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덩굴!~
올초부터 담쟁이에 꽂혔습니다.
직장 현관입구 안쪽에 화단을 만들어 담쟁이 덩굴을 심었습니다.
안까지 빛이 잘 들어오질 못하니
식물성장등을 요란하게 달고 온종일 쬐어주고 있습니다.
고려담쟁이, 오엽담쟁이, 황금담쟁이, 토종담쟁이가
잎이 나고 덩굴손이 올라옵니다.
요즘 그 덩굴손이 얼마나 자랐나,
제대로 벽을 타고 오르나,
매번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왜 이리 이넘들이 좋을까요?
김용택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에 이런 글귀 있습니다.
'.....
내 가슴은 세상의 아픔으로 멍들어야 한다.
멍이 꽃이 될 리 없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으로 나는 늘 세상의 고통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럴 나이도 되었다. 꽃이 없어도 될 나이.
생각과 행동에 자유와 평화로움을 얻을 때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어떤 것에도 아쉬워해선 안된다.
.....
그리하여 나의 가슴은 세상의 아픔으로 늘 시퍼렇게 멍들어야 한다.
그 푸르른 멍은, 살아있음의. 살아감의 존재가치의 증거가 아니더냐.'
이보다 더한 위로의 시가 어디 있겠습니까?
꽃이 없어도 될 나이 되었으니 오히려 자유로우며,
멍이 꽃이 될 리 없지만 세파에 네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이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라고 도닥거려주는 이 강렬한 위안.
이 담쟁이덩굴, 나에게 괜히 좋은게 아니었어요...
첫댓글 아, 담쟁이도 종류가 많군요.
겨울을 빼고는 시각적으로 상당히 안정감을 주는 식물인 듯.
허술한 시골집 벽이나 삭막한 도회지 콘크리트 벽에도
저걸 두르면 평온하고 고색창연한 감동까지 얻게 되니까요.
또 거기에다 말씀처럼, 세파에 멍든 데의 강렬한 위안...ㅎ
문학가들의 눈도 담쟁이에서 강인한 생명력, 생동감의 모티브를 얻나 봅니다.
김용택 시인이 푸르른 멍으로 비유하여 내면적 생존의 가치로 매겼다면,
오 헨리의 담쟁이, '마지막 잎새'는 가난,고독, 전염병이라는 사회적 악에
저항하는 질긴 생존력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소싯적 마음을 많이 뺏긴 단편이죠
암튼 둘 다, 담쟁이 앞에서 희망을 말하려 한데서 일치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