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기(血氣)를 기르는 것에 대하여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에게는 경계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젊었을 때에는 혈기(血氣)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색(色)을 경계해야 하고, 장년이 되어서는 혈기가 한창 왕성하니 싸움을 경계해야 하며, 늙어서는 혈기가 쇠약해졌으니, 이득을 탐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하였다.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혈기는 그것을 통해 형체가 생겨나게 하는 것인데, 혈(血)은 음이오 기(氣)는 양이다. 득(得)은 이득을 탐내는 것이다. 때에 맞게 경계할 줄 알아서 이치로써 그것을 이겨 내면 혈기에 부림을 받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군자는 그 뜻과 기를 기르기 때문에 혈기에 의해 움직이는 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가 더욱 높아질수록 덕도 더욱 높아진다.” 하였다.
《주역(周易)》에, “언어를 조심하고 음식을 절제하라.” 하였다. 〈이괘(頤卦) 상사(象辭)〉
정자가 말하기를, “말을 조심하여 그 덕을 기르고, 음식을 절제하여 그 몸을 기른다. 지극히 가까운 일로서 그 지극히 큰 것과 관계된 것으로 말과 음식만 한 것이 없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진원(眞元)의 기는 외기(外氣)와 서로 섞이는 것이 아니요, 다만 외기로서 함양할 따름이다. 이는 마치 물에 사는 물고기의 생명을 물이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물로써 길러 주어야 물고기가 살 수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이 천지의 기 가운데 있는 것이 물고기가 살 수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음식으로 보양하는 것도 모두 이 외기로 함양하는 방법이다.” 하였다. ○ 또, “동식(動息)ㆍ절선(節宣 철에 따라 몸을 조심하는 것)을 통해 생명을 기르고[養生], 음식ㆍ의복을 통해 몸을 기르고[養形], 위의(威儀)와 바른 행실로 덕을 기르고[養德], 나를 미루어 상대에까지 미루어 아는 것을 통해 사람을 기른다.[養人]” 하였다. ○ 형서(邢恕)가 말하기를, “우리는 항상 정력(精力)을 애호하고 함양하지만, 정력이 조금만 부족해도 권태로워져서, 일에 임해 힘을 쓰기는 하나 정성스러운 뜻이 없다. 손님을 접대하고 말을 하는 데에서도 볼 수 있으니, 하물며 큰일에 임해서야 어떻겠는가.” 하였다.
공자께서 삼간 것은 재계(齋戒)하는 것과 전쟁하는 것과 질병이었다.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재(齋)의 말뜻은 바르게 한다는 것인데, 제사 지내기에 앞서 그 생각 가운데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하며 신명(神明)과 접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성이 지극한가 지극하지 못한가. 신이 제사를 흠향하는가 안하는가는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전쟁은 백성의 생사와 나라의 존망(存亡)이 걸려 있는 것이요, 질병은 또 내 몸이 죽느냐 사느냐, 존재하느냐 없어지느냐가 달려 있는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병중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기 때문에, 모든 생각을 다 내려놓고 오로지 본심을 보존하고 기를 기르는 것에만 힘써야 한다.” 하였다. ○ 정자가 장사숙(張思叔)에게 말하기를, “나는 기를 매우 약하게 타고났는데, 30에 차차 성해지고, 4, 50 이후에 완전하여 졌다. 지금 나이 72세인데 한창 때와 근골(筋骨)을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다.” 하였다. 사숙(思叔)이 청하여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아마도 기를 약하게 타고나셨기 때문에 생명을 잘 지키신 것이지요?” 하니, 정자는 가만히 말하기를, “나는 생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깊은 수치로 여겼다.” 하였다. 장남헌(張南軒)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양생(養生)은 건강을 탐하는 것이니, 이는 다만 이익을 추구하는 데 지나지 않으나, 이천(伊川)이 말한 것은 순전히 천리(天理)이다.” 하였다. 또 부주(涪州)에서 돌아왔을 때 용모나 기색이나 수염이 모두 그전보다 월등하게 나아 보였다. 문인이 묻기를, “어떻게 하여 이와 같이 건강하실 수 있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학문의 힘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인의(仁義)의 마음은 사람마다 똑같이 받았으나 자품(資稟)에는 트인 것[開]과 가린 것[蔽]이 있으며, 진원(眞元)의 기는 사람마다 같이 가지고 있으나 혈기에 허(虛)와 실(實)이 있습니다. 인의의 마음을 잘 기르면 가린 것이 열릴 수 있어서 그 천부의 본심을 온전히 할 수 있게 되고, 진원의 기를 잘 기르면 허가 실이 될 수 있어서 그 하늘로부터 받은 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기르는 방법도 밖에서 타물(他物)에 가탁(假託)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흔들리거나 손상되지 않게 할 따름입니다. 천지의 기화(氣化)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생겨나 잠깐 동안이라도 정지하지 않는데, 사람의 기도 천지와 서로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양심과 진기(眞氣)도 천지의 기와 함께 생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 갈래로 상(傷)하고 해(害)가 되어 생장이 소멸하는 것을 이겨 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리저리 굴러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마음은 금수(禽獸)가 되고, 기(氣)는 일찍 시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양심을 해치는 것은 귀ㆍ눈ㆍ입ㆍ코와 사지(四肢)의 욕망이고, 진기를 해치는 것도 이 욕망으로 인한 것입니다. 대개 귀와 눈이 성색(聲色)을 좋아하는 것이 진실로 마음에 해로운 것이로되, 음란한 소리와 아름다운 색은 뼈를 부수는 도끼와 톱이요, 입으로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진실로 마음에 해로운 것이로되, 입에 딱 맞는 맛은 반드시 오장(五臟)을 상하게 합니다. 한가하고 안일한 것은 근육과 맥(脈)을 늘어지게 하여 드디어 행동과 휴식이 올바른 도리에서 어긋나게 합니다. 희(喜)와 노(怒)는 그 중용의 도리를 잃어버리고, 마음은 날로 방자해지고, 기는 날로 방탕하게 되어, 마침내는 일기(一氣)의 관통(貫通)이 끊어지고, 백해(百骸)의 유대가 풀어지게 되는 것이니, 장차 어떻게 천명대로 바로서서 세상에 오래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을 기르는 것과 기를 기르는 것은 실로 한 가지 일입니다. 양심이 날로 생장하면서 상하거나 해되는 것이 없어서 마침내 그 가리고 있던 것을 모조리 다 없애 버리는 데에 이르면 호연(浩然)의 기가 성대하게 흐르고 통하여, 장차 천지와 한몸이 됩니다. 죽고 사는 것과 길고 짧은 것은 비록 정해진 분수[定數]가 있다 하더라도, 나에게 있는 도리는 다할 수가 있으니, 어찌 스스로 마음에 만족스럽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유념하시옵소서.
율곡 이이 선생, ‘성학집요’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