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제명 작사 현제명 작곡 니나
김화용 노래
수원시립합창단
한종여 노래
니나 니나 나의 사랑하는 니나
니나 니나 네 얼굴 곱더라
방긋 웃는 너의 얼굴에는
둥근 달이 솟아나네
니나 니나 나의 사랑하는 니나
니나 니나 네 얼굴 곱더라
니나 니나 나의 사랑하는 니나
니나 니나 네 얼굴 곱더라
방긋 웃는 너의 얼굴에는
장미 꽃이 피어나네
니나 니나 나의 사랑하는 니나
니나 니나 네 얼굴 곱더라
현제명(玄濟明,1902.12.8∼1960.10.16)
음악가.
호 현석(玄石).
대구 출생.
계성학교(啓星學校)를 거쳐
숭실전문(崇實專門)에 입학,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우고
1923년 졸업 후
전주
신흥학교(新興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미국에 건너가 28년
시카고음악학교에서 석
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그 뒤 연희전문 음악부 주임이 되고
30년 조선음악가 협회를 결성,
초대 이사장이 되면서부터는
37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조선문예회,
38년에는 대동민우회,
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 등
친일단체에 가담,
지도자로서 활약하고,
42년에는 경성후생실내악단을 결성,
‘음악보국’을 내세운 친일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광복과 더불어
45년 고려교향악단
(高麗交響樂團) 등을 설립하여
그 이사장에 취임하고
경성음악학교를 세워 교장이 되었다가
이듬해 서울대학에 통합되어
초대 음악대학장에 취임했다.
한국 음악가협회 위원장,
서울시 문화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54년
예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 그의 묘가 있다.
작곡가, 성악가, 기독교도로서
사업을 하던 부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회 성가대에서 서양음악을 익혔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면서
서양선교사에게서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웠다.
전주 신흥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다가
숭실전문학교에서 알게 된
레인보우레코드회사 사장인
R. 하버의 추천으로
무디 성경학교에 입학해
성서와 음악을 배웠다.
1928년 시카고에 있는
건(Gunn) 음악학교에서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미국 유학시절에 고향생각, 산들바람 등의
가곡과 찬송가를 작곡했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영어교수로 있으면서
음악부에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만들고
공회당에서 최초의 공연을 가지는 등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30년대에는
빅타레코드사와
컬럼비아레코드사에서
직접 노래를 불러 음반을 취입했다.
1932년 2월
조선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33년 홍난파와 함께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1937년 미국 건 음악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가 유학가기 이전부터
박사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그가 쓴 박사 학위 논문이
어느 글에서도 확인되지 않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944년에는
일제의 어용음악가 조직인
조선음악가협회와 경성후생악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친일행위를 했다.
1945년 지금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모체인
경성음악전문학교를 설립했다.
8.15해방 후
한민당 당원으로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고,
1950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향전을 총지휘했으며,
1954년 고려교향악단을 조직했다.
1955년 마닐라 음악회의에 참석,
1958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UNESCO) 국제음악회의에 참석했다.
1955년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생애
현제명은 1902년 12월 8일
경상북도 대구시 남산동 139번지에서
현수봉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친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관계로
어려서부터 교회음악을 접하게 된다.
그때만 해도 ‘풍각쟁이’라고 천시하던
음악의 세계에 빠져든 현제명은
대구 계성중학교를 거쳐
사학의 명문인 평양 숭실전문에
입학하면서
음악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었다.
숭실전문에서의 전공은 문과였지만
음악에 대한 정열을 누를 길이 없어
당시 유명한 음악교수였던
솔트 부인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우는가 하면
밴드부에서는 코넷을 불었고
합창단에서는 테너로 활약함으로써
그는 이미 음악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음악광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음악 속에 몰입하면서도
보다 깊이 있는 음악공부를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
미국 선교사 로디 히버가
그의 노래와 피아노 솜씨에 감동한 나머지
미국에 유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1923년 유학을 기다리면서
신흥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
그는 전주 출신의 양신선 여사와 결혼하였고,
6개월 후 단신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시카고에 있는 건(Gunn) 음악학교에 입학,
1929년 석사학위를 받기까지
4년여의 유학생활을 계속했다.
