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감, 천천히 반응해야 속도를 따라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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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의 창시자로 불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치료한 어느 환자의 이야기다. 오스트리아에 한 소녀가 살았다. 미신을 신봉한 그녀의 할머니는 “넌 아들로 태어났어야 해. 넌 잘못 태어난 존재야.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소녀는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생각했으나, 할머니의 말은 소녀의 무의식 속에 눌러앉아 깊이 뿌리내렸다. 어른이 되면서 소녀는 시름시를 앓기 시작했다. “온몸이 찢어질 듯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지만 병원에서는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며칠 뒤 그녀는 프로이트 박사를 찾았다. 소녀의 육신이 아닌 정신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 프로이트가 말했다.
“의료진의 판단이 옳다면 당신의 몸 상태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단지 어릴 적 당신의 마음을 휘감은 할머니의 부정적인 말과 표현 때문에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타인이 지은 말의 감옥에 갇혀선 안 됩니다. 이제 그곳을 벗어나세요.”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칼에 베인 상처는 바로 아물지만 말에 베인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숨 막히는 세상이다. 정제되지 않은 예리한 말의 파편이 여기저기서 튀어 올라 우리의 마음을 긁고 할퀸다. 이같이 난잡한 세상에서 허덕지덕 힘겹게 버티다 보면 헷갈리는 게 있다. 날카로운 언어의 창이 우리를 겨눌 때 촉수를 곤두세우며 예민하게 대응해야 할까, 아니면 외부적 자극에 둔감하게 반응하며 무덤덤하게 임해야 할까.
소설 《실낙원》의 저자로 잘 알려진 외타나베 준이치는 이런 고민에 휩싸인 이들에게 “둔감력(鈍感力)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와타나베 준이치는 둔한 감정과 감각이라는 뜻의 ‘둔감(鈍感)’에 힘을 뜻하는 역(力) 자를 붙인 ‘둔감력’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곰처럼 순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인이 어떤 일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지를 자각하고 적절히 둔감하게 대처하면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둔감력이란 무신경이 아닌 복원력에 가깝습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즘으로 일컬어지는 ‘후흑학(厚黑學)’에도 비슷한 개념이 등장한다. 청나라 말 사상가 이종오(李宗吾)는 동명의 책에서 “난세를 평정한 영웅호걸의 특징은 ‘후(厚)’와 ‘흑(黑)’으로 집약된다고 했다.
여기서 ‘후’는 얼굴이 남보다 두터워 쉽게 들키지 않음을 뜻한다. ‘흑’은 글자 그대로 검은 것이다. 그냥 검은 게 아니라 타인이 마음을 간파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새까맣다는 의미다.
일부에서는 후흑을 ‘뻔뻔함’ 정도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최근 이를 연구한 학자들은 ‘무디고 둔감한 감정이 지닌 힘’ 혹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면서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역량’으로 풀이한다. 와타나베 준이치의 조언과 결을 같이하는 대목이다.
둔감력은 좌절감을 극복하는 마음의 근력 또는 힘을 의미하는 ‘회복 탄력성(resilience)’ 같은 단어와 어감이 묘하게 겹쳐진다.
타인의 말에 쉽게 낙담하지 않고 가벼운 질책에 좌절하지 않으며 자신이 고수하는 신념과 철학을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힘, 그렇게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바로 둔감력이다.
《장자(莊子)》 〈달생편(達生)〉 편을 보면 ‘목계(木鷄))’, 그러니까 나무 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닭싸움에 심취한 왕이 닭 조련사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세상에서 가장 용맹한 닭을 조련시켜서 내게 보여주게.”
몇 달 뒤 조련사는 한가롭게 마당을 노니는 닭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이 닭이 폐하께서 찾던 천하무적 닭입니다.”
왕은 몇 번씩 눈을 씻고 닭을 바라봤다. 조련사가 가리킨 닭은 겉모습이 형편없었다. 뼈대가 가늘고 살집은 빈약했으며, 여느 닭처럼 바삐 파닥거리기는커녕 꼿꼿하게 고개를 든 채 부동자세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실망한 왕은 헛기침을 크게 하며 따지듯 물었다.
“어허험. 여보게, 내가 보기에는 그냥 거뭇한 나무토막 같군! 저런 닭이 어찌 천하무적일 수가 있나?”
“겉으로 보기에는 하잘것없지만 나름의 장점이 있는 닭입니다. 저 닭은 아무리 덩치가 큰 닭이 덤벼도 허점을 보이거나 미동을 하지 않습니다. 쉽게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격하던 닭은 제풀에 지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립니다. 싸움 자체를 하지 않고도 상대를 제압해버리는 셈이지요.”
어떠한 닭이 덤벼도 함부로 버둥거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적절히 둔감하고 의연한 닭 이야기 ‘목계의 교훈’이다.
속도와 빠르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다. 말도 예외가 아니다. 상대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언어적 순발력을 경쟁 사회에 살아남기 위한 필수능력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난 적절한 의연함을 유지하면서 남보다 유연하게 말하는 ‘목계’ 같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오히려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
상대를 먼저 공격하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의 말은 물(水)을 닮았다.
천천히 흐르면서 메마른 대화에 습기를 공급하고 뜨거운 감정을 식혀준다. 언행과 행실에 수기(水氣)가 깃들었다고 할까. 그런 언어는 내 귀로 쉽게 흘러들어오고, 그런 행동은 내 망막에 또렷하게 새겨진다.
무협 영화를 보면, 고수는 소리 없이 강하지만 하수는 소란스럽다. 하수는 적을 발견하는 순간 주저 없이 칼을 내두른다.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애매하게 진격한다. 그러면서 전력을 쉽게 노출하고 늘 싸움에서 패배한다.
무릇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위엄이 있다. 무작정 꺼내들면 칼의 위력은 줄어든다. 칼의 크기와 날카로움이 뻔히 드러나는 탓이다.
아마 말도 그러할 것이다. 적절한 둔감력을 바탕으로 유연하게 휘두를 때 말의 품격은 더해지며 언력(言力)은 배가된다.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지만 삶은 매번 계속되어야 한다.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사소한 일로 마음이 틀어진 이들과 다시 말을 섞고 몸을 부대끼려면 우린 늘 무언가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정신없이 바삐 돌아가는 요즘이다. 하지만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 계속 달릴 수만은 없다.
어쩌면, 어떤 순간에는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반응해야 하는지 모른다.
좋은 의미의 둔감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 ‘말의 품격,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이기주, 항소북스, 2019)’에서 옮겨 적음. (2020.10.09. 화룡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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