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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있는 이슬람의 제1성지다. 전 세계의 이슬람 교도들은 메카를 향해 절을 하며 예배를 드린다고 알려져 있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메카에 있는 이 카바를 향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지은 신전으로서, 알라가 직접 건설을 지시했고 알라에게만 봉헌된 첫 신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고 카바 역시 우상들로 더럽혀졌다. 그렇게 우상들로 오염되었던 것을 무함마드가 다시 유일신 알라에게만 바쳐진 신전으로 되돌렸고, 지금까지도 무슬림 최고의 성지이자 생애 한 번은 반드시 순례해야하는 성스러운 장소로 남아있다. 매년 200~300만 명의 무슬림들이 전세계에서 이 곳으로 순례를 온다.
카바 신전 내부는 향로와 기둥 3개 정도를 빼면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이다. 워낙 신성시되는 장소라서 못 들어갈 것 같지만 사람들이 내부를 청소하려고 가끔씩 출입한다고 한다. 물론 아무나 청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왕족, 장군, 최고위 사제 등 사회지도층들이 청소를 도맡아서 하기 위해 들어간다. 이 곳을 청소하는 것마저도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 이곳이 너무나도 신성하기에 카바 일대를 포괄하는 거대한 건물군을 마스지드 알하람(مسجد الحرم)이라 부르는데, '하람(금기)일만큼 신성한 마스지드'라는 뜻이다.
헤지라
헤지라(아랍어: هِجْرَة)는 무함마드가 박해 때문에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이다. 이슬람교의 전설에 따르면, 622년 7월 16일 메카를 출발하여 9월 20일 메디나에 도착하는데, 그 출발일을 가리킨다.
'헤지라'라 함은 본래 혈연·지연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것이 뒤에는 종교적 이유에 의한 이동을 뜻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헤지라를 계기로 해서 메카에 있어서의 사적 신앙 단계를 벗어나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이것이 이슬람교의 역사적 전환점으로서 이슬람교 초기의 교도들에게 인식되어 뒤에 이슬람교 기원(紀元)의 출발점이 되었다(헤지라 기원 원년). 무함마드의 헤지라 때 메카의 이슬람 교도들도 집단적으로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었다(하로지룬). 이미 메디나측과는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집단을 받아들인다는 협정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메디나측으로서는 메카측과는 달리 다신교를 기초로 하는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수용하기가 쉬웠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에 반대한 사람들은 《쿠란》에서 '무나휘쿤'이라 하여 경멸적으로 불리고 있다. 반대 이유는 종교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정통 칼리프 시대
정통 칼리프 시대는 무함마드 사후(632년)부터 제4대 칼리프 알리까지, 4명의 칼리프가 선출된 이슬람 초기의 지도 체제(632~661년) 를 의미합니다.
주요 특징
선출 지도자 체제: 무함마드의 직접 제자 4명(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이 칼리프로 선출되어 정치와 종교를 겸임했습니다.
영토 확장: 이 시기 이슬람 제국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란 고원, 이집트, 메소포타니아 등 중동 대부분으로 급속히 팽창했습니다.
종파 분열의 시작: 칼리프 선출 방식과 후계자 문제로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통 칼리프 시대는 이슬람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짧지만 상징적인 시기로, 이후 우마이야 왕조로 이어집니다.
우마이야 왕조
우마이야 왕조 또는 우마이야 칼리파국(Umayyad Caliphate)은 정통 칼리파 시대에 이은 이슬람 제국의 두 번째 칼리파 시대로서, 최초의 세습 칼리파 왕조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전성기인 아브드 알 말리크 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에 바위의 돔을 건설했으며,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등 기존 로마 건축을 받아들인 건물을 각지에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역대 이슬람 제국 중 영역이 가장 넓었던 왕조였다. 서쪽으로는 현재의 포르투갈, 동쪽으로는 현재의 파키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다. 그러나 피정복민에 대한 강압적 통치와 아랍 우월주의로 인한 반발로 인해 왕조의 존속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마이야 왕조
우마이야 왕조(아랍어: بنو أمية)는 661년부터 750년까지 우마이야 칼리파국, 코르도바 토후국, 코르도바 칼리파국을 지배한 왕조이다. 우마이야 칼리파국이 멸망한 후에는 스페인의 코르도바 지역으로 이주해 코르도바 토후국을 형성하였으며, 이후 칼리파를 칭하며 코르도바 토후국이 코르도바 칼리파국으로 격상된 후에는 코르도바의 칼리파로써 코르도바 칼리파국을 지배하다 1031년 코르도바 칼리파국의 멸망과 함께 왕조가 단절되었다.
아바스 왕조
아바스 칼리파국(아랍어: الْخِلَافَة الْعَبَّاسِيَّة 알칼리파 알아바시야, 영어: Abbasid Caliphate) 혹은 아바스 왕조, 내지는 아바스 제국은 예언자 무함마드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세 번째 칼리파국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삼촌인 압바스 이븐 압둘 무탈립의 후손들이 왕조를 개창하였으며, 따라서 왕조의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750년 호라산 일대에서 아바스 혁명을 일으켜 우마이야 칼리파국을 무너뜨렸으며 오늘날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수도로 두고 대부분의 이슬람 영토를 통치했다. 곧 바그다드는 당대 과학, 문화, 발명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슬람에 황금 시대를 가져왔다. 이곳에는 지혜의 집을 포함한 여러 주요한 학술 기관들이 위치해 있었으며,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민족·다종교적인 배경의 여러 학자, 예술가, 문학가, 과학자들을 수용함으로써 "학문의 중심지"라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아바스 시대에는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고도화된 관료 체계가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바르마크 가문으로 대표되는 페르시아 관료들이 대거 등용되어 국가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이들이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차별에 들고 일어나 국가를 세웠던 만큼, 이 시기에 움마에서는 마왈리(비아랍계 무슬림)들의 비율이 점차 늘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8세기 후반을 전후로 하여, 아바스 왕조는 점차 마왈리와 페르시아 관료들을 소외시키기 시작했다.
아바스 칼리파들의 정치 권력은 945년과 1055년에 각각 바그다드를 점령한 이란의 부와이흐 왕조와 중앙아시아의 셀주크 제국에 가려져 급격히 감소했다. 비록 종교적인 부분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했던 제국의 영토는 날이 갈수록 축소되기 시작했다. 12세기 후반에 잠시 중흥기를 맞이하여 알무크타피 치하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지배권을 재확인하고 알나시르 치하에서 페르시아로 확장하기도 했으나, 마침내 1258년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 군대가 쳐들어오면서 끝장나게 되었다. 몽골군은 바그다드를 손쉽게 함락시키고 당시 아바스 칼리파였던 알무스타심을 처형시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때를 아바스 칼리파국의 멸망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명맥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고, 피신한 방계 친척들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맘루크 술탄에 의한 명목상의 칼리파로 즉위함으로써 왕조를 겨우 이어갈 수 있었다. 비록 정치적인 실권은 없었으머 술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1516년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마침내 1517년 오스만 술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한 뒤 마지막 아바스 칼리파 알무타왁킬 3세로부터 칼리파 직위를 계승함으로써, 기나긴 아바스 왕조의 역사가 끝을 맺었다.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 ― 아바스왕조
글 : 발머스한의원 ・ 2023. 3. 31. 10:48
초기 이슬람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 대해 관용적이었으며, 그들도 ‘《성서》의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존중해주었다. 문명을 약탈하고 파괴해 ‘반달리즘’이라는 용어까지 남긴 유럽의 야만족들과는 달리 아랍 유목민들은 선진 문명에 동화함으로써 대제국을 건설했다. 동서의 교차점을 장악한 중세 이슬람은 그리스 문명의 새로운 계승자가 되었고 이슬람 문명 중에서 특히 과학 분야는 800년에서 1300년 동안 중국과 나란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공학, 철학, 의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과학이론과 발명은 동과 서에서 이슬람세계로 유입되고 더욱 발전된 형태로 주변에 전해졌다.
