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처이니 부처님처럼 살아야 한다.
금일 대중은 아시겠습니까?
여기서 척 알아 계합(契合)하면 불조(佛祖)의 일구(一句)를 터득할 것입니다.
최초 구와 말후구(末後句)를 모조리 알면 일을 다해 마친 사람[了事人]이 되어
일상생활 속에서도 대 안심을 굴리며 대자유를 만끽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알지 못하면 두 머리에 떨어져 [落第二頭]
귀신 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未免鬼窟裏/미면귀굴리] 야호(野狐)가 될 뿐입니다.
여기서 해결 안 된다면 산승(山僧)이 다시 주각(註脚)을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圓月內有一點(원월내유일점)
太空中有一點(태공중유일점)
大地裏有一點(대지리유일점)
巨海裏有一點(거해리유일점)
달 속에 한 점이 있고
저 허공 가운데에도 한 점이 있다.
대지 속에 한 점이 있고
바닷속에도 한 점이 있다.
이 네 가지의 일점(一點)을 안다면 일생-동안 해야 할 참선 생활을 다 마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한 사람이 나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토끼와 계수나무가 살고 있으니 달 속의 한 점이요, 해와 달이 항상 교차하니 허공의 한 점이고,
땅속에 금이 있으니, 대지의 한 점이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으니, 바닷속의 한 점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은 그 ‘한 점’의 소식을 꿈에도 보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일점(一點)이라 합니까?
(주장자 한 번 치고 송 하되)
底箇一點不成壞(저개일점불성괴)이니
隨流萬境實能幽(수류만경실능유)로다.
獨露橫立任自在(독로횡립임자재)하니
四海歌謠賀太平(사해가요하태평)이로다.
이 한 점은 본래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요, 무너지는 것이 아니며,
만 경계를 따라서 흐르되 그윽함을 항상 이루어
홀로 가로로 눕기도 하고 세로로 서기도 하며 자재-함이라
만천하(四海)가 태평하니 경하(慶賀)스러운 찬탄의 노래를 끝없이 부른다.
이 산승(山僧)이 이러한 말을 하기 이전, 저 방에서 나와 일 보 일보 걸어서
여러분 앞에 앉아 있을 때 이미 다 마친 것입니다.
그래도 잘 모르시겠다면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마조 스님이 백장 스님에게 편지 한 통과 간장 3병을 전했습니다.
백장 스님은 대중을 운집시켜 놓은 후 간장 세 병을 법상에 올려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일러라. 이르면 이 병은 존재할 것이지만 이르지 못하면 내가 당장 이 병을 없애고 말 것이다.”
그 어느 대중도 이르지 못하자 설법전(說法殿)은 침묵만 가득했습니다.
그러자 백장 스님은 주장자로 간장 세 병을 모두 깨고는 방장실로 돌아갔습니다. 이게 어떤 일입니까?
이에 대한 낙처(落處)를 알면 그 사람의 살림은 백장 스님의 살림살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회상에 있었다면 간장 세 병을 모조리 집어 던지고 밖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라면 얼른 장독간에 가서 간장 한 병 담아와 법상에 올려놓고 나가겠다.”
간장 세 병을 깨고 나간 사람과 새 간장 한 병을 법상에 올려놓고 나간 사람 중에 누가 잘한 것입니까?
누가 백장 스님의 뜻에 부합한 것입니까?
(주장자 한 번 치고)
좌삼우오(左三右五)로다. 옴 소로시리 사바하. 방에 돌아가서 모두 차나 한잔 마셔라[귀당끽다/歸堂喫茶].
이것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모르면 눈 감은 봉사로서 두 머리에 떨어져(落第二頭) 시시비비에 휘말리며 살고 말 것입니다.
졸면 자고 배고플 때 밥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못 된다 이 말입니다.
아-악!
지금 전하고 있는 한마디는 제가 걸망 지고 산천 따라 선지식 찾아뵈며 묻고 공부한 저의 살림살이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살림살이를 장만해 놓으셨습니까?
제가 현풍 도성암에서 정진할 때 일입니다. 성찬 선사가 대중과 함께 담소를 나누던 중 한 문제를 던지셨습니다.
남전 회상에 머물렀던 한 행자가 입승에게 오늘 대중공양 올리겠으니,
자신을 위해 반야심경을 설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입승은 남전 스님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남전 스님은 당장 그 행자를 방으로 들라 일렀습니다.
