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관청 일에 어두운 선비
(卞先生九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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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때 사람
변구상(卞九祥)은
학문이 깊고 시와 문장을
잘 짓기로 이름났으나,
관청의 일을 처리하는 데는
매우 서툴렀다.
일찍이 그가 한성부(漢城府)의
참군(參軍)이 되어,
백성들의 송사(訟事)를
처리하는데
몹시 힘들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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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한 사람이
온갖 증거를 끌어대며
논쟁을 하면
그는,
"네 주장이 그럴 듯하니
맞는 것 같구나."
라고 대답하여,
그 말이 옳다고
동조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 상대자가
그렇지 않다고 우기면서,
또한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면 그 때 역시,
"그래, 네 말 또한
틀린 것 같지는 않구나."
라고 대답하여
그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니,
고소한 사람들은
원망을 하면서 아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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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참으로
국론을 결정하는 일이란
어려운 것이로다.“
분쟁에서 옳은 쪽과
그른 쪽이 분명히 있는데,
이를 밝히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니
사람들이 매우
답답해하면서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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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그가
동부 교관(敎官)으로
옮겨가게 되자,
기뻐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관청의 일을 처리하기란
심히 어렵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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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편 대작이나
책문(策文)과 논표(論表) 같은
글을 짓는 일이라면,
내 유창하게 잘할 수 있도다.“
변구상은 늘
합라[哈刺]1)에서 온
암말을 타고 다녔는데,
나이가 많은 이 말이
야위어 죽고 말았다.
1)합라[哈刺] : 원나라에 있던
'합라적(哈刺赤)' 마을을
줄여서 일컫는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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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는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어
애도하고 슬퍼했다.
"변 모(某)는 삼가 푸른 풀
한 묶음과 누런 콩 한 그릇에
흐린 물 한 그릇으로,
감히 합라 말의 신령에게
고하는 바입니다.“
이어서 그의 제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네 고기를 먹는 것은
내 반찬이 없어서이며,
네 가죽을 벗기는 것은
내 가죽신이 없기 때문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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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네 뼈를 땅속에
묻어 주는 것은 평소 네 공적을
갚기 위함이로다."
나중에 그는 수원 고을의
교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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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한 조관이
사신으로 수원 고을에 들러
끝도 없이 재물을 요구하니,
관장은 매우 힘들어했다.
마침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그 사신이
가죽신을 만들 소가죽을 요구하자,
옆에 앉아 있던 변구상이
갑자기 큰 소리로,
"그대 얼굴에
신을 만들 만한 아홉 마리
분량의 소가죽이 있구려."
라고 말하면서
그 뻔뻔스러움을 비꼬니,
.
사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더라 한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