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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6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마르코 2,23-28
부부임을 자주 잊을 때 더 부부가 된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먹는 제자들을 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두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법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발걸음 숫자가 정해져 있고 엘리베이터 층수도 누를 수 없으며 에어컨이 꺼져도 다시 켤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집중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집중할수록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법에 집중할수록 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결혼에 집중할수록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집니다.
경계에 집중할수록 차는 경계선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만약 물고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고양이가 무서워 어항 유리가 튼튼한지만 집중하고 있다면
그 안에서 다른 물고기나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법은 이 어항과 같습니다.
그냥 그 안에 머물면 되지 그것에 신경 쓰면 정작 법을 주신 분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왓챠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줄거리입니다. 창욱은 40대입니다.
그는 번역가와 인문학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출판사 사장이고 남편은 아내의 글솜씨가
맘에 안 들고 남편은 아내가 가정에 소홀한 것 같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둘은 얼마간의 별거를 하게 되었고 남자가 아내 없이 사는 것이 너무 편했는지 먼저 이혼장을 들고 왔습니다. 아내도 도장을 찍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말기 대장암 판정을 받습니다. 소화기 문제로 먹는 것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녀는 창욱에게 매일 요리를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창욱은 라면밖에 할 줄 모릅니다.
창욱은 의리 때문인지 당분간 아내를 위해 요리를 배워가며 하기로 합니다.
창욱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요리해보지 않았지만, 오직 아내의 소중한 한 끼를 위해 좋은 식재료와 건강한 레시피를 개발하는 데 온 힘을 쓰며, 서투르지만 조금씩 가족의 소중한 의미를 깨달아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내는 죽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편과 아들을 바라보며 슬프지만, 괜찮게 죽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부임을 잊고 사랑에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부라면 여자가 음식을 하고 남자가 돈을 버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소 삶은 이 반대였습니다.
남편이 가정일을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바깥일에만 열중하는 아내에게 불만을 품었었습니다.
아내도 자신보다 돈을 못 버는 남편에게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부부는 이래야 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부부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선일 뿐입니다. 차의 양쪽 차선에 집중하면 차가 뒤뚱거리다 결국엔 차선을 넘습니다.
운전을 잘하려면 차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중앙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차선을 넘는 일이 없습니다.
부부가 되었다면 더는 부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만 생각하면 됩니다.
상대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까만을.
결혼은 왜 하는 것일까요? 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어떨까요?
사람은 결혼이란 틀에 맞추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모든 것은 사랑을 지향합니다.
이 지향을 잊으면 안식일 법을 위해 사람이 희생하다 결국엔 지쳐 그것마저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율법은 금붕어에게는 어항과 같고 운전자에게는 차선과 같습니다.
그 안에 들어와 있다면 그것을 만들어준 이유, 곧 사랑만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그러면 선을 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6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2,23-28
우리가 자주 빠져들게 되는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확대해석, 침소봉대, 과잉 일반화입니다.
한 가지 기억이 떠오릅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한 강의 시간인데, 제일 앞에 앉아 계신 분이 강의 시간 내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만지작만지작하고 계셨습니다.
시종일관 그러시니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강의 시간에 도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검색하십니까?
게임 하고 계십니까?
그랬더니, 그분께서 화들짝 놀라면서, 하시는 말씀! “ 그게 아니라 스마트폰 메모장에 강의 내용 열심히 적고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깨갱 하며 그랬습니다.
“아! 네 알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계속 적으세요.”
또 다른 제 착각이랄까, 과잉 일반화 증세가 떠오릅니다.
특강을 끝내고 나오는데, 한 자매님이 유튜브 강의 잘 활용하고 있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어깨가 우쭐해졌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자매님은 잠 안올 때면 즉시 제 유튜브 강의를 트신답니다.
잠 오기 적절한 목소리라 불면증 치료제로 최고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적당히 알이 맺히기 시작한 밀밭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격무에 무척이나 굶주렸던 제자들은, 그것으로라도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밀이삭을 좀 뜯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던 바리사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큰소리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코 복음 2장 24절)
바리사이들 역시 저처럼 확대해석 내지는 침소봉대를 한 것입니다.
