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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빠빠"
1959년 말 신상옥 감독이 ’로멘스 빠빠‘라는 신작 영화의 주연 남자 배우를 공개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냈다.
강신영은 아직 초보 배우학원생이라 감히 원서 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분위기 구경이나 하겠다고 광화문의 조선일보 부근 면접 사무실로 갔다.
그는 수원 공군부대서 위관급 조종사로 근무하는 형 신구에게 빌붙어 살고 있었다.
그날은 한껏 멋을 부려 형이 가장 아끼는 빨간 티셔츠에다 공군 점퍼를 훔쳐 입고 그곳에 갔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데도 3,083명의 주연배우 지망생들이 모였다(다음날 조선일보 기사).
그들이 만든 길고 긴 행렬이 뱀처럼 돌고 돌아 ‘시민회관’과 ‘천마 교통’ 까지 감싸고 있었다.
신영은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서서 그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툭툭 쳤다.
구두닦이 애였다.
“아저씨 저기 ’취미 다방‘이란 간판 보이죠? ’라이반‘ 낀 어떤 사장님이 거기 좀 올라오래요.”
다방에 올라가니 배레모에 검은 선그라스를 낀 조폭 분위기의 한 사내가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너도 배우될 생각 있나 보지? 아까부터 줄곳 밖에 서 있던데, 나 신상옥 감독의 조감독이야. 3시간 뒤 면접 사무실로 가. 거기서 신 감독님 만나.”라고 말하며 그가 적은 메모지를 주었다.
폼나는 그 사내는 나중에 한국 영화계에서 이름을 날린 이형표 감독이다.
“저가 왜 신 감독님을 만나는데요? 저는 신 감독님의 얼굴도 모르고요.”
조감독은 긴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야 인마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촌놈이. 까라면 까는 거지. 너 최은희는 알지? 그 옆에 앉은 사람이 신 감독이야. 나와 만난 이야기하고 이 메모 드리고 감독님 말씀 들어봐.”
3시간 동안 갈 곳이 없다.
귀찮아서 수원의 자취방으로 가버릴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 배우될 사람이니 이럴 때 거물들과 얼굴이라도 익혀 놓자는 생각에 시간을 기다렸다.
명동을 갔다.
다시 충무로를 거쳐 남산에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을지로에서 종로로 마냥 걸어 다녔다.
광화문에 다시 돌아와 시계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이제는 갈 곳도 없다.
비 오는 골목길에 마냥 서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 신상옥 감독을 만났다.
그는 한동안 물끄러미 신영을 쳐다보았다.
“자네 나와 같이 일해볼 생각없나?” 라고 물었다.
어리둥절한 촌뜨기를 보고 감독은 다시 말했다.
" '로멘스 빠빠‘의 주인공이 될 생각이 없냔 말이다. 계약은 삼 년이야.”
생각하지도 않던 소리에 깜짝 놀랐다.
‘조연도 아니고 주연이라니.’
그 때를 회상하며 신성일은 말했다.
"지금이라면 환호작약하며 만세를 부르고 신 감독에 엎디어 수없이 절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전차에 받힌 것처럼 머리가 하얗게 텅 비어 멍하게 앉아 있었다."
수천 명의 지원자들이 난로에 눈 녹듯 사라졌다.
지원하지도 않았던 한 인간이 새별로 탄생한 것이다.
애송이에게 신 감독은 몇 년 동안 알아 온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자네는 오늘부터 나의 성을 가져가 신가(申哥)가 되는 거야. 그리고 별 중에 최고의 별이 되어야지. 신성일(申星一)”
그 시각부터 강신영은 신성일이 되었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옛날 유럽에나 있는 전설이 아니었다.
광화문에서도 호박이 마차 되는 광경이 재현되었다.
강신영은 신성일로 로멘스 빠빠에 데뷔하고 영화는 1960년 설날 개봉되어 공전의 대 히트를 치게 된다.
화려한 데뷔였다.
이날부터 신성일은 일생 동안 506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수원 공군관사로 돌아온 밤.
강신영 아니 신성일은 온갖 생각이 얽혀와 밤을 꼬박 세웠다.
행복을 찾아 아니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서울로 왔다.
기차표 살 돈이 없어 형 강신구 중위가 조종하는 공군 수송기 C-46을 타고 대구서 서울로 갔다.
추풍령 상공은 에어 포켓이 많이 생기는 곳이다.
신영이 가던 날도 그랬다.
비행기가 떨어졌다, 올라갔다 그리고 좌우로 흔들려 그의 몸도 여기 박히고 저기에 박히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누군가가 비행장에 착륙했다며 그를 깨웠다.
