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750) - 새해 벽두에 살핀 자연과 문화
2020년 새해가 시작한 지 10여일, 국내외 정세는 하루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동한다. 수천 년 불씨를 안은 중동의 정세가 긴박하고 종잡을 수 없는 북녘의 속내가 불안을 가중시킨다. 눈을 구경하기 힘든 따뜻한 겨울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몇 달째 이어지는 거대한 산불로 수많은 생명체가 사라지는 호주의 재난도 예사롭지 않다. 1월 12일 밤,필리핀에서는 탈 화산이 폭발하여 수만 명이 대피중이고 이곳을 오가는 항공편이 결항이다.
화산재 뿜어내는 필리핀 탈 화산 (마닐라 EPA=연합뉴스)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65㎞가량 떨어진 섬에서 12일 탈 화산이 폭발, 화산재가 타가이타이 지역을 뒤덮고 있다.
게다가 며칠 전 이란에서 발생한 우크라이나 민간항공기 격추(탑승자 167명 전원 사망)가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특히 1983년 사할린 상공에서 옛 소련의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한국인 81명을 포함한 269명 사망)의 악몽을 경험한 우리에게 이번 사건은 남의 일 같지 않다. 북한의 잦은 미사일 발사 도발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위험요인이기도 하다. 어느 때인들 어려움이 없었던가, 중지를 모아 난국을 해쳐가는 슬기와 역량을 발휘하자.
아침에 읽은 칼럼 한 토막, ‘살아 있으려는 힘이야말로 그 어떤 힘보다도 강하다. 수많은 생명의 기적, 생태계의 풍요로움이 여기서 생겨난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주저앉는 순간 위기가 찾아온다. 그러니 일어나 걸어야 한다. 살아있다는 건 지금 나를 누르는 이 상황을 떨치고 일어나 걷는 것이다. 삶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서광언의 ‘세렝게티의 생존법칙’ 중에서, 동아일보 2020.1. 13)
주변은 어수선하여도 새해 첫날 서울 둘레길 걷기를 시작으로 지난 주말에는 고양누리길 걷기와 경춘 푸른 숲길 걷기, 광화문 역사박물관 탐사 등으로 분주하였다. 최근 며칠의 행보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1. 자연을 살피고 역사를 일깬 고양누리길 걷기
지난 금요일(1월 10일), 한국체육진흥회 멤버들과 고양누리길 걷기에 나섰다. 서울 인접의 고양시에 14개의 누리길이 있다는 것을 새로 알았다. 이날 걸은 길은 그중 1코스와 2코스, 베테랑들도 처음으로 도전하는 길이란다. 오전 9시, 구파발역에 7명의 동호인들이 모였다. 곧장 버스에 올라 북한산자락에 있는 서울고개 예비군훈련장 쪽으로 향하였다. 20여분 후 내린 곳은 북한산 둘레길과 겹치는 사기막길 입구 부근이다. 이곳이 고양누리길 1코스 출발점, 북한산둘레길 안내표지 따라 밤골공원 쉼터 지나 효자비와 내시묘역 거쳐 북한산 입구에 이르는 약 7km 구간을 오르내리며 걷는 산길이 아기자기하다. 평일인데도 삼삼오오 트레킹에 나선 마니아들의 발걸음이 줄을 잇고.
북한산 둘레길 걸으며
식당가와 등산용품 가게들이 즐비한 북한산 입구를 빠져나와 큰 길 건너니 사곡교에서 여석정 거쳐 삼송역에 이르는 고양누리길 2코스가 시작된다. 때마침 점심시간, 부근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들고 오후 1시에 삼송역 가는 길 안내 표지 따라 산길로 접어든다. 가랑잎들이 수북하게 쌓인 오솔길의 옥녀봉 능선을 넘으니 멀리 북녘으로 이어지는 산야가 시야에 잡힌다. 4km쯤 걸어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큰 길 지나서 다시 삼송역으로 이어지는 낮은 산길로 접어든다. 중턱에 이르니 북한산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여석정 쉼터, 숫돌고개라 불리는 곳이다.
여석정에서 산길 따라 걷다가 내리막길의 급경사 계단을 지나 큰 길 건너자 삼송역이 지척이다. 사곡교에서 삼송역까지 약 6.5km, 이른 시간은 오후 3시다. 삼송역 지하도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길에서 역사를 만나다 의주로’에서 살핀 글에 필이 꽂힌다. ‘조선시대 대로 중 의주대로를 기반으로 조성된 역사문화탐방로(도보길) 의주대로는 한양 돈의문을 출발하여 중국 연경(북경)까지 연결된 한반도와 세계를 연결했던 문명의 길’이라 새긴 문구가 뜻깊다. 북한산의 웅자를 발판 삼아 세계로 뻗어가는 문명의 길이 활짝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라서. 서울 행 지하철에 오르며 담은 염원, 문명의 대로여! 하루 속히 열려라.
2. 역사박물관에서 살핀 한국 영화 100년
지난 토요일(1월 11일)오전, 미세먼지가 심하다는 날 아내와 함께 광화문에 들렀다. 종로구청 지나 지하도에 접어드니 미세먼지의 심각성을 알리는 홍보 판이 눈길을 끈다. 그중 하나, 서울 하늘이 옛날 하늘과 달라 한양도성 내 5등급 차량의 진입을 금하노라. (마스크로 입을 가린 세종대왕상이 배경이다.)
