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헌-신중산층 교실에서 -단 몇 개의 귀
아카시아 향기가 결코 토종꿀을 낙태하지 못하는 길들여진 못난 황무지의 일벌들을 유혹하던 오월 나는 나의 무조건반사는 숨겨 놓고 그녀들에게 묻는다
왜 아카시아 향내에 피냄새가 섞여 있을까?
그녀들은 한결같이 꽃대궁 깊숙이 더듬이를 박으며 나의 질문을 정신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한결같이 나는 그때서야 나의 비글함을 고백하며 그녀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연대, 아동기의 놀이, 팝송과 텔리비전 그리고 학교 수업시간의 설득력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들이 한결같이 이 나라의 가장 큰 희망과 절망, 가장 큰 사랑과 증오, 가장 작은 민주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서양사의 구린 곱똥한 토막씩을 책받침 가운데 끼워 갖고 다니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보강시간에 내 말들의 어처구니 없음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나의 말들은 마른 수수깡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면서 사방의 콘크리트 벽에 혈관이 터져 그녀들의 실내화 밑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나는 잠시 그녀들 앞에 서 있어야 되는 당위성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시간은 가끔 바늘 끝 위를 밟으며 단 몇 개의 귀속에 재빨리 낱말들을 챙겨 넣고 있었따 이러한 시간의 재빠른 동작을 맹종의 태극기 맞은 편 벽에 화석이 되어 붙어 있는 한복 입은 십육 세 소녀가 동지처럼 훔쳐보고 있었다
한편 실내화 밑창을 물들이던 내 말들은 번화가 쇼윈도우의 명도 높은 채색혁명이 되어 그녀들의 책받침 속 우상인 시스터 보이의 얼굴에 밑화장을 시키고 있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책받침을 빼앗아 둥그렇게 휘어 보인다
오! 놀랠만한 금속성 휴머니즘
나는 책받침의 유연성을 통해서 그놈이 제 조국에서 노래부를 때 수 명이 깔려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는 토픽 뉴우스와 신식민지 처녀들이 먹물 속으로 익사하는 것을 감동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말했다. "너 그동안 너희 학생들에게 얼마나 거짓말 시켰냐?" 나는 당당하게 원색이 된 내 말들의 설 땅과 설 땅의 확보와 교과서와 책받침 그리고 팝송이 만들어 내는 함수관계를 변명처럼 풀어보였다 그것은 만세 부르다 죽은 처녀가 훔쳐 본 몇 개의 귀의 부활
그 후 나는 그 몇 개의 귀와 오월 날벼락에 떨어진 아카시아 꽃잎을 주워 모아 질긴 항아리에 막소주를 풀어 밀주를 담았다 그 밀주는 지금
발효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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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헌]
1954년 전북 정읍 출생.
경희대 체육과와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198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시인"지에 시 '흔들리는 창밖의 연가'와 '신중산층 교실에서' 등으로 문단에 나온 그가 다루고 있는 시적 주제는 분단이 가져오는 삶의 아픔과 고통에 있으며, 특히 '신중산층 교실에서'와 '안개 마을의 자장가' 연작은 우리의 교육과 스포츠 현실을 형상화시킨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5월 시' 동인으로 활동. 시집으로 "신중산층 교실에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