(終戰) 후 등장한 제트기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 1953년 당국이 새로운 함대 방공용 전투기 개발(艦隊防共用戰鬪機開發)을 착수(着手)했을 때,
그루먼(Grumman)이나 보우트(Vought)는 기존(旣存) 전투기를 개량(改良)하는 수준(水尊)에서 생각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함재기는 운용상 여러 제약이 있습니다
맥도넬(McDonnell)은 기존(旣存)에 납품(納品)한 FH, F2H, F3H가 경쟁기(競爭機)보다 좋은 평가(平價)를 받지 못했기에 고민(苦悶)이 컸습니다.
성능 차이(性能差異)가 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우위(優位)를 점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번 기회(期會)를 놓치면 향후 입지(向後立志)가 불안(不安)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맥도넬 과감히 역발상을 했습니다.
작은 기체만 고집한다면 성능을 늘리기 곤란(困難)하다고 보고 역(易)으로 거대한 전투기 개발에 나섰던 것입니다.
↑1950년대 미 해군의 주력기였던 그루먼(Northrop) F-9 쿠거(Cougar)
마하 2이상의 속도(速度)를 낼 수 있고 무려 6톤 이상의 무장(武裝)이 가능(可能)한 거대(巨大)한 함재기(艦載機)를 구상(構想)했습니다.
B-17 폭격기(爆擊機)가 단거리 폭격 임무(短距離爆擊任務) 시에 적정 폭장량(適正爆裝量)이 4톤이 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考慮)한다면 한마디로 당대를 초월(超越)한 수준(水尊)이었습니다.
그런데 맥도넬의 이런 시도(始睹)가 가능하게 된 데는 충분(充分)한 이유(理由)가 있었습니다.
당시 미 해군이 슈퍼캐리어(Super Carrier) 시대(時代)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슈퍼캐리어의 시대를 개막한 CV-59 포레스탈
항모(航母)가 커졌으니 함재기도 커질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1958년 5월 27일,
시험기(試驗機)인 YF4H-1가 첫 비행(飛行)에 성공했고 1960년 2월 CV-62 인디펜던스(Independence)에서 펼쳐진 운용 시험(運用試驗)에 통과(通過)함으로써 정식(正式)으로 제식화(制式化)되었습니다.
이때 F4H 팬텀 II라는 이름이 부여(附與)되었는데 맥도넬 가문(家門)의 큰형이라 할 수 있는 FH의 이름을 승계(承繼)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명세(有名稅) 때문에 통상적(通常的)으로 팬텀은 F4H를 의미(意味)합니다.
↑시험 비행 중인 YF4H-1
그런데 기존 함재기의 2배나 되는 엄청난 크기와 둔해 보이는 겉모습으로 말미암아 팬텀에 대한 미 해군 조종사들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멋이라는 것이 워낙 주관적(主觀的)이라서 일률적(一律的)으로 단정(斷定)할 수 없지만,
미 해군 조종사들이 자신들의 애기(愛機)를 더블 어글리(Double-Ugly) 또는 라이노(Rhino)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팬텀의 외형(外形)을 그리 매력적(魅力的)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둔중한 모습의 P-47, F-4와 날렵한 모습의 P-51, F-16의 시범 비행
JSF계획에서도 X-32가 탈락한 사유 중에 너무나 흉악하게 생긴 앞모습도 한 몫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니 무기의 외형 또한 결코 무시하기는 힘든 요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기가 진정한 명품으로 남기 위한 첫째 조건으로 성능이외 그 어떤 것도 언급 될 수는 없습니다.
팬텀이 명품으로 한 획을 남기게 된 것은 당대 어느 전투기도 범접할 수 없던 무시무시한 괴력 때문이었는데 그 탄생과 명품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상당히 극적이었습니다.
↑엄청난 크기 때문에 둔중한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F4H는 기존의 전투기들이 달성(達成)한 모든 기록(記錄)을 손쉽게 갈아버리는 괴력(怪力)을 선보여 이를 한 번이라도 몰아 본 조종사들을 경악(驚愕)하게 만들었습니다.
장착(裝着)된 J79 엔진의 힘이 워낙 좋아서, 흔히 너무 기체(機體)가 크거나 반대로 엔진의 힘이 부족해 기동력(機動力)이 떨어지는 비행체(飛行體)를 의미하는 '나는 벽돌(Flying Brick)'의 속설(俗說)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차원(次元)이 달랐던 당대의 F-22였습니다.
↑F-4는 등장과 동시에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채택(採擇)을 놓고 경합(競合)한 XF8U-III를 미 해군 당국이 조기(早期)에 탈락(脫落)시켰을 때 경쟁사(競爭社) 보우트(Vought)가 아무런 이의(異意)도 제기(提起)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팬텀의 성능(性能)은 함재기로써는 물론 이거니와 미 공군이 지상기지(地上基地)를 기반(基盤)으로 사용하고 있던 당대의 그 어떤 전투기들도 흉내 내기 힘든 엄청난 수준이었습니다.
마침 팬텀이 본격 배치(本格配置)되기 시작한 때는 베트남전쟁이 격화(激化)되던 시기(時期)여서 실전 투입(實戰投入)도 곧바로 이루어졌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