눈떠보니 여자 공군 대위 누나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의 첫 여자는 군인이었다.
운 좋은 사람은 무지개의 뿌리를 만나 행운을 캐낸다.
행운은 네모, 세모, 둥근 것 등 여러 형태로 존재하며 그것들은 각각 ‘빨주노초파남보’로 색칠되어 있다.
그러나 화려한 보석들이라도 빛이 있어야 보인다.
무지개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물론 보석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보석을 캔 사람이라도 빛을 만나지 못하면 암흑만 손에 쥐어질 뿐이다.
무지개를 만날 때까지 그리고 보석을 캘 때까지 절망하지 마라.
노력하며 기다려라.
행운은 어느 날 고양이 발자국처럼 소리없이 다가온다.
신성일의 고향은 대구다.
은행지점장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수창초등학교, 경북중학과 경북고등학교를 다니며 돈과 명예가 기러운 줄 모르고 자랐다.
미남이자 공부도 잘하니 그를 갋을 친구가 없었다.
중학에 들어가서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
손용호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로 큰 부자였다.
용호는 중앙초등, 경북중고등을 다니며 미남에다 공부를 잘했다.
주변에서는
‘운동 잘하는 신영이 최고다’,
‘노래 잘하는 용호가 제일이다’ 하며 그들의 영웅을 비교하고 있었다.
공교롭게 둘은 고등학교 3년을 쭉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아폴로디테가 헬레네를 파리스 손에 쥐어 주듯이 행운의 여신은 용호에게 먼저 미소를 짓는다.
1956년 용호는 서울 농대에 합격한다.
신영의 형은 공군사관학교에 떨어지고 신영은 서울 상대에 떨어진다.
60년에는 용호의 여동생 손미희자가 미스 코리아 진에 당선이 된다.
신영의 집이 망한다.
신영의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일찍 병사하자 경북여고 출신인 김연주 여사는 경북도청 공무원, 적십자사 등에서 생계를 위한 직장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여자 봉급으로 두 아들을 키우고 대학에 보내기에는 버거운 수입이었다.
계를 만들어 ‘오야’노릇을 해 겨우 살림을 꾸려 나갔다.
어느 날 계꾼들이 한둘 돈을 떼어먹고 도망가는 바람에 계가 깨어졌다.
신영의 모친은 애들을 두고 야반도주를 했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용호의 집안도 사업실패로 아버지는 자살한다.
모친도 계를 하다 쫄딱 망했다.
아테나와 아폴로디테의 싸움은 오랫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한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형 신구와 동생 신영은 공납금은커녕 밥해 먹을 돈도 없었다.
빚쟁이들은 매일 와서 어머니를 찾아내라며 난동을 부렸다.
줄 돈이 없다. 두들겨 맞기도 했다.
형제가 굶어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한 것은 약국하는 친척이 약을 조금씩 건네주어 그것을 팔아 밥을 마련했다.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살다 보니 공부할 겨를이 없었다.
형은 조종간부 후보생으로 입학을 하고 신영은 백수로 놀고 있었다.
용호는 그래도 집안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 입에 풀칠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는 서울 농대에 입학을 하고 이어 ‘KBS 노래경연대회’에 입상하여 가수로 데뷔했다.
미희자는 배우로 인기를 모았다.
인생 전반기는 용호가 앞서가고 있었다.
아테나가 응원하는 신영은 주춤하고 아프로디테가 응원하는 용호가 선두를 달렸다.
서울로 간 신영은 호떡 장사, 군고구마 장사를 했다.
호구지책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굶주림보다 더 괴로운 것은 서울말도 못하는 촌놈, 돈도 없는 가난뱅이를 깔보고 개처럼 취급하는 주변 사람들의 괄시였다.
배신, 절망, 공포, 불안, 온갖 보석들이 두 형제를 감싸고 있었다.
형 신구가 공군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둘의 생계는 겨우 굶어 죽지 않는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진고개에서 신영에게 희미하게 빛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그 날 저녁 무렵에도 신영은 서울로 와서 충무로를 무작정 배회하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이 충무로에서 명동으로 흘러 들어가는 입구, 미남미녀들이 별을 꿈꾸며 고개를 들이미는 충무로 진고개 길, 그 언덕에 신영이 서 있었다.
멀리서 아래위로 하얀 옷으로 쭉 빼입은 멋쟁이가 오고 있었다. 양쪽으로는 가방을 든 ‘가방모찌’ 들이 보였다.
명동에서 계속 직진하면 미도파 백화점이 있다.