우마미야 왕조를 타도하고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인 칼리파 자리를 차지한 아바스왕조는 과학 발전의 불을 붙였는데, 그 주인공은 수도 바그다드를 건설한 2대 칼리파 알 만수르(Abu Ja′far al-Mansur. 재위 기간 754~775년)였다. 그는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학자들의 고전 저작들을 포함하는 다수의 외국어 저서를 아랍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으며, 향후의 연구를 위한 지침을 마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외국 서적의 번역과 복사, 연구, 보관을 위해서 곤데샤푸르라는 일종의 종합대학을 건립했던 페르시아 군주들의 업적을 모방해 왕립도서관을 건립했다. 이 도서관은 학자들을 위한 공간 제공, 행정 지원, 재정 보조 업무를 관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후 7대 칼리프 알 마으문(al-Ma′mun. 재위기간 813~833년)이 830년에 세운 연구소이자 고등교육기관이었던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h. 지혜의 집)’의 기원이다. 심지어 번역한 책의 무게만큼의 황금을 학자에게 주었다는 일화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750년∼850년을 ‘번역의 세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알 만수르는 이슬람의 원조인 아라비아가 아닌 페르시아를 기반으로 하는 아바스왕조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고 다양한 종파를 통합하기 위해서 번역작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형 알 아민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알 마으문은 정통성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고 자신의 위대함과 제국의 도덕적 우위를 과시하기 위해 더욱 더 번역 사업에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아바스왕조 지배하에서 번역 운동은 놀랍게도 2세기 이상 원활하게 계속되었다. 이 운동은 사회 전반의 엘리트층, 즉 칼리파로부터 왕자·문관·군 지도자·상인·금융인·학자·과학자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되는 체계적으로 진향되었다. 번역 운동이 문헌학과 철학, 과학사 분야에 미친 영향은 물론이고, 당시에도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후원자들이 자금을 투자해 이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재정·농업·공학 사업이나 의학 분야에서 가져올 이익을 고려했거나, 또한 그러한 문화사업 후원을 통해 그들이 사회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이 강하다. 아마도 그 운동은 아바스왕조가 집권 초기에 과학지식의 확산을 통해 사회의 공공이익을 실현하고 보편적인 문화를 실현하려 했던 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의도는 어찌되었던 이런 체계적인 문화와 과학 진흥 사업으로 1100년 이전의 이슬람 세계의 과학자는 동시대의 유럽 과학자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문예부흥의 상징 ― 도서관과 마드라사
이 시기 아바스왕조에 대항해 스페인에 자리 잡은 후기 우마이야왕조 역시 칼리파를 자처하면서 그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 대대적인 과학과 교육, 문화 사업을 펼쳤다. 수도 코르도바에만 70곳의 도서관이 있었고, 그중 알 하캄 2세의 도서관은 구비된 장서가 40만 권이 넘었다.
바그다드에는 13세기에 30곳의 마드라사[학교]와 부속 도서관이 있었으며, 1500년의 다마스쿠스관측소 부속 도서관은 4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10세기 카이로에 있던 또 다른 지혜의 집Dar al-'ilm은 200만권을 소장했고, 그중 18,000권이 과학서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도서를 장르와 범주에 따라 분류하는 ‘도서목록’이라는 개념이 지혜의 집과 이슬람 도서관에 생겨났다고 한다.
중세 유럽의 도서관들은 이와 대조적으로 장서가 수백 권에 불과했고, 14세기 파리대학도서관조차도 장서가 2,000권에 불과했으며, 한 세기 후의 바티칸도서관도 그보다 몇 백 권 더 많은 수준이었다. 즉 유럽의 도서관에 있는 장서를 다 합쳐도 알 하캄 2세 도서관의 장서보다 한참 미치지 못했을 정도였다.
거대한 장서 수집은 그 비용을 부담한 칼리파와 부유한 후원자들의 의지 덕분에 가능했다. 당시 영향력 있던 바르마크 가문은 페르시아 문화의 복원과 보호를 장려했다. 그리고 8세기에 중국에서 종이 제작기술이 도입되어(제지 공정기술은 탈라스전투에서 포로가 된 중국인 기술자에 의해서 전해졌다.) 종이가 대량 생산되고, 기존의 양피지보다 책 가격이 훨씬 저렴해진 이유도 도서관 번창에 크게 기여했다. 751년 이후 사마르칸트, 793년에는 바그다드, 900년경에는 카이로, 1100년에는 모로코, 1150년에는 스페인에 각각 종이공장이 등장하면서 종이책을 파는 서점이 바그다드에만 100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마드라사는 교육시설을 가리키는 아랍어로 메드레세라고도 하는데 전통적으로는 울라마(이슬람 세계의 교사이자 학자, 판사. 유대 세계의 랍비와 유사하다)를 육성하기 위한 고등교육시설이다. 법학을 중심으로 꾸란학·하디스학·신학·언어학 등을 가르치지만 수학·과학·의학·철학 등 외래 학문도 교육했다. 마드라사는 이슬람 세계에 널리 퍼져 작은 마을에도 하나 이상, 대도시에서는 수십에서 100군데가 넘었었다. 마드라사는 대개 큰 모스크 그 자체였지만 또한 모스크의 부속시설인 경우도 있었다. 수업은 모스크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하지만 마드라사에 모스크가 부속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대규모의 마드라사는 수십 명의 교수에게 봉급을 지불하고 수백에서 천 명을 넘는 학생에게 장학금과 기숙사를 제공했는데 재원은 주로 와쿠프(기부된 토지)에 의지했고 권력자가 기부한 경우도 있었다. 또 학생은 한 곳의 마드라사에서만 공부하기보다는 스승을 찾아 다른 마드라사로 유학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울라마로서 인정받기까지는 10년에서 20년 정도나 걸렸다고 한다. 이슬람 세계에 보편적인 제도로서 마드라사가 탄생한 시기는 11세기부터인데, 셀주크왕조의 재상 니잠 알무르크가 건설한 니자미야 학원이 대표적이다. 마드라사와 지혜의 집은 모두 학술적인 역할을 맡았던 기관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마드라사는 모스크와도 연계되어 있으며 사학과 유사하게 운영되었다. 마드라사는 12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중세 대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기 우마이야 왕조
후기 우마이야 왕조는 756~1031년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다스린 우마이야 왕조의 후계 칼리파국으로,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았습니다.
