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농장으로
배낭을 풀어 가져간 곡차를 꺼냈더니 지인은 살림 공간에서 안주와 잔을 챙겨 나왔다. 안주는 동치미와 깻잎장아찌였다. 지인은 수 년 걸쳐 가을 김장채소를 심으면 동치미를 담아왔다. 무를 씻어 소금에 살짝 굴린단다. 통마늘과 풋고추가 들어가고 사과와 배도 넣는다고 했다. 물은 텃밭 지하 암반에서 뽑아 올린 지하수다. 이렇게 담근 동치미는 큰 항아리 세 개나 담다두었다고 했다.
지인 동치미는 그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 농장을 방문하는 이들이 즐겨 먹고 더러는 퍼 가기도 한다고 했다. 지인과 잔을 채우고 비우며 그간 밀린 안부와 세상 사는 얘기를 나누었다. 아른아른 투명한 동치미국물이 아주 시원했다. 간이 짭조름하게 밴 무도 식감이 아삭아삭하였다. 비가 오는 날이라 지인은 바깥일을 할 수 없어 무료하게 보낼 시간에 내가 찾아가 말벗이 되어주었다.
앞의 두 단락은 닷새 전 비가 오던 아침나절 지인 농장을 찾아갔던 이야기 일부다. 그날 아침 하루 종일 비가 예보되어 즐겨 가는 산행이나 산책은 마음을 접어야했다. 그래도 집안에 머물기는 시간이 아까워 북면 지인 농장을 찾아갔던 것이다. 나는 지난 가을 지인 농장에서 이런 저런 푸성귀들을 마련해 와 잘 먹었다. 겨울이라 농막 시렁에 걸어 말리는 무청 시래기정도 있을 뿐이다.
그날 지인과 세상 사는 얘기들을 나누다가 라면을 끓여 먹고 빗속에 우산을 받쳐 쓰고 농장을 빠져나왔다. 그때 지인은 허리 높이가 되는 커다란 항아리 뚜껑을 열어 동치미 무와 국물을 퍼 담아 주었다. 몇 해 동안 누적된 경험으로 담금 동치미인지라 그 맛이 일품이었다. 우리 집에서 그 동치미가 식탁에 올려 몇 끼 잘 먹고 있다. 양이 제법 되어 냉장고에 두고 한동안 먹을 참이다.
그로부터 며칠 지난다. 나는 상대에게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미다. 동치미를 얻어먹었으니 그 사례를 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딱히 뭐로 답례해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제 오일 장날인 지귀장터를 지나다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저기 파는 떡국용 떡을 사서 보내면 되겠다 싶었다. 지인이나 농장을 찾아온 이가 떡국으로 끓여 먹든 떡라면으로 끓여 먹든 어떻게 소비가 될 듯했다.
사실 겨울철이면 지인 농장 부엌 냉장고에 떡이 있었는데 내가 찾아간 그날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지귀장날 떡이 보여 사두었다. 마침 일월 넷째 주 월요일 아침나절은 겨울비가 살짝 지나간다는 예보였다. 나는 다른 곳으로 나갈 일 없이 그 떡을 배낭에 넣어 지인 농장으로 향했다. 현관을 나서면서 비가 와도 어디 떠날 행선지가 있음은 내가 지인에게 고마워해야 할 형편이었다.
하늘은 잔뜩 흐렸는데 빗방울은 듣지 않았다. 집 앞에서105번 버스를 타고 동정동에서 내려 농장으로 가는 녹색버스로 갈아탔다. 화천리에 들길을 지나 산모롱이를 돌아가다가 지인이 농장으로 트럭을 몰아가는 길에 나를 발견해 차를 세워 동반석에 앉았다. 지인은 비닐하우스를 열어 젖혀 놓고 묶어둔 개와 닭장의 닭을 돌보았다. 매실나무와 감나무들은 가지치기 작업을 끝내 놓았다.
지인은 농장에 키우는 짐승들 사료를 주고 배설물을 처리했다. 나는 배낭을 풀어놓고 금방 비가 오지 않을 듯해 일손을 거들기로 작정했다. 전정을 끝낸 감나무 그루 밑에 어지러이 널린 나뭇가지들을 치웠다. 낫으로 나뭇가지를 동여 다발로 만든 뒤 한 아름씩 안아 산언덕 아래로 옮겼다. 지인도 가축을 돌본 뒤 내가 하는 일을 거들었다. 잠바를 벗었는데도 땀이 살짝 흐를 정도였다.
감나무 그루 전정 작업 부산물을 치우고 비닐하우스로 들었다. 지인은 곡차와 안주를 마련해 놓았다. 나는 새참을 들 만한 땀은 흘렸다. 지인은 나에게 잔을 채워주고는 닭장이 닭을 풀어주었다. 그즈음 성근 빗방울이 들었다. 그래도 닭들은 농장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나는 곡차를 비우다가 부엌으로 가 찌개를 데워 점심까지 해결했다. 식후에 농장을 빠져나와 지개리까지 걸었다. 18.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