그의 가곡 중에 널리 알려져 있는
고향생각은 유학시절에 작곡한 것으로
먼 타국 땅에서 느끼는
고국에의 향수를 담백하고도 정감 있게
잘 그려내고 있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애창곡으로 남아 있다.
1929년 9월 연희전문학교
음악부장으로 부임한 현제명은
1943년 부장직을 사임할 때까지
음악교육자로서 성악가로서,
또는 작곡가로서 눈부신 활동을 했는데
10여 년간의 연희전문 생활은
그 자신의 음악적 활동은 물론이요,
비록 음악전공과는 아니지만
그의 정열적인 지도로
후일 이 나라 음악계를 이끌어 간
음악가들을 많이 배출해냄으로써
해방 후 한국음악계의 발전에
중요한 구심점을 만들어낸 중요한 시기였다.
“민족을 위하여 음악의 개척자가 되어달라”는
에비슨의 뜻 있는 권유는
현 박사로 하여금 연희전문에서의
음악활동을 단순한 음악교육이 아니라
암담한 조국을
위한 민족적인 음악활동으로 바뀌었고
합창단을 만들어
계몽적인 행사를 개최하는 한편
관현악단과 취주악단을 조직해서
교향악 운동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다.
그토록 바쁜 가운데서도
그는 자신의 독자적 음악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악가로서 저력을 과시하고,
1931년에는 전국하기음악강습회를 열어
음악강습회의 효시를 이루었고,
1932년에 시작해서 1944년까지 계속된
전국남녀중학교 콩쿠르는
이 나라 음악 콩쿠르의 선구를 이루었다.
작곡가로서 현제명의 활동은
1930년대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1933년 이화여전 강당에서
현제명, 홍난파 2인 작품발표회를 가짐으로써
작곡가의 위상을 높였다.
1945년 경성음악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했고,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가 개교하자
쾌히 예술대학으로 흡수시켜
초대 음악부장을 거쳐
초대 음악대학 학장을 맡았다.
1960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현제명은 음악의 전문 교육을 통한
새로운 문화 창달에 온 힘을 쏟았고,
능력 있는 교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해
빠른 시간 안에 명문 음악대학으로
성장시켰다.
작품세계
왜정말기 일제의 탄압은 점점 악랄해져
급기야는 학교에서도
대외적인 활동은 물론
모든 음악행사를 못하게 했고,
급기야는 그가 작곡한 조선의 노래가
민족적 사상을 고취시킨 곡이라 하여
결국 음악활동을 중지당하게 되었다.
테너 한규동은 동경 유학시에
현선생이 메시아의 독창자로 초청되어
연주를 할 때
한국 유학생들은
“어깨가 으쓱했고,
일본인들 앞에서 뽐내기도 했다”고
쓰고 있다.
1933년부터는
경성방송국의 초청으로
합창단과 중창단
그리고 관현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라디오로 방송함으로써
그 인기가 대단했다.
한 일간지에서는
이러한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관현악단은 중앙학우회가 있으나
미비하고,
연희전문의 관현악단은
종전보다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었다.
특히 바이올린의 활동은 현저하다.
여기서 현제명씨의 공로는
지대한 것으로 말할 수 있다.
그의 성격은 명랑하고 쾌활하며
활동적이었는데
언제나 순수한 예술적 정신의 토대 위에서
행동했으며,
솔직담백한 그의 성격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
훌륭한 후배들을 포용하고 있었다.
작곡가로서의 면모를 살펴보면
이미 1929년부터
작품발표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광복 후에는 한국 최초의 창작 오페라로
춘향전을 작곡,
1950년에 공연함으로써
한국 창작 오페라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오페라 춘향전이 올려졌을 때는
첫날부터 입장이 매진되었고,
전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현제명은 거금을
오페라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폭넓은 그의 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성악가로서의 그는
1930년대에 취입한
레코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당시 콜럼비아레코드사와
빅터레코드사에서는
그를 청반, 적반 가수로 대우했으며,
그때 취입한 조스란의 자장가,
토셀리의 세레나데,
자신의 작품인 니나, 희망의 나라로 등은
최고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많은 가곡과 오페라 춘향전, 왕자호동은
광복 후 혼란기에
위로와 음악적 감동을 나누어 주었고,
그의 오페라사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당시의 음악적 수준과 사회환경을 생각할 때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적
현제명은 성악가로서,
작곡가로서,
교육자로서
우리나라 양악발전사에 우뚝 선 거인이다.