성립과 정체성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가문을 숙청하자 왕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이베리아로 도주해 756년 코르도바를 수도로 왕조를 개창했습니다.
초기에는 ‘아미르’ 칭호를 쓰며 아바스 왕조를 자극하지 않으려 했고, 9세기 말부터 아랍어가 널리 통용되며 스페인-아랍 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전성기와 칼리파 선언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치세에 칼리파를 자칭해 이슬람 세계를 아바스·파티마와 함께 삼분했습니다.
974년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를 멸하고 알제리·튀니지까지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쇠퇴와 멸망
히샴 2세 이후 내부 분열과 쇠퇴가 시작되었고, 알 하지브 알 만수르의 노력도 임시방편에 그쳤습니다.
1031년 마지막 칼리파가 코르도바 근교에서만 통치했고, 이후 알안달루스는 무라비트 왕조에 의해 규합되기 전까지 분열을 반복했습니다.
사만왕조
사만왕조(819~999년)는 이슬람 아바스왕조로부터 영지를 하사받아 수도 부하라를 중심으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한 트란스옥시아나지역을 장악하고 독립하였다.
사만왕조는 호라산지역의 옛 페르시아계로 아프카니스탄과 트랜스옥시아나 등 중앙아시아로 영토를 확장하여 중앙아시아와 동투르키스탄(타람분지)의 이슬람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앞서 설명한 투르크계 카라한과 가즈나의 이슬람화도 사만왕조의 영향이었다.
사산조페르시아 때부터 명문가였던 사만조는 우마이야와 아바스왕조를 거치면서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를 포기하고 이슬람 수니파로 개종하였다.
페르시아의 자부심이 강했던 사만조가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낙후되었던 현재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 이란의 페르시아문화가 정착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중세 이란어 파흘라비어 대신 이란 언어를 아랍문자로 표기한 근세 페르시아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훗날 이지역을 장악한 몽골의 일한국이 호라산지역의 언어인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면서 현재 이란과 아프카니스탄, 타지키스탄 등에서 사용하는 페르시아 언어다.
부야 왕조
932년에 이란계의 시아파가 세운 이슬람 왕조. 945년에 바그다드로 들어가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옹호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이란과 이라크를 지배하였으나, 1055년에 터키계의 이슬람 왕조 셀주크 튀르크에게 멸망하였다.
가즈니 왕조
가즈니 왕조는 10세기~12세기 호라산, 아프가니스탄, 북인도에 근거를 둔 무슬림-투르크 왕조이다.
지역 :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국가 : 아프가니스탄, 이란, 인도
가즈니 왕조는 10세기 후반 사만 조의 투르크 노예병 집단에 의해 수립된 왕조로, 수도 이름인 가즈니('가즈나'라고도 한다)를 따서 가즈니 왕조라는 이름이 붙었다. 9세기~10세기 이후 압바스 칼리프 조와 지방 총독들은 군사적으로 우수한 투르크 노예병들이 많이 도입됐고, 이에 따라 부와이흐 조와 사만 조에도 군인으로 봉사하는 투르크 군사가 많이 있었다.
사만 조에서는 910년대 이후 투르크인 지휘관들이 나타나며 이들이 정치에 흔히 개입했고, 961년에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했다가 실패한 호라산 군 사령관 알프 티긴은 동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로 도주하여 현지에 있던 조를 쫓아내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가즈니 왕조의 기틀이 다져진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알프 티긴은 후손이 없었으므로 한동안 유력한 군사 실력자들 사이에서 권력이 계승되다가 세뷕티긴이 권좌에 오른 977년 이후 부자 계승이 이루어지는 왕조가 시작되었다. 세뷕티긴은 이식 쿨 호수 연안의 바르샨 지역 출신으로 카를루크 계통의 부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가즈니 왕조는 동 아프가니스탄의 자불리스탄 지역, 북동 발루치스탄의 쿠스다르 지역 등에 영토를 넓혔고, 토하리스탄과 자민다와르 등에도 종주권을 행사했으며, 인도에 원정을 시작했다. 또한 사만 조의 내정에 개입하기 시작해서 지방 반란을 대신 진압해주기도 했다. 997년 세뷕티긴이 사망한 후 작은 아들 이스마일이 일시적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큰아들 마흐무드가 이에 반기를 들어 998년 즉위했는데, 그는 가즈니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한 술탄이었다.
999년 카라한 조의 원정으로 사만 조가 멸망하게 되자 마흐무드는 사만 조의 영토를 카라한 조와 나눠 갖게 되었다. 마흐무드는 호라산을 영유하고 시스탄, 주즈잔, 호라즘 등을 장악했다. 그때까지 이교도로 남아 있던 구르 조를 장악하고자 했으나 성과가 빨리 나지 않았고, 인도 원정 17회의 큰 성공으로 이슬람권에 이름을 떨쳤으며 카라한 조보다 우위에 섰고, 이라크의 부와이흐 조와의 전쟁에도 승리했다.
마흐무드 사후 계승 분쟁 끝에 왕위에 오른 마스우드도 대단히 야심적인 군주였지만 인도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동방에서 넘어온 셀주크 왕조에 크게 패했고(단단칸 전투, 1040년) 곧 살해되었다. 그 후 가즈니 왕조는 계승 분쟁과 셀주크와의 전쟁 등으로 한동안 혼란기를 겪었으나 술탄 이브라힘(재위 : 1059년~1099년) 시기에 셀주크 조와 평화 관계를 반세기 동안 유지하고 결혼 동맹으로 그것을 더욱 단단히 했다.
그 후에도 계승 분쟁은 빈번했는데, 베흐람 샤(재위 : 1117년~1157년)는 셀주크의 호라산 군주였던 산자르의 원조를 얻어 즉위하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구르 조와의 외교 관계를 경색시켜 점점 강성해진 구르 조가 쳐들어와 가즈니 시를 파괴하고 약탈하는 사건(1150년)을 자초했다. 그 이후 가즈니 왕조는 약체화되어 구르 조에 의해 1186년 멸망하고 말았다.
가즈니 왕조는 10세기~12세기 이란, 호라산, 인도에 걸쳐 있었던 매우 성공적인 투르크 조로, 페르시아어를 행정 언어로 썼고 페르시아적 왕권 전통에 속하는 궁정 예법을 지켰다. 군주의 공식적인 칭호는 아미르였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술탄’으로 지칭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가즈니 왕조의 군주들은 문화를 향유하고 후원하는 것을 중요시하여 많은 시인들을 육성했으니, 마흐무드의 궁정에는 약 400인의 시인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유명한 시인과 저작으로 피르도시의 샤흐나메를 들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건물은 드물지만 건축 후원도 가즈니 왕조 군주들에 의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가즈니 왕조는 초창기부터 팽창 정책을 써서 항상 전쟁을 준비하는 국가였으며, 이에 따라 노예병과 투르크 부족 출신의 용병들이 많았다. 노예병은 약 4천 명~6천 명 수준으로, 주로 투르크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노예병 이외에도 다양한 출신의 군사가 더해져 경우에 따라서는 5만 명~10만 명의 전투 인력이 동원되기도 했다고 한다.