이미 꼬일대로 꼬인 바리사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어제에 못지않은 강펀치 하나를 시원하게 날리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코 복음 2장 27~28절)
안식일과 관련된 세부적이고 지엽적인 규정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안식일 제정의
근본 취지를 망각해버린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이 참으로 뜨끔합니다.
안식일은 원래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창조물, 심지어 무생물에게까지 휴식과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의도로 생겨났습니다.
주인도 쉬지만, 종도 쉬게 합니다. 사람도 쉬지만, 가축도 쉬게 합니다.
농부도 쉬지만 경작지도 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인 백성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생명과 자유를 경축하는 날인 안식일을 속박의 날, 억압의 날로 변질시켜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절대 원치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위해서라면서 안식일과 관련된 수많은 규칙과 관습들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노동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곡식을 추수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따진 것은 제자들이 밀 이삭 몇개를 건드린 것인데,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해석 및 과잉 일반화를 시켜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인간에 대한 소홀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동료 인간 존재의 가치를 무시했습니다.
신앙 행위 안에서 하느님 사랑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모상인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 안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 인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의 적극적인 준수보다도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 강조하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마르 2,23-2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마르 2,23-26)”
마태오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2,1).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은 보지 않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고픔을 먼저 보라는 뜻으로 다윗이 배가 고파서 율법을 어긴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 일은 사무엘 상권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다윗이 율법을 어긴 일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다윗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배고픈 사정은 똑같은데, 바리사이들은 왜 다윗이 한 일은 비난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일은 비난했을까?
다윗은 율법을 어겨도 되고 일반 서민들은 어기면 안 되는가?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다윗을 비난하지 않았다면 서민들에 대해서도 비난하면 안 됩니다.
(서민들을 비난하려면 다윗이 율법을 어긴 일을 먼저 비난해야 합니다.)
2)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명기에 있는 십계명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2-15).”
십계명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안식일은 모든 사람이 함께 쉬는 날”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을 쉬게 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일에 어떤 사장이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일을 멈추고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자기 공장의 노동자들에게는 주일에도 일을 하라고 시켰다면,
그래서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일하느라고 주일을 지키지 못했다면, 주일을 안 지킨 사람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사장입니다.
먹고사는 데에 지장이 없는 사람이 주일에 일하지 않고 쉬는 것은 당연한데, 주일에도 일하지 않으면 굶주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면 안 됩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주일에도 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와 사회가 모두 나서서 그 사람이 쉴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느님의 계명은 “안식일에는 굶어라.”가 결코 아닙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을 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주님이 너희에게 안식일을 주었다. 그래서 엿샛날에는 너희에게 이틀 치 양식을 준다.
그러니 이렛날에는 저마다 제자리에 머무르고,
아무도 자기가 있는 곳을 떠나 밖으로 나가지 마라(탈출 16,29).”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아도 굶는 일이 없도록 미리 배려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배려’와 ‘사랑’이 안식일 율법의 근본정신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사랑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안식일이든지 다른 날이든지 간에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람은,
또 굶주리는 사람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사랑 실천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마라.” 라는 규정 자체를 폐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비난하지 마라.”이지 “각자 알아서 마음대로 행동하여라.”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을 함부로 비난해도 안 되고,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지나치게 너그러워도 안 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3-5).”
(주일에도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에 대한 판단 기준은 각자의 양심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자신의 양심이 항상 예리하게 살아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신 것은,
사람들을 쉬게 해 주기 위해서”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서 하루를 빼앗기 위해서 안식일을 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루의 안식을 온전히 사람들에게 주려고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께 ‘하루’ 라는 시간을 봉헌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하루’ 라는 시간을 온전히 얻는 일이기도 합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로 못 지킨 것인지, 아니면 안 지킨 것인지......
반대로 주일을 잘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몸만 지키고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잘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입니다.
‘사랑’이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