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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을 향해서 올라가니 벽에 한양 도성의 역사와
사계절풍광
안내표지판이 있었으나 일일히읽어 볼새도 없이 사진 몇컷담아서 저장하고 이동합니다
한양도성순성길을투아하면서 여려차례 같은사진을 등록한줄 압니다
하지만 또다시 공부 해보실래요
#한양도성의 역사
*역사를 품다
[ 강자육백척 (崗字六百尺) 각자성석 ]
남산 자유센터 건물 축대에서 ‘강자육백척’이라 새겨진 성돌이 발견되었다. 한양도성의 97개 구간 중 강(崗)자 구간 600척의 시작점이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이 각자성석의 원 위치는 알 수 없다. 자유센터를 지으면서 성벽을 헐어 그 석재를 축대 쌓는 데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 남산 회현 자락 한양도성 발굴 현장 ]
남산의 서북쪽 자락은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며 성벽을 헐어버린 구간이다. 2013년 발굴을 통해 땅에 묻혀있던 성벽의 일부(91m)를 발굴하였다. 태조 때 처음 쌓은 돌과 세종, 숙종 이후 보수하면서 쌓은 돌들이 켜켜이 모습을 드러내 한양도성 600년의 역사를 증언한다
(서울한양도성 홈페이지서 발췌 )
1396년 태조5년 처음으로 도성을 쌓다
조선의 심장, 한양도성
한양도성(사적 제 10호)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 도성이다. 성은 백악 · 인왕 · 목멱(남산) · 낙산을 연결하여 쌓았으며 전체 둘레는 18,127m이다. 태조는 지금의 서울인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년)에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여 한양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1396년 1월부터 시작한 축성공사에 동원된 인원 총 118,049명에 달하는데 이는 당시 총구인구의 4%에 육박하는 인원이었다.
태조 때는 성은 높고 험한 곳은 돌로 쌓고, 낮고 평탄한 곳은 흙으로 쌓아 석축과 토축이 뒤섞여 있었는데, 세종 대에 이르러 모두 석축으로 바꾸어 쌓았다. 한양성곽 안에는 조선시대 궁궐, 종묘, 사직 등의 왕실건물을 비롯하여 육조 등의 관청건물, 양반과 서민들의 주거지가 정해진 위치에 세워졌다. 출입시설인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국보 · 보물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 총 97구간으로 나누어 2개의 구간마다 관리 12명을 배치하여 감독하게 했으며, 1구간을 다시 6호로 나누어 책임을 분리시키는 등 세밀한 계획을 세워 공사를 진행했다. 첫 구간은 천자문의 ‘천(天)’으로 시작하여 97번째인 ‘적(吊)’으로 끝나고 있다.
(국립 중앙 과학 관 성곽 축조 과학관(다음백과)발췌
축조과학
성벽은 세종, 광해군, 숙종, 영조 대에 대대적으로 성벽을 고쳐 쌓았다. 세종 때에는 큰 돌로 아랫부분을 쌓고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게 쌓았다. 또한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숙종 때는 정사각형의 돌로 가지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을 이루었다. 이러한 축조기술은 지방의 읍성과 산성축조의 모범이 되었다.
한양도성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어,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600여 년간 조선왕조를 수호하던 한양도성은 개화기에 국력이 쇠퇴함에 따라 그 기능을 점차 상실해 갔으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람들의 지혜와 합리성으로 빚어낸 한양도성의 가치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우리나라의 심장으로써 자리매김 하고 있다. 현재에도 한양도성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물게 도성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11월 23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국립 중앙 과학 관 성곽 축조 과학관(다음백과)발췌
일제강정기의 수난 ,~~~~~~~~~수난의 시작
대강 대강 건성으로 읽어보고 이동합니다
오관수문 철거
혜화문루철거 ~~~~~~~~~그려고보니 헤화문 동대문 낙산구간 투어할때 공사를 하고있던생각이납니다
혜화문
광희문 루철거 ~~
한양도성의 야경 벽에 붙어있는 사진입니다
한양도성 멸실 구간
정비구간
아무튼 한양도성 성곽 거리를 전체를 발도장 남겼습니다
복원되어 이간 수문이 나타났다고합니다
그전에는 땅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사진으로 확인하셔요
하지만 동대문 운동장에 대강 겉모습만 보았습니다
발품을 팔면서 지리를 배우고 역사를 배우고 공부해서 남주나
발굴을 통해서 땅속에서 찿은 한양도성 사진을 찍을때는 몰랐는데 직접 현장답사
가까이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눈으로 보면서 중간 중간 휴대폰이 밧데리 고갈되어서
일일히 놓치기도 제폰은 오래된 6년된 구형이라서 분리형 밧데리
그래서 노후에서인지 금방 밧데리가 사진 몇컷담으면사라짐
하긴 분명히 제가 일행들보다 사진을 무작위로 많이 도 찍을것 입니다
성곽을 끼고서 엣날 모습인가요
한양도성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물게 도성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11월 23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서울 한양도성의 가치와의미
아무튼 전 한양도성 순성길 모두 종주 한데에 큰의의 느깁니다 ㅋㅋㅋㅋ
숙정문 창의문 구간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표찰 받아야가능
신분증 필히 지참해야 합니다
4계절 아름답기도하겠죠
한양도성 대한 설명서 한참동안 안내되어 적혀있었으나대강 이정도
제가 멈춘곳만 사진을 찍었을 것입니다
지금 현재서대문역
강북 삼성병원
서대문 (돈의문 소실 )
강북 삼성병원과 돈의문 박물관마을 맞은편에 표지석도 없이 표지문도 없이
길거리 작은 글씨로 적혀있어요 돈의문터는요