파티마 왕조
파티마 왕조는 909~1171년 북아프리카에서 이집트·시리아까지를 지배한 시아파 이스마일파 칼리파국으로, 12세기 아이유브 왕조에 멸망했습니다.
정체와 성립
파티마 왕조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혈통을 잇는 시아파 이스마일파(7이맘파)로, 아바스·후우마이야와 대립하며 이슬람 세계를 3분했습니다.
909년 압둘라 알 마흐디가 아글라브 왕조를 전복하고 튀니지에 왕조를 세웠으며, 921년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를 멸망시켜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969년 이집트를 정복해 카이로를 건설하고 수도를 옮겼습니다.
전성기와 확장
파티마 왕조는 마그레브, 시칠리아, 레반트, 헤자즈까지 통치하며 지중해·북아프리카 무역을 장악했습니다.
초기 종말론적 마흐디 사상을 멀리하고 세속 제국으로 변모하며 수니파 학자들을 포용했습니다.
쇠퇴와 멸망
1060년대 군 내부의 파벌주의로 내전이 장기화했고, 1070년대 셀주크의 시리아 침공과 1097년 십자군의 레반트 상륙으로 약화되었습니다. 1171년 마지막 칼리파 사망 후 살라딘이 칼리파 직위를 철폐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며 파티마 왕조는 멸망했습니다.
파티마 왕조와 셀주크 왕조
파티마 왕조와 셀주크 왕조는 모두 중세 이슬람 세계의 주요 왕조이지만, 종교·기원·영토·정치 체제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파티마 왕조와 셀주크 왕조의 주요 차이점
기원과 종교: 파티마 왕조는 이스마일 시아파(일파) 계통으로,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임을 내세워 시아파 칼리파국을 세웠습니다. 셀주크 왕조는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한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세운 몽골계 이슬람 제국입니다.
영토와 확장: 파티마 왕조는 909~1171년에 북아프리카, 이집트, 시칠리아, 레반트 등 넓은 지역을 통치했으며, 이집트 카이로를 수도로 삼았습니다. 셀주크 왕조는 11~12세기 이란, 이라크, 시리아, 소아시아(아나톨리아)까지 확장해 동로마 제국과 경쟁했습니다.
정치 체제와 영향: 파티마 왕조는 시아파 중심의 칼리파국이었으며, 이슬람 내 소수파의 정체성과 문화를 강화했습니다. 셀주크 왕조는 술탄(군주)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와 이슬람 법(샤리아)의 체계화, 수피즘 등 종교·문화적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흐름 정리
파티마 왕조는 시아파 칼리파국으로 시아파 정체성과 문화를 중시했고, 셀주크 왕조는 튀르크계 술탄국으로 이슬람 법과 중앙집권적 통치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두 왕조는 시기, 기원과 영토, 정치 체제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셀주크 제국
1043년부터 1194년까지 존속한 이슬람 제국.
셀주크 가문은 유목민 출신으로 10세기경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진출해 호라산 일대로 내려왔고, 토그릴 아래에서 가즈니 왕조, 부와이흐 왕조 등을 꺾고 페르시아 세계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곧이어 바그다드를 정복한 셀주크 제국은 아바스 칼리파를 손에 넣고 꼭두각시로 휘두르며 100년 넘게 분열되어 있던 수니파 이슬람 세계를 통일했다. 토그릴의 후계자 알프 아르슬란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궤멸하고 황제를 생포한 업적을 남겼으며, 말리크샤는 저아래 메카와 예멘까지 진출하며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 비견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말리크샤 사후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최후의 강력한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가 1141년 카트완 전투에서 서요에게 대패하며 본격적으로 붕괴했다. 10년 뒤에 아흐마드 산자르가 또 휘하 장군들의 배신으로 오구즈족에게 또 사로잡혀 포로로 전락하자 술탄의 권위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셀주크 제국은 지방 총독들이 독립하고 장기 왕조, 아이유브 왕조, 호라즘 왕조 등이 성장하면서 인근 강대국들에 치여사는 신세로 전락했다. 결국 1176년 마지막 술탄 토그릴 3세가 호라즘 왕조에게 패배하며 158년 만에 멸망한다.
한때 동부 이슬람 세계를 통일했던 제국답게 제1차와 제2차 십자군 전쟁에서 핵심 역할을 했으며 1000년대의 전성기에는 혼합된 튀르크-페르시아 문화의 꽃을 피웠다. 오마르 하이얌이나 알가잘리 같은 이슬람 대학자들이 활동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지배 계급은 튀르크계 부족이었지만 정치 체제는 페르시아식을 지향했으며, 궁정과 관료의 언어로도 페르시아어를 사용했다.
훗날 오스만 제국의 전신 격인 룸 술탄국과 아나톨리아 베이국의 본가(本家)로 튀르크인들이 동로마 제국을 쫒아내고 아나톨리아 반도에 세력을 굳히기 시작한 것도 이 셀주크 제국 때의 일이었다.
룸 셀주트
룸 술탄국은 오늘날 튀르키예가 소재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1077년 ~ 1308년 존속한 이슬람 왕조이다. 룸(روم)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로마라는 뜻으로, 동로마 제국의 핵심 영역이었던 아나톨리아에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지방 이름과 나라 이름을 그대로 룸이라고 하였다.
이란의 셀주크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왕족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룸 셀주크라고도 하며, 본가 셀주크 왕조와 마찬가지로 튀르크계 유목민이 시초이지만,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현대 튀르키예어로는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일족의 왕국이라는 의미의 아나돌루 셀추클루 데블레티(Anadolu Selçuklu Devleti)나 룸 술탄국(Rum Sultanlığı), 튀르키예에서의 셀주크 왕조 시대라는 뜻의 튀르키예 셀축룰라르(Türkiye Selçukluları) 등이 쓰인다.
장기 왕조
장기 왕조는 12세기 중동에 등장한 투르크계 무슬림 왕조로,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1127~1222년(일부 자료는 1250년까지) 존속한 국가입니다.
창건과 역사적 배경
창시자 이마드 앗딘 장기가 셀주크 제국의 모술 총독으로 출발해, 십자군 세력을 격파하며 명성을 얻었고, 1128년 알레포를, 1144년 에데사 백국을, 1154년 다마스커스를 차례로 정복해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십자군과의 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무슬림 세계에서는 영웅적 인물로 평가받았습니다.
주요 특징
투르크계 왕조로, 시리아·이라크·다마스커스 등지에서 활동했습니다.
