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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6. 연중 제 1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달 마지막 주일에는 사목 회의가 있습니다. 지난 2024년 6월에 27대 사목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임기가 2년이라서 올해로 마무리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내년이 본당 설립 50주년입니다. 그래서 사목 회장님과 사목 위원들에게 1년만 더 함께해 주시면 좋겠다고 부탁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사목 회장님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목 위원이 1년 더 봉사해 주기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7월에 28대 사목회가 새롭게 구성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사목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고, 본당 공동체는 누군가의 헌신과 수고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지난 5월 사목 회의에서 몇 가지 안건이 있었습니다. 성가대 인원이 늘어서 연습실을 더 큰 곳으로 옮기든지, 성가대 방의 벽을 트는 방안이 이야기되었습니다. 어떤 곳은 인원이 줄어서 걱정인데, 우리 본당은 단원이 늘어서 더 큰 연습실을 찾는다고 하니 감사할 일입니다.
매월 마지막 주일에는 ‘가족의 날’로 정해서 음식 나눔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구역에 부담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매월 마지막 주일에도 음식 봉사를 하겠다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수녀님이 확인해 보니 거의 매월 마지막 주일에 음식 나눔이 있었다고 합니다. 단체들이 활성화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27대 사목회를 마치면서 회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비용이 많이 드니 밖에 나가서 먹기보다는 성당에서 먹자고 합니다. 형제님들이 직접 고기를 사다가 구워 먹으면 비용이 절약된다며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수고하면서도 비용을 아끼려는 형제님들이 있어서 참 든든합니다. 저는 복이 많은 사제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사람들이 곤경 중에 당신을 찾고, 당신의 징벌이 내렸을 때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았습니다.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성전이 무너지고, 많은 백성이 유배를 떠났습니다. 그들에게는 절망과 허탈감이 가득했습니다.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께서 징벌을 내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고 선포합니다. 지금은 고통스럽고, 지금은 막막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고,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속담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독이 깨져 있으면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시간을 기도하는 데 사용합니다. 가족들과 대화하고, 책을 읽고, 자기의 능력을 개발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 피정하는 데 사용합니다. 그런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늘의 창고에 쌓이는 시간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 시간을 오직 자기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합니다. 누군가를 시기하고 험담하며, 분노와 원망 속에 머물고, 음주와 도박과 허무한 일에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한쪽은 안전한 곳간에 재물을 쌓은 사람과 같고, 다른 한쪽은 깨진 독에 물을 붓는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의지해야 할 안전한 곳을 알려 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세상에는 우리가 의지할 만한 것들이 많이 있어 보입니다. 재물도 필요하고, 친구도 필요하고, 가족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재물은 우리와 함께 가지 못합니다. 친구들은 빈소에 와서 울어 줄 것입니다. 가족들은 장지까지 와서 우리를 묻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문을 지나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뿐이십니다. 그러니 가장 안전한 창고는 은행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세상의 명예도 아닙니다. 가장 안전한 창고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 안에 쌓은 사랑, 주님 안에 바친 봉사, 주님 안에서 흘린 땀과 눈물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목 위원들의 봉사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회의에 참석하고, 행사 준비를 하고, 음식을 나누고, 주차와 시설을 돌보고, 성가와 전례를 준비하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하늘의 창고에 쌓이는 보화입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때로는 힘들고 지쳐도,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 봉사하는 마음은 주님께서 기억하십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앞두고 1년 더 봉사하기로 한 28대 사목 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의 수고와 노력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가정에 복을 내려 주시고, 마음에는 기쁨을 주시고, 봉사의 자리에는 지혜와 힘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시간을 쌓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수고가 밑 빠진 독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아니면 하늘의 창고에 쌓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 말씀은 지친 사람에게 주시는 위로입니다. 봉사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격려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시간을 바치고, 우리의 봉사를 바치고, 우리의 마음을 바칠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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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6. 연중 제 15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 지쳐 있는 모든 이를 초대하시며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안식을 얻기 위해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멍에라니요?! 갑자기 안식을 주신다더니 웬 멍에입니까?!! 멍에는 가축의 어깨에 메고 쟁기를 끌거나 수레 등을 끌게끔 하는 도구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안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주님께서 먼저 우리 구원의 가장 무거운 짐을 다 짊어지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높은 산을 홀로 오를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매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멍에를 메면, 주님께로부터 그분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불편하고 무겁게만 느껴지던 삶의 멍에와 짐이 편해지고 가벼워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분과 함께하기에 멍에는 편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단순히 주님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신앙의 길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 어렵다"라고 생각합니다. 혼자라면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라면, 그 길은 "쉬운 길"이 됩니다. 그분께서 이 길을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길을 걷는 데 있어서의 가장 큰 관건은 이 "'주님과 함께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느냐"이고, 또 "'사랑과 자비로 함께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일상 안에서 의식하려고 하느냐"입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한 믿음의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겸손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와 그 수용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자비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선업이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의 희생을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저희가 지은 죄와 온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바치나이다."