#돈의문터
그전에 서대문 (돈의 문 성곽길이었다고 합니다 )
그아래로는 홍난파 작곡가 집도 이정표로 본것같네요 ㅋㅋㅋ
서소문 (소의문 )소실
#이간 수문
을지로6가 18번지 청계천의 오간수문 바로 남쪽에 도성의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이다. 이 물길은 도성 밖에서 청계천 본류와 합류한다. 2개의 홍예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오간수문의 형태를 축소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서울 지명사전에서 발췌 )다음백과
#오간수문
오간수교 저는 이물줄기가 청계천 제가 늘 빛축제 때가보았던 곳인가 했는데
다리육교가 전혀아니란것을 깨달았습니다
역시 우물안 개구리 ~~~~~~~~~~~ㅋㅋㅋㅋ
청계천물줄기이긴 하나 그장소가 아니라는것을 이정표보고서 깨달았습니다 ㅋㅋㅋ
가는곳마다 초행길 많이 배우고 알게됩니다
오간수교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 즉 동대문에서 을지로5가로 가는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한성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된 5개의 구멍을 만들어 홍예교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홍예 위에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는 다섯 칸의 수문을 설치했다고 하여 오간수다리,오간수문 등으로 불렀으나 성종 12년(1481)까지만 해도 수문이 3개였고 후에 몇 차례 증축을 거쳐 5개의 수문으로 확장되었다. 이 수문은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나가거나 혹은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었다. 실제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典獄署를 부수고 도망갈 때에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다.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게 한다는 명목으로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리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하였다가 후에 그 위의 성곽이 훼손되면서 함께 없어졌다
(서울지명사전에서 발췌 )
돈의문 터 찿아서 3만리 ㅋㅋㅋㅋ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서대문(西大門)이라는 명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렀으며, 인근의 새문안로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유학1915년에 철거되었다
돈의문 터 간단한 설명서만 벽에붙어있었어요
돈의문 터 간단한 설명서만 벽에붙어있었어요
#돈의문은 한양도성 서쪽의문으로 흔히서대문이라고불린다
최초의돈의 문 1396년 태조5년에 8개으성문과 함께건설되었으나
1413년 (태종13년 새로지어진 서전문이 성문의기능을대신하였다
1422년 (세종 4년 )성문을 다시닫고 이지점에새로운문이세워졌다
이후새로운문이라는 뜻 새문 또는 신문이라고불렷다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유래
돈의문 일제 강점기 1915년3월 도로 확장 공사를 우해 철거되었다
이렇게 깨알같이 적혀있답니다
위치는 강북성심병원 도로 길가벽 조그맣게
바로옆에 길가에 붙어있어요
돈의 문 박물관마을 맞은편에요
무관심하면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도모르고 지나칠것 같아요
옆에두고도 모두무관심하게지나쳐도 모르죠
그련것이 어디있느냐는 답변 ,ㅋㅋㅋㅋ
제가 확대해서 사진찍은것 적어보았습니다 ㅋㅋㅋㅋㅋ
#돈의문은 한양도성 서쪽의문으로 흔히서대문이라고불린다
최초의돈의 문 1396년 태조5년에 8개으성문과 함께건설되었으나
1413년 (태종13년 새로지어진 서전문이 성문의기능을대신하였다
1422년 (세종 4년 )성문을 다시닫고 이지점에새로운문이세워졌다
이후새로운문이라는 뜻 새문 또는 신문이라고불렷다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유래
돈의문 일제 강점기 1915년3월 도로 확장 공사를 우해 철거되었다
이렇게 깨알같이 적혀있답니다
위치는 강북성심병원 도로 길가벽 조그맣게
바로옆에 길가에 붙어있어요
돈의 문 박물관마을 맞은편에요
무관심하면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도모르고 지나칠것 같아요
옆에두고도 모두무관심하게지나쳐도 모르죠
그련것이 어디있느냐는 답변 ,ㅋㅋㅋㅋ
자 구경은 잘하셨나요 시청역 9번출구에서
서소문터를 찿아서 출발해서 광희문 거쳐서 동대문까지
완전하게 종주했습니다
이해를 돕기위해서 여기는 일부는 등록 했습니다
다음편을 기대 해주셔요
*일행 3명
리딩해주신 대장님
함께해주신 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을 약속하겠습니다
2020년 2.13 남산 목멱구간을 다녀오나서
첫댓글 행복님 설명도 잘해주시고 친절하시니 그저 고맏고행복한
동행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항상 동행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거운 주말 되십시요 다음에도 기다리겠습니다
아무리생각을 거듭해봐도 행복이가
이렇게 큰일을 해내다니 놀라워요
그리고 멋져요 그리고 용감해써요
칭찬에 어디숨을 곳 없아 두리 번거립니다거운 주말 됫십시요 늘 안내지ㅏㄹ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현장에느낀이야기 어떤분에게 성곽 길문의하니 41년동안 살았는데끝이라냐
우물안 개구리 정확히 모르면 차라리
모르겠다고 하죠 본인이 다아는것처럼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산책이목적이지
모르면 잘 난척이나 하지말죠하 아무튼 여려사람들을 만나고 추억을 생각나게 합니다
춟발하기전에는 대강 정보를 검색하고 나서는데 그것은 빙산의 일각
직접 보고 방문 현장 에서 지리도 배우고
네네 대강검색해보고 가는 데 가면은 땅속에 2관문이 나오고 오간수문이 나오고 신기그자체였습니다
많이 배우고 익히게되어 기쁩니다
앉어서 다뵜네 고마워유
귀한 댓글 고맙습니다
저두요.고마워유!
귀한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