누르 앗 딘이 전성기를 이끌며, 안티오키아 등 십자군 영토를 공격해 무슬림 단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분열과 멸망: 장기의 사후 영토가 분할되어, 모술·이라크는 장자의 손에, 알레포·에데사는 차자의 손에 넘어갔으나, 이후 점차 쇠퇴해 13세기 초 소멸했습니다.
장기 왕조는 십자군과의 전투, 무슬림 단결, 투르크계 세력의 대표적 왕조로, 중동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아유브 왕조
이슬람력 : 564∼658 / 서양력 : 1169∼1260
이집트와 시리아에 창립된 순니 왕조. 쿠르드족 출신인 쌀라흐 알 딘(Ṣalāḥ al-Dīn, 유럽명 Saladin)이 이집트의 파띠마조를 없애고 566/1171년 아유브조를 열었다. 그는 시아파가 지배하던 이집트를 다시 정통파인 순니로 돌려놓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세력을 떨쳤다. 더욱이 583/1187년에는 십자군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회복함으로써 유럽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쌀라흐 알 딘이 죽은 후 아유브조는 내분을 거듭하다가 650/1252년 맘룩조에게 멸망당하고, 시리아의 아유브조는 658/1260년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호라즘 왕조
호라즘 제국(페르시아어: خوارزمشاهیان)은 아무다리야강(江) 하류 유역, 지금의 히바에 있었던 튀르크계 국가(1077년~1231년)이다. 아라비아인은 후와리즘이라 불렀다.
셀주크 왕조의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부장(部將) 아누시티긴이 이 땅에 왕이 되었고 아들 쿠트브 웃딘 무함마드(재위 1097~1127)는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에서 독립하여 우르겐치(그 당시에는 코네우르겐치)를 수도로 하였다. 이란,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여 영토를 크게 넓혔다. 알라 웃딘 무함마드(재위 1200년 - 1220년)는 만주에서 온 카라키타이를 정복하고 튀르크 도시인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동서 무역을 독점하여 번영했다.
역사
호라즘 왕조의 건국 시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017년, 반란 기간 동안 호라즘 반란군은 아불 압바스 마문(Abu'l-Abbas Ma'mun)과 그 아내이자 가즈니 왕조(Ghaznavid dynasty) 술탄 마흐무드(Mahmud)의 여형제 후라지(Hurra-ji)를 죽였다. 이에 대하여 마흐무드는 화레즘 지역을 침략하여 점령하였고, 나사(Nasa), 그리고 파라와(Farawa)의 리바트(ribat, 이슬람 수피파 수도 공간)도 포함되었다. 그 결과, 1017~1034년 동안 호라즘은 가즈나 왕조의 한 주(province)가 되었다. 1042년 혹은 1043년부터는 셀주크인들이 화레즘주의 총독직을 장악했다. 1077년, 전 셀주크 술탄의 튀르크 노예 아누쉬 티긴 가르차이(Anush Tigin Gharchai)가 호라즘 주 총독직을 장악했다. 1141년, 셀주크 술탄 아흐메드 산자르(Ahmed Sanjar)는 카트완 전투(Battle of Qatwan)에서 카라 키타이(Qara Khitai) 혹은 서요(西遼)에게 패배했다. 아누쉬 티긴의 손자 알라 앗딘 앗시즈(Ala ad-Din Atsiz)는 서요 덕종(德宗) 무열제(武烈帝) 야율대석(耶律大石)의 신하가 되었다.
1156년, 아흐메드 산자르는 사망했다. 셀주크가 혼란에 빠지면서, 호라즘 샤(Khwarezm-Shah)들은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1194년, 셀주크 대제국 마지막 술탄 토그룰 3세(Toghrul III)는 호라즘 군주이자 호라산(Khorasan) 일부와 이란 서부를 정복한 알라 앗딘 테키쉬(Ala ad-Din Tekish)에게 패배하고 살해당하였다. 1200년, 테키쉬는 사망했고 아들 알라 앗딘 무함마드(Ala ad-Din Muhammad)가 호라즘 군주가 되었으니 이가 바로 무함마드 2세(Muhammad II of Khwarezm)였다. 그는 고르 왕조(Ghurid dynasty, 혹은 구리드 왕조)와의 충돌을 야기했고, 1204년 아무 다리야(Amu Darya)에서 패배했다. 호라즘의 약탈에 이어, 무함마드2세는 자신의 종주국인 서요로부터 도움을 요청했고, 서요는 군대를 파견했다. 1204년, 군대를 보강한 무함마드2세는 헤자라스프(Hezarasp)에서 고르 왕조에게 승리를 가뒀고, 호라즘 밖으로 이들을 쫓아냈다.
서요와 무함마드2세의 동맹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무함마드2세는 다시 충돌을 야기했다. 1210년, 무하마드2세는 카라한 칸국(Kara-Khanid)의 도움을 받고 탈라스(Talas)에서 서요의 군대를 무찔렀다. 그리고 1215년에는 고르 왕조를 무찔렀다. 이에 앞서 1212년, 무함마드2세는 구르간즈(Gurganj)에서 사마르칸트(Samarkand)로 천도했다. 이로 인해 트란속사니아(Transoxania) 전역 대부분과 오늘날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을 합병했다. 1217년까지는 서 페르시아 정복에 나섰고, 이후에는 시르 다리아(Syr Darya)에서 자그로스산맥(Zagros Mountains)으로 확장했으며, 힌두쿠쉬(Hindu Kush) 북변에서 카스피해(Caspian Sea)로 확장했다. 1218년, 제국의 인구는 500만에 달하였다.
몽골과의 충돌과 멸망
1218년 오트라르에서 몽골 상단이 학살되자 칭기즈 칸은 사신을 보냈고, 무함마드 2세는 사신 일부를 처형·모욕해 전쟁이 촉발되었다.
1220년 칭기즈 칸은 대군을 4개 진영으로 나누어 부하라·오트라르·사마르칸트 등을 공략했고, 호라즘은 분산된 병력으로 참패했다.
몽골군은 오트라르를 함락하고 이날추크를 처형했으며, 부하라·사마르칸트 등 주요 도시를 파괴했다.
호라즘은 멸망했고, 튀르크 귀족들은 몽골 귀족에 편입되어 유럽·중동 침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몽골제국의 중동 진출
몽골제국은 13세기 후반 훌라구 칸의 지휘 아래 중동 지역까지 진출해 바그다드를 함락시키는 등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동 진출의 배경과 과정
몽골제국은 중국 북부와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뒤, 교역로 확보와 전략적 이익 추구를 위해 중동 원정에 나섰습니다.
1258년 훌라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였던 바그다드를 단 며칠 만에 함락하며, 이슬람 문명에 큰 충격을 남겼습니다.
영향과 결과
바그다드의 파괴와 약탈은 중동 문명의 흐름을 크게 바꾸었고, 이후 일칸국이 세워져 몽골의 영향 아래 이슬람 세계가 재편되었습니다.
몽골의 군사력과 기동성, 정보력은 당시 이슬람 왕조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동서 교역과 문화 교류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몽골제국의 중동 진출은 단순한 정복을 넘어, 중동 문명과 세계사에 깊은 영향을 남긴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나스르 왕조
나스르 왕조는 1232~1492년 이베리아반도의 최후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토후국을 지배한 왕조입니다.