그러고 나서 또 "예수님의 수난을 보시고,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은총에 온전히 의탁하고 그 은총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믿음의 자세가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서 배우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린 오늘 복음 말씀에 관한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의 주석 내용을 다시 한번 나누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높은 곳에 이르고 싶다면 낮은 데서 시작하십시오. 웅장한 건물을 세우려 한다면 기초부터 놓아야 합니다. 이 기초란 바로 겸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건물이 크고 높을 수록 그 기초는 더 깊어야 합니다.… 그러니 건물은 높아지기 전에 낮아져야 하고, 탑은 낮아짐을 통해서만 세워집티다." (겸손이라는 말은 라틴어 humus, 곧 "땅"에서 비롯됩니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하느님께서는 겸손의 제단에서만 봉헌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1090–1153) 역시 네 가지 주요 덕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겸손, 겸손, 겸손, 그리고 겸손"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의 에고는 이 겸손을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고,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고는 연결과 일치가 아니라 분리와 단절을 추구하며 오직 '나'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원초적 거짓"이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존재는 어느 것도 절대 "홀로"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에고는 거짓된 정체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아주 작은 진실만 드러나도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겸손은 꾸밈없는 진리입니다. 사실 겸손이라는 것은 자신을 깎아내리거나 숨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란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은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깊이 인식하고 살아내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래서 진리 앞에서 에고는 더 이상 숨을 수 없지만, 진리는 에고 안에 숨겨진 채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말씀처럼, 겸손은 어렵지만 교만보다 훨씬 더 가볍게 짊어질 수 있는 짐입니다. 겸손이라는 말이 humus, 곧 "땅"에서 비롯된 것처럼, 땅은 안식과 안전, 기초와 현실, 근원을 상징합니다.
에고 안에는 결코 안전이 없으며, 에고에 매달려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이 안전한 발판을 잃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의미에서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 사이트에 올린 어떤 분의 고백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분은 중독자 회복 프로그램 12단계 중 제 7단계, 즉 겸손히 하느님께 우리의 부족함을 고쳐 달라고 청하는 단계와 관련하여 겪게 되는 어려움과 도전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거듭해서 제7단계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하여 다시 뒤로 물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계속해서 무엇인가 빠져 있었다고 느껴졌고, 그 단계의 힘이 내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제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한 단어, 읽었지만 무시했던, 모든 단계와 프로그램의 기초가 되는 말—"겸손히(humbly)"였습니다.
저는 의 부족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을 미루고, 쉽게 화를 내며, 지나친 자기연민에 빠지고, 늘 '왜 나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성경 말씀 '파멸에 앞서 교만이 있고, 멸망에 앞서 오만이 있다.'(잠언 16,18)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제 삶에서 교만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겸손은 단순히 낮아짐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진실하게 드러내는 태도입니다. 나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은총 안에서 고쳐 달라고 청하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교만은 나를 무너뜨리지만, 겸손은 나를 일으켜 세우고, 하느님께서 나를 새롭게 하실 길을 열어 줍니다.
오늘 저는 다시금 깨닫습니다. 겸손은 회복의 문이며, 은총의 시작이라는 사실을요. 그리고 저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하느님께서 저를 치유해 주시도록 맡겨 드릴 때, 참된 자유와 평화가 찾아온다는 엄연한 진리를요…."
오늘 우리 성모님 함께 성모님의 노래를 우리 노래로 불러 봅시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
그 인자하심은 세세대대로
당신을 두리는 이들에게 미치시리라.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자비하심을 아니 잊으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이미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언약하신 바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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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6. 연중 제 15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은 내게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하고 친절한 분이신지?
한 구절 한 구절 어디 하나 버릴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오늘 복음 말씀은 더욱 그러하고, 휘청휘청 힘겹게 걸어가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 28-30)
한 단어 한 단어 곱씹으며 묵상하다 보니, 우리 주님의 다정하고 자상한 마음이 온몸과 마음으로 느껴져, 전율이 일어나는 느낌입니다.
오늘도 결코 만만치 않은 버거운 하루를 견뎌내야만 하는 우리, 그 누구에게도 대놓고 힘들다며 하소연하기조차 어려운 우리, 그 모든 굴욕감과 수모도 말없이 참아내야 하는 오늘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얼마나 힘드냐며, 우리의 어깨 위에 당신의 손을 다정하게 얹으십니다. 부드럽게 두드리며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이윽고 우리를 꼭 끌어안아 주시며 속삭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
사랑스러운 나라 몽골 여기저기를 순례하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마침 순례 기간과 몽골의 대명절 나담 축제 기간이 겹쳐, 그들이 오랜 세월 간직해온 전통문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축제 기간 동안 몽골인들은 민족 전통 복장으로 단장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점점 사라져가는 한복 문화 같은 분위기가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전통 복장을 한 오누이 어린이들을 만나 허락을 득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얼마나 예쁘던지요.
