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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례야 시구야 (是禮也 是丘也)
필자는 요즘 인라인 스케이트(inline skates)의 바른 자세를 익히는데 재미를 붙여 정신이 빠져 있다. 마침 공인된 훌륭한 선수를 알게 되어 정식 레슨(lesson)은 힘이 들어 참가를 못하고 부분적인 지도를 받는다. 인라인 운동을 한지 10년이 되면서 “그냥 조깅(jogging)으로 다리운동 삼아 가볍게 하지” 하면서도 또 샘과 호기심이 발동하여 욕심을 내게 된다.
생각하면 인생이란 일생을 통한 배움의 연속에서 생을 마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움은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수단일지도 모른다.
가르치고 키우는 것을 교육(敎育)이라 한다면, 배운 것을 익히고 복습하는 것은 학습(學習)이다.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서, 출세와 명예를 위해서, 또 남을 지배하기 위해서도 자기의 삶의 정서를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학습(學習)은 당연한 것이다.
훌륭한 선생이나, 좋은 친구, 좋은 책, 또는 건전한 신앙, 가정교육, 역사적인 인물을 통해서 인간으로서의 소양(素養)을 갖추기 위한 배움이 계속되는 것이다.
배움을 얻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공자는 배우고 익히는 것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삼았고
맹자는 천하의 영재(英材)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을 군자삼락(君子三樂)으로 삼았다.
가르침과 배움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할까?
학창시절 필자에게 서예를 가르치던 도연 스승님은 “남을 가르치려면 열배는 더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가르치는 교(敎) 보다는 배우는 습(習)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다.
“교(敎)”가 학(學)보다 더 어렵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과시(誇示)할려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실력 수준은 감안(勘案) 안하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공자 앞에 문자 쓴다” 라는 말로 공자의 유식(有識)함을 대명사로 인용한다. 그것은 공자가 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유교를 통한 그의 사상이 조선왕조에 도입되어 성리학(性理學)으로 변화되어 조선조 500년 동안 우리문화에 깊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공자의 이름과 함께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논어(論語)를 읽어보면 전편(全篇)에 흐르는 분위기는 공자는 “가르치기보다 배우는 즐거움”을 강조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논어(論語)의 첫 장을 열면 학이(學而) 제일(第一)편에
子曰(자왈)-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배워 때에 맞추어 익히니
不亦說乎?(불역열호?)-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고 하였다.
고전(古典)이나 어느 책이던지 첫 장의 글이 제일 중요하고 첫 장의 언급(言及)이 책 전체를 대변(對辯)한다고 할 수 있다.
☆논어(論語)의 계씨편(季氏篇)에 다음과 같이 공자가 말한 구절이 있다.
生而知之(생이지지)-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은 최상(最上)이며
學而知之(학이지지)-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며,
困而學知(곤이학지)-꽉 막혀서도 애써 배우려는 사람은 또 그 다음이지만
困而不學(곤이불학)-꽉 막히면서 배우지 않는 사람은 최하(最下)이다.
라고 말하였다.
☆논어(論語)의 학이(學而) 제십일(第十一)편에
子曰(자왈)-공자께서 말씀 하시기를
弟子入則孝(제자입칙효)-제자는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出則悌(출칙제)-밖에 나가서는 공손하며
謹而信(근이신)-신중하고 미더워야 하며
凡愛衆(범애중)-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而親仁(이친인)-어진 이를 친하게 하고
行有餘力則而學文(행유여력칙이학문)-그렇게 행하고도 그 여력이 있다면 글을 배울 것이다
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子曰(자왈)-공자께 말씀하시기를
三人行(삼인행)-세 사람이 길을 가는데
必有我師焉(필유아사언)-반드시 그 중에 내 스승이 있다.
擇其善者而從之(택기선자이종지)-선(善)한 사람에게는 선하게 되기를 배우고,
其不善者而改之(기불선자이개지)-선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저래선 안 되겠다”는 것을 배운다.