개요
아랍계 나스르족 무하마드가 창건했으며, 수도 그라나다는 알람브라와 그라나다 학원을 중심으로 학문과 예술이 번성했습니다.
13세기에는 시에라 네바다와 알메리아 해안에 둘러싸인 좁은 영토로 축소되었습니다.
역사
1469년 아라곤·카스티야 합병은 치명타였고, 최후의 술탄 무하마드 12세는 1492년 모로코로 망명하며 21대 만에 멸망했습니다.
나스르 왕조는 1230년대 무함마드 1세가 카스티야에 신속을 조건으로 그라나다에 아미르국을 세우며 시작되었습니다.
14세기 후반에는 평화를 유지하며 번성했고, 15세기 초 카스티야와의 대립이 재개되었습니다.
1462년 카스티야의 공세에 맞서 시에라 네바다 산악에 성채를 쌓고 게릴라전을 펼치는 수성 전략을 택했습니다.
유산
알함브라는 나스르 왕조의 상징적 왕궁으로, 1492년 함락 후에도 예술성과 가치로 보존되었습니다.
알바이신 지구는 나스르 왕조 시절 번성한 이슬람풍 마을로,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맘루크 왕조
맘루크 왕조는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한 이슬람 제국으로, 노예 출신의 맘루크들이 아이유브 왕조를 뒤엎고 세운 왕조입니다.
기원과 성립
맘루크는 아랍어로 ‘소유된 자’를 뜻하는 노예 군인으로, 9세기부터 중앙아시아·캅카스 출신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군사 훈련을 시킨 정예 부대였습니다.
1250년 맘루크 장군 이주틴 아이벡이 이집트에서 정권을 탈취해 아이유브 왕조를 멸망시키고 맘루크 왕조를 수립했습니다.
전성기와 번영
바이바르스와 칼라운의 통치 하에 시리아를 통일하고, 1310년 즉위한 앗 나시르 무함마드 치세에는 중계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습니다.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해 서진 팽창을 저지했습니다.
쇠퇴와 멸망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사후 권력 투쟁과 흑사병으로 쇠퇴했고, 15세기 후반 카이트베이의 안정적 통치로 중흥기를 맞았으나 16세기 포르투갈의 인도양 무역 잠식으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516년 오스만 제국 셀림 1세에게 정복당해 멸망했습니다.
정치와 문화
술탄은 최고 통치권자였고, 지방은 총독이 통치했으며 하마에서는 아이유브 후예들이 다스렸습니다.
맘루크 왕조는 아랍어와 아랍 문화를 보존·발전시킨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일 칸국
칭기즈 칸 사후 몽골 제국의 분열 때 갈라져 나온 4개의 울루스 가운데 하나로서, 1258년 훌라구의 서아시아 정복과 함께 페르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였다. 최전성기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 고원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아무다리야까지, 북쪽으로는 캅카스 산맥에서부터 남쪽으로는 페르시아만에까지 이르렀다. 이전까지 중동에 있었던 아바스 왕조와 장기 왕조, 니자리 이맘국 등을 잇달아 물리치고, 더 나아가 룸 술탄국마저 패퇴시킨 뒤에 시리아까지 남진했으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게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해 가로막히면서 그 이상의 팽창은 하지 못했다.
존속 기간 내내 북쪽의 킵차크 칸국과 분쟁을 일으켜 자주 대립했고, 킵차크 칸국이 맘루크 왕조와 동맹을 맺자 이에 대항하여 동로마 제국 및 서방 세계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모색하기도 했다. 1295년 명군인 가잔 칸을 시작으로 일 칸국 역시 차츰 이슬람화했으나 서방과의 동맹 시도는 지속되었다. 이후 1330년대에 들어 흑사병이 중동 전역을 휩쓸면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마지막 군주였던 아부 사이드 칸이 1335년에 사망한 후 일 칸국은 각지의 토후들과 지방 세력들로 분열되며 사실상 해체되었다.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잘라이르 왕조 및 추판 왕조와 같은 후계 국가들의 꼭두각시로서 14세기 중반까지 존속했으며, 이는 14세기 말엽 차가타이 계통의 칸을 내세운 티무르가 쳐들어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티무르 제국
티무르 제국은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까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아우른 이슬람 왕조로,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아 ‘티무르 르네상스’를 꽃피웠습니다.
건국과 확장
티무르는 몽골 바를라스 출신으로 칭기즈 칸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1370~1405년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북인도까지 제국을 확장했습니다. 1398년 델리를 함락하고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바예지트를 격파했습니다.
전성기와 문화
샤 루흐와 울루그 베그 치세에는 헤라트와 사마르칸트가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습니다.
사마르칸트는 국제적 대시장으로 번성했습니다.
쇠퇴와 멸망
1467년까지 페르시아 영토 대부분을 카라 코윤루·아크 코윤루에 빼앗겼고, 15세기 말 우즈베크의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1505년 사마르칸트, 1507년 헤라트를 함락시켜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계승과 유산
티무르 왕조의 일원 바부르는 카불을 거점으로 북인도를 정복해 무굴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티무르 제국은 페르시아·중앙아시아의 티무르 제국과 인도 아대륙의 무굴 제국으로 이어졌습니다.
비잔티움 제국
비잔티움 제국은 395년부터 1453년까지 존속한 로마 제국의 동방 관할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습니다.
개요
제국의 공식 국호는 로마 제국이었고 주민들은 자국을 로마니아라 불렀습니다. 비잔티움·동로마·비잔틴은 현대의 관습적 별칭입니다.
동서 분할은 통치권 분할로, 395년 이후에도 로마 제국의 연속으로 보기도 합니다.
역사
476년 서로마 멸망 후에도 동부는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 존속했습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으로 일시 멸망했다가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수도를 수복했습니다.
정체성과 문화
주민 다수는 그리스어를 썼고, 헬레니즘·오리엔트 문명이 혼합된 비잔티움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꼽혔습니다.
건축
성 소피아 대성당은 537년 완공된 상징적 건축물로, 돔 구조와 모자이크로 유명합니다.
오스만 제국
숭고한 오스만국(오스만 튀르크어: دولت عليه عثمانيه 데블레티 알리예이 오스마니예, 영어: Sublime Ottoman State) 또는 오스만 제국, 튀르키예 제국(영어: Turkish Empire), 오스만 튀르키예, 혹은 단순히 튀르키예는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통치하던 광대한 제국이다.
13세기 말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 북서부에서 건국했으며, 1354년에 유럽으로 건너가 발칸반도를 정복하고 세 대륙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하며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1517년부터는 이슬람의 통솔자를 의미하는 칼리프국을 겸했다.
