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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이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40길 46 (용산동5가 2-65) 국군 중앙 주교좌 성당
박해 시대 순교 성인들의 시신이 암매장 되어 잠시 머물다 간 곳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명의 성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 등과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성지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성 최형
그리고 홍봉주 등이 암매장되어 잠시 머물다 간 곳이다.
현재 국군 중앙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예부터 와고개[瓦署峴]라 불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여기를 와서(瓦署), 즉 나라에서 쓰는 기와를 만드는 곳이라 하였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중림동 성당, 명동 성당 건물에 쓰인 붉은 벽돌도 여기서 구운 것이다.
이 와고개 기슭은 근처 새남터 형장에서 사형 당한 외국 성직자들과 서소문 형장에서 죽은 천주교 교인들이 한때 묻혀 있던 곳이기도 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세 명의 성인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와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가 묻혀 있었다..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 브르트니에르(Bretnie‵res, 白, 1838~1866, 유스토),
볼리외(Beaulieu, 徐沒禮, 1840~1866, 루도비코), 도리(Dorie, 金, 1839~1866, 헨리코),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1845~1866, 알렉시오) 등과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성지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南鍾三, 호 煙波, 1817~1866, 요한), 성 최형(崔炯, 1814~1866, 베드로)
그리고 홍봉주(洪鳳周, 1817~1866, 토마스) 등이 암매장되어 잠시 머물다 간 곳이다.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도 한강 새남터에서 교우들이 찾아내어
잠시 이곳 근처에 가매장했다가 미리내로 모셔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박순집(朴順集, 1830~1911, 베드로)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신부와 우세영 알렉시오 등이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군인으로서
이를 직접 목격하였다.
그리고 몇몇 신자들이 함께 3월 28일(음)에 시신을 찾아내 새남터 부근에 임시로 묻었다가 4월 14일(음)에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또 박순집은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3월 7일에 순교한 홍봉주 토마스,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일명 승연, 1811~1866,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진 정의배(丁義培, 1795~1866, 마르코) 회장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삼과 최형의 시신이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 왜고개 암장과 박순집의 일곱 도적
박순집의 왜고개 암장 사실을 오기선 신부는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866년 3월 7일 병인박해로 장 시메온 주교(張敬一), 유스토 마리아 백(白) 신부 그리고 루도비꼬 서(徐沒禮) 신부 세 분이
순교 후 군문효시하여 시체를 물샐 틈 없이 수직하는 통에 모래톱에 방치한 지 40일 후 즉 1866년 5월 28일에
무인(武人) 박순집 베드로는 다른 교우 여섯을 데리고 암암 칠야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그 무시무시한 새남터 모래사장을
두 패로 나누어 암호를 정해 가지고 땅으로 두더쥐처럼 조금씩 조금씩 기어들어 가면서 한편에서 "예"하면
얼마 간격을 두고 어느 어두운 구석에서 "수"한다.
합치면 "예수"란 낱말이 된다.
그래서 자기 동지인 줄 알고 마음 놓아가며 세 순교자 시체 절도사건을 벌인 것이다.
장사이요 억척이던 박 베드로가 세 시체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예"와 "수"가 일초 간에 마주쳤으니 일행 거룩한 일곱 도적이
이 세 시체 앞에 모였다는 증거다.
박 베드로가 장 주교, 백 신부, 서 신부의 수염을 함께 합쳐 입에 물고(그러니 세목이 박 베드로 턱 아래 흔들거렸다)
두 시체는 양쪽 옆구리에 끼고 시체 하나는 업고 암암 칠야 극비밀의 어둠을 갈라가며 탈출했다.
이 왜고개라고 불리우는 와서(瓦署) 자리에 고이고이 암매장을 하고 동서남북으로 발로 걸음을 재고 사면에 암호 표식을 하고 구름과 같이 사라졌다.
그 일곱 분 중의 한분 김 요한(흥민, 興敏)의 계씨를 오기선 신부가 중림동(약현) 교회 보좌신부로
1933년 1월 10일 부임 당시 면담한 일이 있고 이 역사담을 들어 두었던 것이다.
그후 20여년이 흘러 민 주교님이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들의 시체 찾기 운동을 벌이고 계셨기 때문에
1890년 인천으로 내려 간지 4년이 되던 해에 박 베드로를 유일한 고증인으로 불러 올렸다.