☆논어(論語) 학이(學而) 십육(十六)편에
子曰(자왈)-공자께 말씀하시기를
不患人之不己知(불환인지부기지)-남들이 나를 몰라준다고 걱정할게 아니라
患不知人也(환부지인야)-내가 남을 모르는 것을 걱정하라
고 배우지 못해 남을 알지 못한 자기의 부족함을 염려하라는 것이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십칠(十七)편에
子曰(자왈)-공자께 말씀하시기를
由, 誨女知之乎!(유, 회여지지호!)-자로야 네게 안다는 것에 대하여 가쳐 주마!
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是知也(시지야)-이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공자가 성인(聖人)으로 추앙(推仰)받는 것은 출생 신분에 비하여 마치 진흙탕 속에 핀 연꽃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공자에게는 그를 가르친 선생이 없었다.
속된 표현으로 공자는 출신 환경에 비하여 “참 바르게 자란” 사람이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 노(魯)나라의 하급무사였다.
숙량흘에게는 딸 아홉과 몸이 성치 못한 아들이 한명 있었는데, 대를 이을 자식으로는 이 불구의 아들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숙량흘은 70이 가까운 나이에 무려 50년 차이가 나는 16세의 안징재(安徵在)라는 무녀(巫女)와 변칙적으로 관계하여 공자를 낳게 되었다.
이렇게 들에서 일하는 처녀를 적당히 취한 것을 야합(野合)이라 한다.
정치인들이 흔히 “야합(野合)”이라 쓰는 용어는 좋지 못한 목적(目的) 밑에 서로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예(禮)의 달인(達人)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어머니가 무당(巫堂)이었기 때문이다.
옛날의 무당은 지금의 돈이나 버는 무당이 아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나 천기(天氣)를 보는 역할을 하였고 오늘날 모든 예법(禮法)의 근원은 무당에서 나온 것이다.
공자가 자라면서 본 것이 어머니가 무당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무속(巫俗)은 곧 예(禮)로 발전 한 것이다.
공자(孔子)는 어려서부터 예교(禮敎)에 대한 관심이 컸었으며, 놀 때에도 주로 제례(祭禮)놀이를 했다고 한다.
공자가 배움과 예(禮)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논어(論語)에 등장한다.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이 없었지만 공자 일생의 가치를 좌우하는 인물이 주(周)나라 주공(周公)이다.
주공(周公)이란 인물은 아래와 같은 사람이다
중국 고대 국가인 은(殷)나라에 폭군 주왕(紂王)이 있었는데 희창(姬昌)이라는 사람이 폭군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나라를 세운다.
이 사람이 곧은 낚시로 유명한 강태공(姜太公)을 신하로 둔 문왕(文王) 이다. 문왕의 장자(長子)가 왕을 이어 받으면서 국호를 주(周)나라로 정하니 곧 무왕(武王)이다. 무왕(武王)이 아들 성왕(成王)의 나이 겨우 13세 때에 죽는다.
이때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어린 족하 성왕(成王)을 도와 왕실의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
우리나라 조선조에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이 12세 된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공자(孔子)가 성인(聖人)으로 받든 요(堯), 순(舜), 우(禹), 주문왕(周文王), 주무왕(周武王), 주공(周公) 가운데 가장 숭배하고 그리워한 사람은 주공(周公)이다, 공자의 꿈은 주공(周公)이 이룩하였던 사회를 다시 실현시키고자 하신 분으로, 너무나 주공(周公)을 그리워한 나머지 꿈에서나마 만나길 바랜 사람으로 인륜(人倫)을 소중이 한 주공(周公)을 인생의 이상형으로 숭배(崇拜)하였다.
공자의 인(仁)의 사상도 주공(周公)에 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곡부(曲阜)는 공자가 태어난 고향으로 유교의 총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주공(周公)을 모신 사당(祠堂)인 태묘(大廟)가 웅장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다.