오스만 제국은 쉴레이만 1세의 통치기에 절정기를 맞았고, 사회적, 행정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당대 최고의 국가로 떠올랐다. 그 강역이 가장 넓었던 17세기 초에는 32개 지방으로 구분되었고, 수없이 많은 봉신국을 거느렸다. 이후 봉신국 중 일부는 오스만 제국에 흡수되고, 일부는 자치권을 허가받아 수백 년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현재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지중해 주변 지역 대부분을 통치했던 오스만 제국은 무려 6세기 동안 동방과 서방의 교차점으로 기능하며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일부 학계에서는 쉴레이만 1세 사후, 제국이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하지만, 학자들 대부분은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쉴레이만 사후에도 제국은 여전히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17세기와 18세기 대부분 동안 전성기의 국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다만 지나치게 오랜 평화기로 인해, 18세기 말에 이르자 오스만의 군사력은 점차 방만해졌고, 경쟁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서구 열강들에게 연전연패하며 그 부실한 체력이 폭로되었고, 유럽의 환자라고 평가받았다. 이에 따라 제국을 탈바꿈 하기 위해 탄지마트라 불리는 개혁 정책을 시행하여 19세기 내내 영토가 점차 축소되면서도, 특히 발칸 지역 등에서는 통치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1908년에는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나 제국의 황제에게 헌법을 인정하고 입헌군주정을 선포할 것을 강제했고, 5년 후 급진파 장교들이 주축이 된 통일진보위원회가 쿠데타를 일으켜 일당 독재 체제를 선포했다. 통일진보위원회가 결성한 통일진보당은 독일 제국 편에 서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 과정에서 내부 결속을 위해 애쓰던 오스만 제국은 아랍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의 싹을 잘라 버리기 위해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그리스인을 상대로 대량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후 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과 동맹국이 패배하자, 오스만 제국은 중동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고, 이 영토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넘어갔다. 이후 현 튀르키예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가 등장해 혼란스러운 국정을 다잡고 오스만 제정을 폐지한 후 현재의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국했다.
사파비 왕조
근세 이란을 지배한 시아파 왕조. 현대 이란의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틀을 확립하며 이란 역사에 큰 영향을 남겼다. 쿠르드계 아제르바이잔인들에 의해 건국되었으나 페르시아의 정체성을 강조했으며,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651년 아랍인들에게 멸망당한 이후 850년 만에 다시 부활한 이란인 주도의 통일 페르시아 제국이라 할 수 있다.
사파비 제국은 1501년 시아파 종교단체 사파비야의 지도자이던 이스마일 1세가 건국했다. 이스마일 1세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수백 년 동안 조각조각 나뉘어있던 페르시아 지방을 통일하고 거대한 제국을 이룩한다. 이스마일 1세는 옛 페르시아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원대한 야망이 있었지만 1514년 찰디란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대패하며 그 꿈을 접어야만 했다. 이후 타흐마스프 1세가 찰디란 전투의 패배로 인한 혼란을 수습했고, 사파비 제국은 아바스 1세의 재위기에 최전성기를 맞았다. 이때 사파비 제국은 현대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바레인,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튀르키예 등에 걸쳐있는 대제국이었고, 강대한 국력을 바탕으로 찬란한 페르시아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몇 백년 만에 페르시아 지방을 재통일한 덕에 경제는 크게 발전했으며, 실크 로드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진행하여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고 동시에 최대의 경쟁국인 오스만 제국과 끝없이 대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파비 제국은 아바스 1세 사후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를 이은 황제들은 대부분이 무능하고 정무에 관심이 없는 인물들이었으며 외적으로는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끊임없이 치고 들어왔다. 결정적으로 사파비 제국의 혹독한 종교 정책에 반감을 품은 아프가니스탄계 호타키 왕조가 반란을 일으켜 1722년 수도 이스파한을 함락당하며 치명타를 맞는다. 당시 샤였던 술탄 후사인은 호타키 왕조에게 항복했지만 그가 다시 정통성을 내세워 변심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호타키 왕조의 아흐마드 파샤에게 살해당했다. 그나마 타흐마스프 왕자가 도망쳐 타흐마스프 2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한 후, 전쟁 영웅 나디르 샤의 도움을 받아 이스파한과 제국 강역 대부분을 되찾는 데 성공하며 다시 제국이 부활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나디르 샤를 질투한 타흐마스프 2세는 독단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일으켜 기껏 나디르 샤가 되찾은 영토들을 모조리 빼앗겼고, 이에 격분한 나디르 샤는 타흐마스프 2세를 폐위하고 어린 아바스 3세를 꼭두각시로 옹립했다. 결국 1736년 나디르 샤가 아바스 3세를 쫓아내고 직접 샤의 자리에 올라 아프샤르 왕조를 개창하며 사파비 제국의 역사도 끝난다.
최대 경쟁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에 비하면 국력이 약했다. 사파비 제국은 서쪽으로는 오스만 제국, 동쪽으로는 우즈벡 계열 투르크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으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오스만에 열세에 놓여 있었고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도 고전하고 있었다. 지도상에 사파비의 영토로 표시된 아나톨리아 동부는 2년 정도 일시적으로 점유한 것에 불과하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사파비의 영토였던 시기보다 오스만이 점유했던 시기가 더 길었기 때문에 사파비보다는 오스만의 영토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뿐만 아니라 사파비의 첫 수도였던 타브리즈를 비롯한 아제리 지역도 주기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했고, 서쪽 이란 고원을 오스만이 상당기간 점유하는 치욕을 맛보기도 했다. 우즈벡과 계속 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쪽 역시 마찬가지로 많은 부침을 겪었는데 아프가니스탄의 상당부분을 우즈벡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 시절을 제외한 평균적 영토는 역대 이란 왕조 중에서 넓은 편은 못된다. 특히나 아케메니스 왕조의 바빌로니아 정복 이후 아바스 왕조 등의 비이란계 민족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도 사실상 페르시아 문화권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이 문화권적으로도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시점도 사파비 제국의 시절이며, 이 때 상실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지금은 이라크라는 국호로 아랍 권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다만 오스만 제국에게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밀리긴 했어도 오스만 제국 역시 결정적으로 사파비 왕조를 멸망시키거나 하지는 못한 채 긴 시간 동안 힘겨루기를 이어나가야 했고 이는 사파비 왕조가 멸망하고 세워진 아프샤르 왕조, 잔드 왕조, 카자르 왕조와의 대립으로 계속 이어진다.
델리 술탄국
델리를 중심으로 북인도를 통치하던 이슬람 술탄국.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단일 왕통이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5개에 달하는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 사이드 왕조, 로디 왕조 등 튀르크계 혹은 아프간계 무슬림 왕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남인도의 힌두교 왕국들과 대립하며 중세 인도 역사의 대미를 장식했고, 노예 왕조 시기 건립된 쿠트브 미나르 등 뛰어난 건축물들로 유명하다.