그는 대구 계성중학을 거쳐
음악의 명문 숭실전문학교에서
꾸준히 음악을 공부하였으며
미국 시카고의 건 음악학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최고로 뛰어나고 인기 있는 테너로서
오페라 독창회 합창 등
다양한 무대에서
청중을 압도하는 강한 흡인력으로
청중을 열광케 했으며
작곡가로서는 가곡 고향생각, 가고파
니나, 희망의 나라로 등 주옥같은 가곡을
작곡하는 한편
1950년에는 한국최초의 창작오페라인
춘향전, 왕자호동을 작곡, 공연함으로써
한국 창작오페라의 신기원을 이룩하기도 했다.
또한 교육자로서 1928년부터 1943년까지
연희전문 음악부장으로 재직하며
합창단과 관현악단, 취주악단을 조직하여
교향악 운동의 기틀을 다졌으며
1945년에는 경성음악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고
이듬해 국립서울대학교가 개교하자
쾌히 예술대학으로 흡수시켜
초대 음악장을 맡아
능력 있는 교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하여
빠른 시간에 명문 음악대학으로 성장시켰다.
한편 1945년에는
한국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여
해방 후의 격동기 속에서도
26회라는 연주기록을 세워 교
향악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란기를 통해
그가 우리 음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공로는
우리 음악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예술원 홈)
학력
1923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
1927 미국 시카고 건(Gunn)음악학교 석사
1937 미국 시카고 건(Gunn)음악학교 박사
경력
1929 연희전문학교 음악부장
1929 제1회 독창회
1931 전국하기음악강습회(음악강습회 효시)
1932 한국음악협회 이사장
1932 전국남녀콩쿠르 개최
1933 현제명, 홍난파 2인 작품발표회
(이화여대 강당)
1945 경성음악학교 설립
1945 고려교향악단 창설, 이사장
1946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1946 서울시 문화 부위원장
1948 한국음악원 설립, 이사장
1954 예술원 회원
1955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1960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부위원장
상훈
1955 대한민국예술원상
1965 문화훈장
오페라 춘향전(이서구, 1950)
왕자 호동(1953)
가곡
가고파(이은상 작사)
가을(현제명 작사)
나물 캐는 처녀(현제명 작사)
고향 생각(현제명 작사)
그 집 앞(이은상 작사)
니나(현제명 작사)
조선의 노래, 멕시코 소야곡,
산들바람(정인섭 작사)
산 위에 올라(이은상 작사)
새가 되어 배가 되어(이은상 작사)
새벽 종소리(현제명 작사)
성탄노래(현제명 작사)
소경 되어지이다(이은상 작사)
여름 저녁(현제명 작사)
오라(현제명 작사)
우리의 봄노래(현제명 작사)
이 마음(이은상 작사)
저녁별(현제명 작사)
적막한 가을(현제명 작사)
전원의 노래(현제명 작사)
진달래(이은상 작사)
황혼의 해변(현제명 작사)
희망의 나라로(현제명 작사)
뱃노래
동요
가을(백남석 작사)
단풍잎(김어초 작사)
물망초의 그늘(현제명 작사)
보건체조(정인섭 작사)
수노래(박남규 작사)
합창곡
물방아(남성4부합창곡)
어사와(혼성4부합창곡)
절름발이(남성합창곡)
군국가요(軍國歌謠)
가는 비(최남선 작사)
서울(최남선 작사)
전송(土生よねさく작사)
장성의 파수(최남선 작사)
후지산을 바라보며
작곡집
현제명작곡집(제1집, 동광사, 1931)
현제명작곡집(제2집, 동광사, 1933)
춘향전(을유문화사, 1958)
현제명작곡집(현제명기념사업회, 1970)
서울 수유동 현제명 묘
서울 수유동 현제명 묘비
테너 김화용 프로필
193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
함흥 영생 중학교, 함흥 제1고 졸업.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및
동 대학원 졸업(음악학 석사).
스페인 Musica en Compostela
국제 음악원 성악부
수석 diploma 취득
(스페인 정부초정 국비장학생)
김자경, 서수준, Ana Higueras 교수께 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