지하도를 빠져나와 미국대사관 쪽으로 향하니 경찰의 경계가 삼엄하고 시위를 준비하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하다. 목적지는 대사관 옆의 대한민국역사문화박물관, 때마침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고 일주일 전에 미국에서 골드글로브 최고 외국영화상을 수상하는 경사가 겹친 때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전이 열려 더 뜻깊다.
전시의 주제는 ‘1950년대 한국영화 새로운 시대를 열다’, 팸플릿에 적힌 전시회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2019년은 최초의 한국영화로 평가되는 연쇄극 “의리의 구토”가 제작된 지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한국영화의 성장기라 불리는 1950년대 중후반의 한국영화 관련 소장자료 특별전을 마련하였다. 1950년대 중후반은 광복 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한국영화가 양적‧질적으로 급성장한 시기로서 영화사적 의미가 크다. 한국영화 최초의 국제영화제 수상작이 나오고 한국의 할리우드라 불린 충무로가 형성되었다. 당시 한국영화가 급성장한 배경에는 영화를 능가할 만한 대중적인 오락이 전무했다는 점, 무엇보다 광복과 전쟁을 거치며 천지개벽이라 할 만큼 격변하는 당시의 사회상을 영화가 생생히 투영해 냄으로써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던 것이 영화산업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영화를 처음 접한 때가 소년시절의 1950년대, 당시 가수들에 비하여 배우들의 인기가 엄청났던 것이 특이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전시장의 설명에서 알게 된 것, 우리나라 최초의 키스신이 나온 것이 1950년대의 “운명의 손”이라는 영화였다네. 100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영화여, 세계 속에 우뚝 서라. (1층의 한국영화 전시실을 둘러 본 후 2,3층에서 상설 전시중인 대한민국의 발자취를 살폈다.)
3. 경춘 숲길에서 새긴 자연과 역사
지난 일요일(1월 12일), 한국체육진흥회의 일요걷기 동호인들과 함께 화랑대에서 사릉에 이르는 경춘 숲길을 걸었다. 오전 10시에 지하철 화랑대역에 집결, 곧바로 폐선 된 경춘 철길로 접어든다. 참석자는 50여명, 옛 화랑대역 광장에서 몸을 풀고 보무도 당당히 행진에 나섰다. 화랑대는 육군사관학교의 상징, 곧바로 육사 정문을 지난다. 수많은 호국간성을 길러낸 요람, 그 기상 온 땅에 퍼지라.
화랑대역 광장을 출발하는 걷기 회원들
철로 양편으로 잘 다듬어진 푸른 숲길 지나서 평평한 도로 따라 별내역에 이르니 11시가 훌쩍 넘는다. 별내역 근처의 쉼터에서 간식을 들며 휴식, 남양주에 거주하는 이장수 회원이 정성으로 준비한 묵 요리가 일품이다. 음료와 과일 등 맛있는 간식을 챙겨온 여러분께 감사.
별내역에서 경춘선 옆길 따라 퇴계원에게 도착하니 12시가 지난다. 예전에는 야산이나 들판이던 곳에 아파트들이 즐비하고 대형마트도 들어섰다. 퇴계원 중심부 벗어나 왕숙천 건너 한우도축단지의 음식점에 이르니 오후 1시, 각기 취향대로 소고기와 돼지고기 등을 떠서 굽는 석쇠요리가 입맛을 돋운다. 별도로 지참한 명주들로 입가심을 하기도.
2시에 오후 걷기에 나섰다. 경춘 자전거도로 따라 사릉역에 이르니 오후 3시, 역 청사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목적지인 사릉까지 내쳐 걷는다. 한적한 도로 지나 사릉에 이르니 근처에 사는 최효경 이사가 입구에서 일행을 맞는다. 도착시간은 오후 4시 40분, 전날의 미세먼지는 사라졌는지 맑은 공기와 온화한 날씨 속에 16km를 걸었다.
소나무 숲이 울창한 사릉 입구
회원들은 1년 전에도 걸었다는 코스가 내게는 초행이다. 사릉이 누구의 묘역인지도 모르고 당도하니 비운의 단종비 정순왕후의 묘지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묘역주변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아름답고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묘소가 밝은 햇살아래 눈부시다. 살아서는 비운이다가 죽어서 평화를 누리는가. 십여 년 전 영월의 청령포에 있는 단종 유배지를 찾았을 때 강 가운데 고립된 작은 섬의 소나무 숲에 있는 수령 600년의 천연기념물 관음송(觀音松)에 눈길이 갔다. 단종은 처절한 비애, 그리움, 외로움을 처소 옆에 있는 소나무에 걸터앉아 달래었다는 사연이 마음 아팠다. 두 사람을 지키는 소나무는 여전히 울창한데 혼백들은 지금껏 떨어져 지내누나.
화랑대를 출발하면서 접한 경춘 숲길이 인상적이었는데 막바지의 사릉 풍광이 수려하다. 걷기를 마친 후 선상규 회장에게 피력한 소감, ‘출발도 좋았지만 끝이 더 아름다워 뿌듯하다. 새해 벽두 회원들과 좋은 길 함께 걸어 기쁘다.’ 우리 모두의 길도 이처럼 아름답기를 빌며 귀로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