1894년 5월 22일에 박 베드로는 민 주교님을 위시하여 많은 성직자와 교우들과 이 왜고개로 갔다.
어느새 이 왜고개는 북망산처럼 수많은 무덤들이 즐비하게 누웠다.
동리 사람들이 몰려나와 남의 묘소를 마구 도굴하니 관가에 고소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런데 청천백일에 느닷없이 먹장 같은 구름이 꽉 끼고 뇌성벽력으로 소나기가 빗발치듯하니 동리 사람들은 다 도망치고 말았다.
그 틈에 박 베드로가 28년 전 암호 표시했던 무덤을 파헤쳐 그전에 자기가 순교자 성명, 연월일을 먹으로 쓴 사기대접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세 순교자의 유해가 발견됨과 동시에 다시 일기는 구름 한 점 없는 청천백일의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듯 하였다고
직접 그 일을 같이 한 김 요한 흥민 할아버지는 신기한 듯 오기선 신부에게 일러주고 또 일러주었다.
박 베드로의 딸 박 사베리오 수녀도 똑같은 회고담을 이 왜고개에 대해서 들려 주셨다.
세분 순교자 유해를 용산 성직자 묘소에 임시로 모셨다가 1898년 5월 29일 명동 성당이 낙성된 후
그 지하실 순교자 유해 안치소로 민 주교님이 옮기셨다."
(경향잡지 1971년 11월호, pp40~42)
◆ 박순집 증언록
한동안 공식적인 박해가 잠잠해진 1876년, 박순집은 교회의 밀사 최지혁(요한)과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의 딸 원(元) 수산나 등과 협력하여
드게트(Deguette,崔東鎭, 崔鎭勝, 1848~1889, 빅토르) 신부, 블랑(Blanc, 白圭三, 1844~1890, 요한) 신부 등을,
1877년에는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Ridel, 李福明, 1830~1844, 펠릭스)주교,
두세(Doucet, 丁加彌, 1853~1917, 가밀로) 신부,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 등을 입국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1888년에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가 푸아넬(Poisnel, 朴道行, 1855~1925, 빅토리노) 신부에게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도록 하자 푸아넬 신부는 박순집을 불러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자신의 집안과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 법정에서 증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기 권 타대오에게는 한마디도 바꾸지 말고 기록하도록 하여 증언록이 작성되었는데,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丙寅事蹟 朴順集證言錄)》으로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899년 10월 30일, 박순집의 도움으로 와서에 있던 일곱 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장되었고,
1901년 10월 21일에 삼성산에 묻혀 있던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해도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1909년 5월 28일에는 노고산에 묻혀 있던 남종삼과 최형의 시신이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과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은 1878년에 홍제원(현 홍제동) 장거리 고개 밑에서 살았는데
교회를 위해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1888년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 박황월(朴黃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수녀회에 입회시켰다.
그래서 박 수녀는 조선인 최초 다섯 명의 수녀 중 한 명으로 그가 95세의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는데 이 글에는 자기 가족들의 순교행적과 신앙생활, 수도회 역사가 담겨 있어 아버지의
《박순집 증언록》처럼 교회의 산 기록이 되고 있다.
■ 순교자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Lurent Marie Joseph) 주교(1796∼1839)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 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모방, 정 샤스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1839년 초 신자수는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사제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 닥친 박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나, 정 두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 주교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주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나 베드로 모방(Maubant, Pierre Philibert)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 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나 베드로 모방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정 야고보 샤스탕(Chastan, Jacques Honore) 신부(1803∼1839)
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외방전교회 사제가 된 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정 야고버 샤스탕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의 정결과 순명정신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남종삼 요한(1817∼1866)
남종삼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심상교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남종삼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 이유일등과 논의 하여 영불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남종삼은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6차의 국문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 성 남종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하여 성심 봉사하도록 빌어 주소서.
◆ 성 최형 베드로(1814∼1866)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최형은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나 14세 때 부모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는데,
그의 가족은 모두 열심한 신자였다. 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던 신학생들 가운데 병사한 최방제가 그의 동생이다.
큰누이는 평생 동정이었으며 형 최수는 병인박해 때에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렇게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자란 최형은 1836년 나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뒤 목수 일과 묵주 제작, 교회 서적 출판에 참여하였고,
장 주교가 입국한 뒤 교회 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큰 공로를 남겼다.
1866년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교회 서적들이 적발되자 전장운과 함께 체포되어 3월 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최형 베드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 출판사업의 발전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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