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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모교인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청강생으로 의학을 공부한 후 1913년에 적도 아프리카(지금의 가봉공화국)로 떠났습니다. 슈바이쳐의 재능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철학을 공부했으며 어려서부터 천부적 재능을 발휘했던 파이프오르간의 연주자였습니다. 또한 그 당시 과도한 풍압(風壓)으로 오르간의 음색이 손상되는 것을 지적하면서 근대 오르간의 간소화를 위해 공헌한 바도 있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음악의 대가인 바하에 심취하여 그를 연구한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슈바이쳐는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삶 중에서 3가지를 포기했습니다. 첫째는 심취했던 바하의 음악을 포기했고, 두 번째는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대학교수직을 포기했었고, 세 번째는 풍요롭고 안락한 자신의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한 후 적도 아프리카의 오고웨 강변 랑바레네에 병원을 설립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들을 위해 병을 고쳐주고 영적인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슈바이쳐의 희생과 사랑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큰 것으로 갚아주셨습니다.
슈바이쳐는 그토록 심취했던 바하의 음악을 포기했었지만 바하 협회는 모든 회원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연주회를 아프리카에서 열어주었고 대형 오르간을 선물했습니다. 또한 존경과 명예가 뒤따르는 교수직을 포기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평생 동안 강의할 만한 강의 시간을 단 일년 동안에 모두 허락하셨습니다.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그에게 대학마다 앞 다투어 초청해서 그의 강의를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었지만 그가 저술한 자서전을 비롯한 많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자신의 선택한 삶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서 그 마음에 충만한 기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에 관심을 두지만 주님께서는 얼마나 많이 비워졌는지에 관심을 두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깨끗한 빈 그릇이 되어질 때 주님은 우릴 통해 주님의 일들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인생의 우선순위
미국의 유명한 경영대학원에서 한 교수가 시간 쓰는 법에 대해 강의를 했습니다.
그는 항아리 하나를 탁자에 올려놓고 주먹만한 큰 돌들을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 위까지 돌이 차자 그가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네”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항아리를 흔들어가며 큰 돌들 사이로 자갈을 채웠습니다. “이제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이 이번에는 “아니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다시 테이블 아래 있던 모래주머니를 꺼내 모래를 항아리에 부어 큰 돌과 자갈 사이의 빈틈을 가득 채운 후 물었습니다. “이제는 가득 찼지요?” “글쎄요”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전자를 들어 물을 항아리에 가득 부었습니다. 물을 다 부은 교수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보여준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학생 중 하나가 자신 있다는 듯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스케줄이 꽉 차고 바빠도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언제든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면 그 사이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닙니다.” 교수의 대답에 모두들 의아스러워 하는 눈치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큰 돌을 먼저 집어넣지 않으면 영원히 큰 돌은 집어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의 큰 돌, 즉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우선적으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항아리에 집어넣으십시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인 마리아처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먼저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유혹은 쉬지 않는다
어떤 거미가 낡은 집에 아름다운 거미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거미는 거미줄을 깨끗하고 밝게 유지했는데, 파리들이 윙윙거리다 걸리곤 했습니다. 거미는 언제나 이 ‘단골고객’이 걸리자마자 깨끗이 치우고는 다른 파리들이 의심을 품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꽤 지적인 파리가 깨끗한 거미줄 근처를 윙윙거렸습니다. 그 때 거미가 소리쳤습니다. “이리와 앉아 봐요” 그러자 파리는 “괜찮아요. 나는 당신 집에 있는 다른 파리들을 보지 못했어요. 나는 혼자는 가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파리는 곧 갈색의 종이 테잎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많은 파리들을 보았습니다. 내심 기뻐하며 많은 파리가 있는 것을 보니 저기는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래서 그들과 함께 하려고 종이 테잎 위에 막 앉으려는 순간 지나가던 벌이 이를 보고 말했습니다. “거기에 앉지 마. 이 바보야! 그건 너를 잡는 덫이란 말이야.” 그러자 꽤 지적인 파리는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겁주지 말아요. 저 파리들은 춤을 추고 있어요. 저기에 있는 수많은 파리가 보이지 않나요. 모두가 춤을 추고 있잖아요. 저렇게 많은 파리가 틀렸다고는 생각 안해요.”
하나의 유혹을 피했다고 해서 다른 유혹이 피해 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다수와 함께 한다는 것이 반드시 안전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구주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