이 기간 동안 몽골에서는 남자들의 세 가지 경기, 씨름, 활쏘기, 말타기의 본선 경기가 울란바토르 전역에서 펼쳐집니다. 축제 기간 티브이를 켤 때마다 경기가 생중계 되고 있었습니다.
몽골에도 설날이 있는데,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볼수 없는 특별한 진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새해 인사를 윗사람들에게 건네는데, 우리와 반대로 아들이 아버지께, 제자가 스승에게 새뱃돈을 건넨답니다. 이 얼마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전통인지!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설날, 추석과 같은 민족 고유의 명절이 있습니다. 명절이 지닌 의미가 참으로 풍요롭습니다. 명절을 지내며 우리는 오늘 우리와 우리 민족과 나라를 존재하게 한 부모, 조상들을 기억하고 감사드립니다. 더 나아가서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을 또한 기억하며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노력이 있다면 기억하는 것입니다. 회상하고 감사하고, 오늘 이 자리에 되살리고,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하고...
오늘 다시 한번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 부당한 죄인인 나를 살리신 하느님은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 그분은 내게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하고 친절한 분이신지?
몽골 청소년 돕기를 위한 ‘양 한 마리 프로젝트’에 기쁘게 참여해주신 형제자매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신 양 한 마리는 수많은 길잃은 양을 구해내는 마중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양 한 마리 후원하기
양 한 마리 가격: 10만원
살레시오회 몽골지부 후원 계좌
국민은행 090-01-0323-505
예금주: (재) 천주교 살레시오회 선교국
*송금시 반드시 ‘양 한 마리’라고 명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양 한 마리 후원 문의 및 연말 기부금 영수증 신청
살레시오회 선교국
02) 828-3524, 010-8983-3524(월~금, 09:00~18:00)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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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6. 연중 제 15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 멍에를 메어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1) 이 말씀에서 ‘무거운 짐’은, ‘유대교의 율법들’로 해석되기도 하고, ‘인생의 고통’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유대교의 율법들은 우리 신앙생활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우리를 억누르는 ‘인생의 온갖 고통들’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은 고달프고, 어렵고,
힘든 나그네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안식과 평화와 해방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너무 힘들고 지칠 때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이고, ‘새 힘’을 주시는 분이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안식, 평화, 해방을 모두 합한 말이 ‘구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이 신앙고백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을 사도들의 증언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참되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이 무거운 짐을 지고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부터 깨달아야 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인생이 아주 행복하고 재미있다. 예수님이 없어도 된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냥 예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 것입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은 대부분 교도소에서 나갈 날만 기다리면서 살지만, 교도소 생활이 좋다고 하면서 안 나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나갔다가 금방 되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들이 생깁니다.
노비 제도가 폐지되었을 때, 그냥 종으로 살겠다면서 주인 곁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안식과 평화와 해방을 주셔도,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면, 예수님도 그 사람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감방이 더 좋으니까 안 나가고 그냥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을 강제로 끌어낼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은 자유와 해방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분명히 자유와 해방인데,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주시는 열쇠를 열쇠로 알아보지 못하고 자물쇠로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가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1-22).”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이 바로 그의 멍에였는데, 그 사람 자신은 그것이 멍에인 줄 모르고 있었고, 아마도 재물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빈손으로 와서 나를 따라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참된 안식과 자유를 그에게 주기 위한 열쇠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안식과 자유를
잃게 만드는 멍에와 자물쇠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믿었다 하더라도...
3)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루카 5,11).
‘모든 것을 버리고’ 라는 말을, ‘모든 멍에와 짐을 버리고’로, 또는 ‘모든 멍에와 짐에서 해방되어’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순간부터 참된 안식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안식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4) 멍에가 아닌데도 멍에라고 오해하는 일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예가 판공성사입니다.
고해성사를 주는 사제들은, 보기 싫은데도 억지로 보는 것과 진심으로 원해서 보는 것을 금방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정말로 부담스럽다고 하소연하는 이들이 실제로 많은데, 고해실에 들어가서 “고해성사가 너무 부담스럽다.” 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해결 방법입니다.
사실 고해성사는 부담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신앙인들만을 위한 특권이고 은총입니다.
여러 가지 헌금들도 신자들을 힘들게 하는 일들입니다.
특히 성전 신축 헌금 같은 것이 더 그렇습니다.
단순히 가난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신앙생활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사목자들이) 크게 잘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런 일을 안타까워하시고
슬퍼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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