예로부터 큰 스님들은 공양받으면 시주한 사람을 위해 반야심경 일 편을 전해주었습니다.
물질의 공양을 받았으니 정신적인 공양을 올려 주었던 겁니다.
그중에서도 일상에서 바로 해탈하라는 의미로 반야심경을 주로 일러주었습니다.
입승이 나가 보았으나 행자가 없지. 뭡니까?
이를 전해 들은 남전 스님은 절구통 방망이를 들고 바로 부엌으로 가서
대중공양을 준비하고 있는 무쇠솥을 마구 쳤습니다. 마침내 솥 밑에 구멍이 크게 뚫리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방장실로 돌아갔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성찬 스님이 한 조실 스님에게 이것을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남전 스님의 솥 구멍 사건을 일러주십시오.”
“천편만편(千片萬片)이로다.”
성찬 스님은 절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님, 오늘 이 일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몰랐습니다.”
성찬 스님이 던진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일대사 사건에 대해 일러보라 이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대중들이 아무도 말하지 못하자 당시 입승이던 나에게 대답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하기를
“솥 밑구멍이 모조리 깨져서 빠져버렸으니, 반야경을 잘 설해 마쳤습니다.[通底脫善說般若/통저탈선설반야]”
성찬 스님이 곧바로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 의지가 어떤가?”
“과연 과연”이라고 답하니 성찬 스님은 말없이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오후에 성찬 스님이 나와서 말씀하시기를
“금년(今年) 여름에는 입승 스님이 밥값을 잘해주셔서 금년(今年) 여름은 잘 지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후로 성찬 스님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는데 저의 학림사에도 많이 찾아주셨습니다.
여러분, 농사짓는 데에도 농기구가 필요하듯 수행하는 데도 좋은 수행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참선이든 기도든 염불이든 크게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알고 행해야 뜻하는 바를 이루지, 잘못 알면 그만큼 늦고 맙니다.
저는 결제 기간 중 반 철쯤 되면 꼭 재가불자들을 점검(點檢)합니다.
어느 날 한 보살이 찾아오셨습니다.
화두는 누구한테 무슨 화두를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먹꼬’를 받았다고 해요.
그래 발음이 좀 이상해 보여서 “먹꼬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분 답변이 기가 찹니다.
“큰스님이 처음 화두를 주실 때 ‘먹꼬’라 하셨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먹으라는 말씀인 듯싶어 뭘 먹을까, 밥을 먹나, 무슨 반찬을 먹나,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세상에 ‘뭐꼬’를 ‘먹꼬’로 알고 10년을 들었다 합니다.
그래 제가 “그 스님 열반하셨는데 누구한테 점검받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래서 오늘 큰 스님 찾아뵈었습니다.” 해요. 그래 제가 일러주었습니다.
“뭘 먹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먹꼬’가 아니라 ‘이 뭣 고’입니다.
태중에 있었을 때의 모습, 태어난 직후의 모습, 소녀 때의 모습, 지금의 모습,
앞으로 7‧80 되었을 때의 모습 중 어느 모습이 진짜 보살님의 참모습이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한참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몸뚱이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조금 이해가 가지만 의심되는 게 있습니다.
화두를 주신 스님은 큰스님인데 저에게 거짓말했을 리 없습니다.
대원 스님은 그 스님보다 더 작은 스님인 걸로 아는데…”
사람을 이해시킨다는 게 이렇게 어렵습니다. 장장 2시간 동안을 얘기했습니다. 그래 제가 말했습니다.
“만약 불신한다면 영원히 어렵다. 저녁에 생각해 보라.”
그 보살님 다음 날 와서 “대원 스님 말씀이 맞다.”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물어본 후에야 제 말씀이 맞다.라고 인정한 겁니다.
참선하시는 분들은 일상에서도 화두를 놓지 마십시오.
간절히 들다 보면 자신이 화두를 들겠다는 의식을 하지 않아도 화두가 들리는 때가 분명 오고야 맙니다.
그때는 두 시간, 세 시간도 금방 갑니다. 여러분도 화두 삼매를 경험할 수 있는 근기를 갖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불자가 되십시오. 부처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아니 부처님이 되십시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한자리에서 만난 순간 부처가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부처이니 부처님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 대원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