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주(山晝)
산속의 한낮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창 너머엔 뭇 봉우리 번잡하고
눈보라 처량하기 지난 세월 같구나
사람 자취 없어 한낮에도 썰렁한데
매화 지니 저승 이승 전생이 다 헛것
群峰蝟集到窓中(군봉위집도창중)
風雪凄然去歲同(풍설처연거세동)
人景寥寥晝氣冷(인경요요주기냉)
梅花落處三生空(매화낙처삼생공)
설악산 백담사는 겨울이면 인적이 끊겨 한낮에도 조용하기가 밤중과 다를 게
없다. 선방(禪房:참선하는 방)의 봉창을 열고 산을 쳐다보니 군봉(群峯:많이 솟
아 있는 봉우리)이 창가로 모여드는 듯하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참으로 속
절없다. 만해(萬海)한용운이 참선 도중 잠시 감회에 젖는다. 열여덟 나이에 어
지러운 세상을 피해 처음으로 백담사에 들어왔을 때를 회상한다. ‘그때도 오늘
처럼 처량하게 눈만 내렸었지’ 어언 10여 년이 지났고, 그동안 깨달음을 얻었
고 스님이 되었다. 떨어진 매화꽃같이 덧없는 인생이요, 쌓였다가 녹는 눈처럼
속절없는 세월이다. 과거, 현재, 미래란 무엇인가? 전생과 이승, 저승은 또한
무엇인가? 헛되고 헛되도다. 인생이여.
[작가소개]
한용운 (한정옥 | 한유천) 독립운동가, 시인
<업적> :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 일제강점기 때 시집《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 등이 있다. 더보기 출처두산백과
<출생-사망> :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 - 1944년 6월 29일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 8. 29 ~ 1944. 6. 29)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더 이상 집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1896년 선생은 홀연히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선생은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