그곳은 신세계와 더불어 부자들의 쇼핑센터이고 지하에는 전국 최고급 나이트클럽이 있다.
세 명의 사내들은 나이트클럽으로 밤 공연하러 가는 눈치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맙소사! 이게 누군가? 손용호가 아닌가!’
1958년 작곡가 손석우를 만나 ‘검은 장갑’을 불러 외모와 미성으로 전국적으로 이름 날리고 있는 손용호 아니 손시향을 만난 것이다.
그들이 만난 59년에는 손시향은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라는 노래로 인기 절정을 누릴 때였다.
매혹의 달콤한 목소리 ‘한국의 짐 리브스’라는 칭찬을 듣고 있는 손시향을 만났다.
신영은 지옥에서 부처님 만난 기분이었다.
그를 와락 끌어안으려고 달려갔다.
용호도 그처럼 뛰어왔다.
하지만 허상이었다.
“어, 신영이 아이가?”하면서 손시향은 메마른 인사를 하고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 버렸다.
‘아니 이게 꿈이 아니란 말인가! 용호가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아는 체라도 하지 말지, 하나님 내 반드시 출세해 저 인간 내 앞에 무릎 꿇고 눈물 흘리게 하겠습니다.’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시향이 간 미도파 쪽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굉장히 긴 시간이 흘렀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어떤 사람이 가다가 그를 툭 쳐주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충무로 바닥에 낙엽 한 장이 날려가고 있었다.
그 낙엽이 그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 분노와 슬픔의 비극적 감정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무작정 걸었다.
중부 경찰서쯤에 오자 ’한국배우전문학교‘라는 간판이 보였다.
원장에게 등록 신청을 했다.
“이번 학기 등록은 마감되었어. 여섯 달 뒤에 다시 오게”라고 김인걸 원장이 그를 보내려고 했다.
잠시 뒤 원장이 그를 불러세웠다.
말없이 등록 신청서를 주며 쓰라고 했다.
특별 입학을 시켜주었다.
’김기영‘ ’유현목‘ ’김수용‘ 등 기라성(綺羅星)같은 감독들이 강사였다.
연극계에서 ’박진‘ ’이진순‘ ’양광남‘ 등이 그를 지도했다.
훌륭한 지도자들이 그 제자도 우수한 인재로 만드는 것이다.
학원이 유명한 덕에 조연과 엑스트라 영화출연 교섭도 많이 받았다.
모두 거절했다.
앞으로 큰 배우될 사람이 조연같은 조무래기로 시작하지 않겠다는 오기였다.
1959년 8월 진고개에서 만나 손시향이 빛을 비추어준 덕에 강신영이 배우학원에 가게 되었고 결국 신성일이란 대 스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의 청년 시절 눈빛 속에서 반항적인 모습과 분노의 감정이 이글거린다.
건들거리고 이죽대는 그의 말투와 행동에서 승화된 고독과 절망의 냄새를 느끼게 된다.
전 국민이 그렇게 환호했던 매력은 그의 매끈한 외모와 단단한 근육 탓 만은 아닌 것이다.
춥고 배고픈 시절 자갈 속에 응축되었던 감정들이 빛을 받자 영화에서 보석으로 승화되어 빛나게 나타난 것이다.
손시향은 60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이민갔다.
현지에 가서도 한동안 ‘리 손(Lee Sohn)’이라는 이름으로 가수 활동을 계속했다.
현지 교민회장도 하면서 인기와 신망을 모으며 살았다.
노후는 넉넉하지 못했다.
잠깐 귀국하여 가수활동도 하였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다시 미국으로 가서 단학 공부를 하여 ’공중부양‘을 한다며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공중에 뜨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말년에는 생업으로 지붕 공사하는 일을 했다.
노래가 하늘로 뜨지 않자 하늘 가까운 지붕 위에서 일하고 있다.
트로이 전쟁은 끝나고 아테나 신이 승리했다.
헬레나는 다시 그의 남편 멜레라오스에게 돌아간다.
강신구 장군은 승승장구하여 68년 전치범 대령(공사2기) 인솔하는 조종사 16명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일 년간 F-4D(팬텀기) 조종 훈련을 받는다.
소련제 미그에 당할 전투기가 없어 한동안 전전긍긍하던 미국이 만든 회심의 전투기가 ’F-4D‘ 이다. 별명인 ’미그기를 잡는 도깨비‘ (미그킬러 팬텀)을 줄여 팬텀이라고 불렀다.
당시 최신예 전투폭격기인 이 비행기는 미국과 가장 친한 우방 3개국만 보유하고 있었다.