☆논어(論語) 팔일(八佾) 제삼(第三)편에
子入大廟 每事問(자입대묘 매사문)-공자께서 태묘에 들어가 제사를 진행됨에 매사를 물으시었다.
或曰(혹왈)-혹자가 옆에서 말하기를
孰謂鄹人之子知禮乎?(숙위추인지자지례호?)-그 누가 저 추인(鄹人)의 자식을 일러 예(禮)를 안다고 하는가?
入大廟 每事問(입대묘 매사문)-태묘에 들어와 매사를 물으니 말이야,
子聞之(자문지)-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曰(왈)-말씀 하셨다
“是禮也”(“시례야”)-“이것이 곧 예니라”
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공자가 대사구(大司寇-지금의 법무부장관)벼슬을 할 때 이곳에서 태묘에 제사를 지내는데 태묘에 제사를 지낼 때는 모든 예법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므로 당시 최고의 예법(禮法)을 아는 대사구 공자를 집전자(執典者)로 초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禮)에 밝다는 공자가 태묘에 들어와 제사를 지내는 동안 매사를 옆에 사람에게 일일이 물어서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참석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누가 저 추인(鄹人)의 자식을 예(禮)에 밝다고 초빙을 하였는가?”
“아무것도 몰라서 일일이 물어서 진행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비아냥 그렸다.
그때 이말을 들은 공자가 대답하기를 예(禮)라는 것은 고정불변(固定不變)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의 예법과 이곳 곡부의 예법이 다른데 내방식대로 예를 행하면 이곳의 예와 다르기 때문에 결례(缺禮)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곳의 예를 바르게 행하기 위하여 묻는 것이다.
시례야 시구야(是禮也 是丘也)-“이것이 곧 나의 예(禮)요, 이것이 곧 나 공자다.”
라고 하였다.
“로마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다
땅이 좁은 우리나라에도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경기도 충청도 서울 등의 제사 지내는 양식이 조금씩 다르다. 하물며 중국같이 넓은 지역은 풍습과 예법이 지방에 따라 많이 다르다.
공자는 그 지방에 맞는 예(禮)를 행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하고 그 지방의 예는 그곳 사람이 잘 알기 때문에 “묻고 배워서 바르게 하는 것이 곧 나의 예(禮)” 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공자는 모르는 것은 배워서 바르게 하는 것이 예(禮)를 아는 행동이며 대인(大人)의 도리(道理)라 하였다.
여기서 추인지자(鄹人之子)라는 말은 “추(鄹)에 사는 새끼”라는 욕의 뜻으로 매우 심한 경멸(輕蔑)을 함축한 표현이다. 추(鄹)란 곳은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공무원 시절에 지방관(地方官)으로 근무하는 곳으로 추인(鄹人)이란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추(鄹)라는 곳은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鄹邑)을 말하는데 이곳은 편벽(偏僻-떨어져 소외된 곳)한 곳으로 술 먹고 시비 걸고 골치 아프고 협잡꾼 같은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추인(鄹人)이라 이르는 말 자체가 경멸하고 비꼬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마치 프랑스의 가스코뉴 출신이나, 시실리안, 경상도내기, 전라도내기, 등의 경멸적 톤(tone)이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배움이란 물음이요 탐구(探究)요 독서(讀書)다.
똑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신문이나 삼류소설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우리는 그것을 독서(讀書)라 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훌륭한 배움의 대상을 얻을 수 없으면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배움이란 평생의 과업(課業)이기 때문에 죽어서도 학생부군(學生府君)이라 칭하니 실로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또한 배우는 자세는 남에게 보이기보다는 자신을 갈고 닦는, 스스로의 인간됨을 바르게 하는 학문이 되어야 함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爲己之學).
-농월-

첫댓글 항상 많이 배웁1니다.
세월 먹으면서 겸손해야지, 참아야지 하지만 잘 되지 않은게 평범한 우리 인간 인생사인가 봅니다.
퍼~어 갑니다. 계속 2~3번 읽으면서 저꺼로 맹글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