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사람'은 아량이 넓거나 화를 잘 참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해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서로 반목하는 집단들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차별 당하는 사람과 차별을 가하는 사람 사이, 함께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남편과 아내, 같은 회사에서 얼굴 붉히며 근무하는 두 사람 사이, 서로에게 신뢰가 없는 부모와 자식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거리낌 없이 그 사이로 들어가는 일은 때론 목숨을 걸어야하는 상황도 생긴다. 본회퍼의 말대로, “그들이 거리낌 없이 악한 자들과 만나고 기꺼이 그들에게 고난 받을 때가 바로 이 땅에 평화가 가장 거대해지는 순간입니다.”(Bonhoeffer, Discipleship, 108)
예수께서 선언하신 화평케하는 자는 화해를 추구하되, 서로 간에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거나 차이를 억누르는 방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다양성과 차이를 무시하는 방식은 오히려 폭력이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화평케 하는 자’는 차이를 초월하는 사랑으로 서로를 품고, 차이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을 취한다. 예수님은 이 방식에 대한 최고의 해설을 마태복음에서 풀어주셨다(5:21-26, 43-48, 6:14-15, 18:21-35). 그는 윤리적인 관계를 사랑(22:34-40)과 종으로 섬김의 관점(20:20-28)에서 보았고, 이러한 틀이 화평의 기초가 된다.
이 구절과 관련된 논란이 있다. 기독교 역사에는 이 말씀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한쪽은 이 구절을 근거로 비폭력 저항과 급진적 평화주의를 가르치는데, 메노나이트 같은 재세례파 전통과 연결된다. 종종 이들에 대해 이상적이라거나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하지만 이들이 견지하고 있는 평화주의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취한 입장이었다. 4세기 이전 초기 교회에선 군인을 교인으로 받아주지 않았고, 최소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서약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초기 교인들에게 비폭력 무저항 평화는 그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여도 예수님의 진실한 가르침으로 굳게 수용되었다. 평화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현실적인가 아닌가?’, 또는 ‘이 방식이 이 땅에서 효과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서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를 것인가 아닌가?’이다.
이들과 다른 해석도 있다. 주님의 말씀은 개인의 삶에 대한 말씀이지 국가 간 관계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해석이다. 즉, 개인끼리는 비폭력을, 그러나 국가의 정당한 전쟁(폭력)은 허용된다고 보는 이런 관점은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의 논지이다. 이런 해석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일관성을 가지고 각자에게 적용되어야 함은 물론, 우리가 참여하는 모든 영역(국가)까지 확장시켜 “반드시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비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사로운 영역에만 제한하는 것은 예수의 방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평화라는 점이다. 다만, 그 수단과 과정이 명쾌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 말을 다시 돌리면, 우린 모두 평화를 추구하되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자녀)’이란 호칭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아들/아들들’이란 용어는 유대세계에서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을 뜻한다. 평화를 추구하며 갈등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이다. 여기서 화평케 하는 일은 언제나 의/정의와 연결되어 있다(시85:10, 사9:7, 사32:17)......
최주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