팬텀기 훈련 조종사들은 거의 다 공군사관학교 출신들인데 유일의 조종간부 출신(6기) 강신구가 있었다.
조종 훈련을 마친 이들은 미국대륙에서 3번의 공중급유를 받으며 한국으로 온다.
69년 8월 28일 마중 나간 후배 조종사들의 전투기들이 제주도 상공에서부터 팬텀기를 칸보이를 하는 가운데 15시에 팬텀기 8대가 태극 문양을 뻔쩍이며 대구 비행장에 착륙한다.
이날의 감격은 강신구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는 중장으로 전역하여 말년에 동생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강신영의 주먹에 꽉 쥐어져 있던 이름 없던 돌들이 빛을 쪼여주자 신성일의 보석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데뷔 작 ’로멘스 빠빠‘는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되고 무명의 촌뜨기 신성일은 스스로 전국을 비추는 별빛이 된다.
그 당시는 한국인은 외국 여행은 아무나 할 수가 없는 가난한 시대였다.
운좋게 신성일이 촬영하러 일본 요코하마에 간 일이 있다.
요코하마는 일본의 삼대 도시답게 만물이 그의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하는데 그중에 특히 눈에 띄는 것이 빨간 스포츠카 ’포드 머스탱‘였다.
그 차를 갖고 싶었다.
한국 최고의 스타가 가져야 될 자동차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귀국하여 밤낮으로 그 차를 손에 넣을 궁리를 하고 다녔다.
이미 돈은 흔전만전 쓸 수 있게 된 그였지만 외화는 쓸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기회가 왔다.
당시 박정희는 수출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허용해 주었다.
대기업의 총수가 외화를 많이 벌면 외국차 한 대를 사게 해주는 특혜를 주었다.
대우 김우중 회장이 수출을 많이 했다고 외제 차 한 대를 사서 갖고 있었는데 그해 업적이 좋아 또 한 대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차를 신성일이 우격다짐하여 자신의 차로 만들었다.
경부고속도로가 서울서 부산까지 완전 개통 공사가 끝났다.
공식 기념식이 있기 전 박정희 전용차가 텅 빈 고속도로를 부산서 서울로 기운차게 달리고 있었다.
그의 차가 추풍령 부근을 통과할 무렵 서울서 빨간 외제 차 한 대가 고속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고속도로는 아직 모든 차 운행금지 상태였다.
대통령 차와 빨간 포드 머스탱이 서로 비껴 달려갔다.
이 지점에서 이런 교차는 신성일이 세밀한 계산하에 실천된 노름이었다.
놀라기도 하고 화도 난 박정희가 외쳤다.
“저 새끼 어떤 놈이야?”
경호원들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신성일 같은데요”라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오래 살라 그래”
박정희가 뜻 모를 지시를 한다.
욕한 건지 걱정한 건지 아무도 그 말의 속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모택동이 임표가 도망가는 날 똘만이들이 ’어찌할 깝쇼?‘라고 묻자 ‘비는 오고 엄마는 시집가네.’ 라는 말과 같은 뉘앙스다.
다음 날 중앙정보부에서 신성일이 된통 얻어터졌다는 말이 없는 걸 보면 박 대통령은 허허 웃고 만듯하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인지 나이 지긋한 남성들을 좋아했다.
지인들에게 속으로 4명의 남자를 아버지로 생각하며 살았다고 자주 말했다.
신성일은 박정희를 아버지처럼 생각해서 그의 통 큰 인격을 믿어 재롱을 떨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이미자보다 열 배 이상 세금을 내는 신성일이 귀여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둘은 여성 편력에서는 형, 아우할 수 있는 능력자이며 동지들이 아니던가!
훗날 대통령의 혼잣말은 신성일은 이렇게 해석했다.
‘운전 조심하고 오래 살라’는 따뜻한 충고였다고...
- 권영재/정신과 전문의 -
첫댓글 좋은글 읽는걸 좋아하는 1인~
교회갈준비도 해야되고 바쁜중에 장문의 글 궁금해서 읽고 새기고갑니다
재미있는 글이라 끝까지
잘 읽고 갑니다~~
제가 공군을 제대했고 현역시절에 강신구 소장님은 김해 공군부대의 비행단장을 하셨는데 누구보다 이분을 가까이에서 뵈었는데 이글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글에서 언급 되었던 C-46 수송기를 타기도 했고 F-4 팬텀기는 아직도 한국 공군에서 운용중인걸로 아는데 공군의 역사를 재조명 하는글 감명깊게 읽으며 옛 군대생활의 기억을 잠시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