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738
■ 3부 일통 천하 (61)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8장 상앙(商鞅)의 말로 (1)
- 약한 나라는 몰락하고 강한 나라만이 살아남는다.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제 이러한 사고는
보편적이 되었다. 각 나라마다 싸움은 더욱 치열해져 명분도 논리도 필요없었다.
오로지 힘과 힘의 싸움이었다.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위(魏)나라를 격파함으로써 제(齊)나라는
전국 칠웅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다.
바야흐로 제나라는 제선왕(齊宣王) 대에 이르러 제환공 이후의 최고 전성기를 맞이한 것이다.
중원 판도는 보다 명확해졌다.- 동쪽의 제(齊)나라, 서쪽의 진(秦)나라.
굳이 분류하자면 전국시대 초기 3강(强)이라고 할 수 있는 위, 제, 진 중에서 위(魏)나라가 먼저
강국 대열에서 탈락했다. 이제 중원은 2강 시대로 접어든 셈이다.
제(齊)나라의 승전과 위(魏)나라의 패배는 서방의 초강대국 진(秦)나라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방연(龐涓)이 죽었다고?'진나라의 재상이자 개혁가인 공손앙(公孫鞅)은 쾌재를 불렀다.
'위나라를 칠 좋은 기회다.'약육강식(弱肉强食)의 생존 경쟁에서 약점을 보이는 것은 치명적이다.
반대로 주변의 강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기다.
서쪽 한 귀퉁이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던 진(秦)나라를 십 수 년 사이에 초강대국으로 변모시킨
개혁가답게 공손앙(公孫鞅)은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진효공(秦孝公)을 찾아가 거침없는 어조로 주장했다.
"위(魏)나라는 제나라에 패함으로써 상처 입은 호랑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우리 진(秦)나라는 위나라에 가로막혀 속앓이를 해왔습니다만, 이제 바야흐로
중원으로 뻗어나갈 기회가 왔습니다.""위(魏)나라가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에 주공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도모하십시오. 위나라 땅을 점령하고 동쪽 모든 제후들을 지배한다면
우리 진(秦)나라는 가히 제왕(帝王)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개혁으로 인해 쌓은 힘을 영토 확장에 쏟아붓자는 정책 노선의 변화였다.
진효공(秦孝公)은 천하를 호령하는 자신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공손앙(公孫鞅)의 말이여, 옳고도 옳도다!"
진효공(秦孝公)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공손앙에게 대장의 인수를 내리고 공자 소관(少官)을 부장으로 임명했다.
- 서하(西河)를 정벌하라.방연이 마릉 전투에서 죽은 이듬해인 BC 349년(진효공 22년),
공손앙(公孫鞅)은 5만 군대를 거느리고 위나라 서하 땅을 향해 호호탕탕(浩浩蕩蕩) 진군했다.
마릉 전투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진(秦)나라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위혜왕(魏惠王)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하(西河)는 위나라를 지켜주는 군사 요충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 곳을 잃으면 도성인 안읍(安邑)이 매우 위태로워진다.
"누가 가서 진(秦)나라 군을 무찌르고 서하를 지키겠는가?"
모든 신하들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공자 앙(仰)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지난날 공손앙(公孫鞅)이 우리 위나라에 머물러 있었을 때 신은 그와 매우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신(臣)은 그를 왕께 천거했던 것인데, 결국 왕께서는 그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왕께서 허락하신다면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하(西河)로 가서 공손앙에게 화평을
청해보겠습니다. 지난날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공손앙(公孫鞅)은 신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만일 거절한다면 그때 가서 한(韓)나라와 조(趙)나라에 구원을 청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상책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그러나 어쩌랴.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위혜왕(魏惠王)은 공자 앙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군사 5만을 내주었다.
공자 앙(仰)은 안읍을 떠나 서하 땅 오성(吳城)에 가서 주둔했다.
오성은 지난날 병법가 오기(吳起)가 서하 태수로 있을 때 쌓은 성이었다. 그래서 오성(吳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진(秦)나라에 대한 방어용 성이었기 때문에 성벽이 높고 견고했다.
공자 앙(仰)이 병력 배치를 마치고 공손앙에게로 화평 사자를 보내려 할 때였다.
성문을 지키던 장수가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지금 성밖에 진(秦)나라 재상의 사자가 와
장군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며 성문을 열어달라고 합니다."
공자(仰)은 의심이 들어 성문을 지키는 장수에게 지시했다.
"성문을 열지 말고 밧줄을 내려 올라오게 하라."
잠시 후 진(秦)나라 사자는 밧줄을 타고 성 안으로 들어와 공자 앞에 섰다.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바쳤다. 공자 앙(仰)이 뜯어보니 공손앙이 자신에게로 보내는 서신이었다.
- 지난날 나는 위(魏)나라에 머물면서 공자와 친형제간처럼 지낸 바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서로 섬기는 임금이 다르지만 우리의 우정까지 깨지기를 어찌 바라는 마음이겠습니까.
군사를 내어 싸우기 전에 우선 우리 두 사람이 만나 옛 회포를 풀고 싶습니다.
얘기가 잘 되면 우리 두 나라는 처절한 싸움을 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후세 사람들은 우리 두 사람은 관중(管仲)과 포숙(鮑叔)과 같은 우정이었다고 칭송할 것입니다.
공자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뜻밖의 내용이었다.
공자 앙(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자신이 하려던 말이 아니던가.
"역시 공손앙(公孫鞅)은 나를 잊지 않고 있구나. 내 이제야 우리 위나라를 구할 수 있겠구나."
공자 앙(仰)은 그 자리에서 답신을 써 사자에게 건네주었다.
그대가 지난날의 친분을 잊지 않고 이렇듯 정을 보내오니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우정이 장차 진(秦)과 위(魏)나라 백성들을 편안케 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뿌듯해옵니다.
그대가 먼저 군사를 물리신다면 저는 닷새 후 옥천산(玉泉山)으로 나가 그대의 술잔을 받겠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이 모든 게 공손앙의 치밀한 계책일 줄이야.
공자 앙의 답신을 읽어본 공손앙(公孫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서하(西河)는 우리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진배없다.'그는 모든 장수를 불러 명했다.
"전군(全軍)은 즉시 영채를 뽑고 철수하라!"장수들이 웅성거렸다.
부장인 공자 소관(少官)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항의했다.
"재상께서는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 나라 일을 그르치려 하십니까?"
공손앙(公孫鞅)이 웃으며 대답했다."공자는 진정하시오. 내가 어찌 사사로운 정 때문에
나라의 대사를 망치겠소이까? 나는 닷새 후 옥천산(玉泉山)에서 위나라 대장 공자 앙(仰)과
회견할 작정이오.""공자는 일단 전군을 거느리고 철수하는 척하다가 호기산과 백작산으로 가
숨어 계십시오. 그러다가 모든 군마를 함매(銜枚)시켜 회견 당일날 미시(未時)까지
옥천산 뒤편 계곡으로 이동하십시오.""미시(未時)가 지나면 산 위에서 북소리가 세 번 울릴 것입니다.
그걸 신호로 일제히 쳐들어오면 어찌 위공자 앙(仰)을 사로잡을 수 없겠습니까?"
그제야 공자 소관(少官)은 공손앙의 뜻을 알고 자신의 흥분을 사과했다.
739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