델리 술탄국의 첫 왕조인 노예 왕조는 1206년 북인도를 평정한 고르 왕조를 꺾고 등장했다. 노예 왕조는 술탄 일투트미쉬의 재위기에 남방을 정벌하고 북인도 대부분을 정복하면서 전성기를 찍었으나, 일투트미쉬 사후 급격히 무너지면서 결국 1290년 할지족이 세운 할지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할지 왕조는 술탄 잘랄웃딘, 술탄 알랄웃딘의 통치하에서 몽골 제국의 침입을 막아내고 남부의 호이살라 왕국, 카카티야 왕조, 판디아 왕국 등을 멸망시켰다. 특히 개혁적인 면모가 강했던 술탄 알라웃딘은 몽골인 대학살, 금주령, 도박 금지, 마리화나 금지 등 수많은 정책들을 발표하며 사회적 대격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할지 왕조 역시 술탄 알라웃딘 사후 빠르게 붕괴했다. 할지 왕조의 신하들은 가지 말리크를 새로운 델리의 술탄으로 추대했고, 이로인해 투글루크 왕조가 열렸다.
델리 술탄국의 세 번째 왕조인 투글루크 왕조는 델리 술탄국의 역사상 최대 강역을 달성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투글루크 왕조의 제2대 술탄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는 수도를 남쪽으로 천도하면서까지 남인도의 소왕국들 정복에 열을 올렸고, 덕분에 델리 술탄국은 인도 최남단의 카르나타카까지 진출해 정복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투글루크 왕조 역시 술탄 무함마드 사후 서서히 쇠퇴했고, 내전과 재앙이 겹쳐 일어나면서 투글루크 왕조는 이전의 성세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했다. 쇠퇴한 투글루크 왕조의 목숨을 끊은 것은 바로 정복군주 티무르였다. 1398년 티무르는 델리를 침공, 8일 밤낮으로 델리를 약탈하고 초토화시키면서 투글루크 왕조를 반신불수로 만들어버렸다. 안그래도 망해가던 투글루크 왕조는 티무르의 침공 이후 완전히 끝장났고, 이후 티무르의 신하를 자처한 키즈르 칸이 투글루크 왕조를 무너뜨리고 1414년 사이이드 왕조를 개창했다.
티무르의 봉신국을 자처한 사이이드 왕조 시기의 델리 술탄국은 5개의 왕조들 중 제일 약한 국력을 지녔던 왕조로, 존속 기간 내내 위태롭게 혼란하였다. 키즈르 칸과 그 후계자 무바라크 샤는 델리 술탄국이 잃어버린 고토를 되찾기 위해 발버둥쳤으나 옛 투글루크 왕조 시절의 넓은 영토를 수복하는 것은 영 무리였다. 무바라크 샤 사후 허수아비 술탄들이 즉위하며 사이이드 왕조는 날로 약해졌다.
결국 최후의 술탄인 알람 샤가 펀자브의 유력 귀족인 로디족 출신의 바흐룰 로디에게 양위하면서 델리 술탄국 마지막 왕조인 로디 왕조가 등장했다. 바흐룰 로디의 아들이자 제2대 술탄인 시칸다르 로디는 괄리오르 지방 정벌, 1504년 아그라 건설, 경제 개혁, 왕권 강화, 예술 장려 등 여러 정책들을 펴나가며 로디 왕조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시칸다르 로디 사후 즉위한 이브라힘 샤는 아버지와 달리 천상 무인이었기에 통치자로서는 자질이 부족했다. 결국 이브라힘 샤에 반발한 귀족들이 카불의 왕이었던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답한 바부르가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이브라힘 샤를 꺾으면서 델리 술탄국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델리 술탄국 멸망 이후 북인도에는 무굴 제국이 들어섰다.
무굴 제국
무굴 제국은 근세 남아시아에 존재했던 이슬람 제국이다. 전성기에는 인도 아대륙의 서북부인 인더스강 유역과 중남부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카슈미르를 지나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아삼주 및 방글라데시 저지대까지, 남쪽으로는 남인도의 데칸고원까지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통치하였다.
무굴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군벌이었던 바부르가, 이웃한 사파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도움을 받아 1526년 파니파트 제1차 전투에서 델리 술탄국의 술탄 이브라힘 로디를 격파하고 북인도 평원을 장악하며 건국되었다.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시기부터 시작된 제국의 전성기는 마지막 위대한 황제였던 아우랑제브가 사망한 1720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영토적으로 최대 범위에 도달했다.
그러나 아우랑제브 치세에 실시된 인두세 부활과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종교적 억압책으로 인해 제국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또한 아우랑제브가 전개하는 다양한 정복 사업은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세금 액수의 증가로 이어져 농민들과 중소 지주들의 불만을 증대시켰다. 때문에 아우랑제브 생전부터 제국에 반발하는 반란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우랑제브 사후, 반란 세력들 가운데 가장 강대했던 마라타 제국이 데칸 고원 일대에서 발흥했고 1세기도 채 되지 않아 인도 중북부 대부분을 휩쓸었다. 한편 북인도의 라지푸트족과 시크교도들 역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무굴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결국 18세기 초부터 무굴 제국은 급속하게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후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와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 제국의 연이은 침략을 받으며 더욱 약화된 무굴 제국은, 18세기 말에는 옛 델리 근교만을 통치하는 지방 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무굴 제국 시기에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의 본격적인 인도 진출이 시작되었는데, 다른 열강들을 꺾고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무굴-프랑스 연합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인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고, 19세기 무렵이 되면 인도 대부분의 토후국과 왕국들이 영국에게 복속되었다. 무굴 황제는 명목상으로는 전 인도의 황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인도의 직접 통치를 선언한 영국은 마지막 무굴 황제였던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시킨 뒤 미얀마로 유폐시켰으며, 무굴 제국을 해체하고 인도 제국을 설립하였다.
무굴 제국은 군사적 전쟁을 통해 창설되고 유지되었지만, 자신들의 통치하에 있던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강력하게 억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행정 제도와, 다양한 통치적 수단 등을 통해 이들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서로의 갈등을 어느정도 봉합시키는 등의 관용 정책을 실시하였다. 덕분에 다양한 배경 출신의 엘리트들이 보다 효율적이고 중앙집권적이며 표준화된 통치를 이끌어냈다. 무굴 제국의 막대한 부의 기반은 제3대 무굴 황제 악바르가 제정한 농업 세금이었다. 이러한 세금은 농민 경작자의 생산량 절반 이상에 달했으며, 잘 규제된 은화로 지불되어, 농민과 장인들이 더 큰 시장에 진출하도록 이끌었다.
17세기 대부분 동안, 제국에 의해 유지된 상대적인 평화는 인도의 경제적 번영에 기여했다. 대항해시대 이후 인도양에서의 유럽인들의 증가로 촉진된 대유럽 무역과 함께 인도산 원자재 및 완제품에 대한 수요 증가로 말미암아 무굴 제국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무굴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자 하는 소비가 증가했는데, 특히 샤 자한의 통치 기간 동안 무굴 회화, 문학, 직물, 무굴 건축에 대한 후원이 활발해졌다. 남아시아의 무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는 아그라 요새, 파테푸르 시크리, 붉은 요새, 델리의 후마윤 묘지, 라호르성, 샬리마르 정원, 그리고 "인도 이슬람 예술의 보석이자 세계 유산 중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걸작 중 하나"로 묘사되는 타지마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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