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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복 잡감(1) … 일본형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의 잔재
때아닌 연미복(燕尾服, Tailcoat) 논란이 휩쓸고 지나갔다. 선거철이 다가오긴 했나 보다. 민주당 이낙연 캠프에서 이재명 지사 쪽에 네거티브 공세를 더해가는 과정에서 황교익 씨가 말려 들면서 엉뚱하게 민주당 안에서 '친일' 이슈가 불거졌다. 그래도 서로 사과 비슷하게 주고받은 뒤, 황씨가 공직 지명을 반납하면서 정리되는 분위기다.
실은 황씨가 주로 공격을 받은 음식 주제, 그리고 옷이나 집과 같은 ‘의식주’의 영역은 다양한 외래문화가 융합하고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기도 한다. 따라서 음식이나 옷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 죄 없는 음식이나 옷, 그 자체보다는 역시 그 배경 역사와 이슈가 발생한 상황이 문제일 때가 있다. 정치 지도자가 스시를 좋아하는 것이야 개인 취향이겠으나 중국 북경이나 북한 평양에 가서 꼭 일본 스시를 만찬에 내줄 것을 요구하거나, 혹은 영국 총리를 서울에 불러 놓고 프랑스 요리를 대접한다면 분명 죄 없는 음식(요리)에게 귀추가 주목되고 논쟁이 일 수밖에 없다. 3년 전(2019) 일왕 즉위식 때 총리로서의 이낙연이 입었던 연미복도 서구에서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쉬이 넘어가기에는 생각할 문제가 꽤 있다. 3년 전 이낙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느꼈던 묘한 위화감의 기억을 떠올려 가며 몇 자 적어 볼까 한다.
우선 <조선일보> 8월 18일자 보도를 보면, 이낙연 캠프에서 정책본부장을 맡고 있는 홍익표 의원이 ‘연미복 드레스코드’에 대해서 “일본 의상이 아니라 유럽의 전통 의상”이라며 “최고의 외교적 의전 중 하나”라고 반박하였다. 이어서 "왕이 존재하는 국가에서 여전히 연미복을 입는 것이 관례고 최고의 예절”이라면서 이낙연 전 총리를 비롯해서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도 일본, 영국, 노르웨이에서 모두 연미복을 입었고, “3국의 공통점은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고, 모두 왕실과 관련된 행사였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연미복은 일본 의상이라는 착각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이 아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https://www.chosun.com/.../08/18/KFA3RBRSABFJDJK7WJ2EJ7KECI/
하지만 ‘홍익표’ 의원의 설명을 일본에서 읽고 있는 나 ‘홍이표’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일본(이낙연), 영국(노무현), 노르웨이(문재인)을 한 데 묶어 대충 퉁 치고 넘어가려는 안이한 태도에 고구마 먹고 물을 찾는 심정을 느꼈다랄까.
<조선일보>도 "文·盧도 입은 연미복 … 황교익 “일본 정치인의 제복”이라는 제호의 기사에서 "남성 참석자는 대부분 연미복(테일코트)이나 자국 전통 의상을 착용했다. 영국 찰스 왕세자도 연미복 차림이었다."라면서 이낙연 측을 변호했다. 하지만 연미복을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서구인이었고, 민족 의상을 입은 여러 정상과 내빈에 대한 언급은 소개하지 않는다. 또 이낙연이 기자로 일했던 <동아일보>도 "이낙연, 황교익 ‘日총리’ 발언에 “연미복은 일본 옷 아냐” 일축"이라는 제호로 이낙연 측을 엄호 사격하였다. 대표적 보수 언론들이 이낙연과 원팀을 이루어 황교익, 이재명을 배척하는 듯한 모습이 꽤나 기묘하다.
https://www.chosun.com/.../08/18/JYXSUYMIUFF6DJSQWIDGM4XITM/
https://www.donga.com/.../article/all/20210818/108596416/1
이낙연 측이나 조선・동아의 일관된 목소리를 정리하면 일왕 즉위식 때의 "연미복'은 일본 옷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대답은 “글쎄요...”이다. 왜냐하면 연미복이 제국일본에 도입된 이후 그 때부터 이미 유럽에서의 연미복과는 전혀 다른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 뒤꽁무니 쫓기 바빴던 19세기의 메이지 일본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입던 예복 테일코트(Tailcoat)를 연미복(燕尾服, 엔비후쿠), 즉 “제비 꼬리 옷”이라 번역하여 입기 시작했다. 상의 코트의 뒷 부분이 제비 꼬리처럼 길게 달려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탈아입구’(脱亜入欧)의 모토 아래 심지어 한자와 가나를 버리고 영어 알파벳으로 문자까지 바꾸려 했던 시대(결국 서양 문자는 포기)의 대표적 소산 중 하나가 이 연미복이 아닐까 한다. 서양에 맞추기 위해 음력 명절들을 양력으로 대거 바꾸는 조치 등도 그러한 맥락이었다.
연미복은 1872년(메이지5)에 ‘태정관 포고’(太政官布告) 제339호 ‘대례복 및 통상 예복을 정하여 의관을 제복으로 하는 등의 건’(大礼服及通常礼服ヲ定メ衣冠ヲ祭服ト為ス等ノ件)에서 연미복을 ‘문관 등의 통상예복’((文官等の)通常礼服)으로 지정하였다. 온갖 훈장과 장식을 단 대례복(大礼服)을 입을 수 없는 하급 관리나 민간인이 정부 공식 행사에 나가려면 ‘남자 통상예복’(男子通常礼服)으로서 이 연미복이 소례복(小礼服)이란 이름의 최상급 예복으로 지정되어 자주 입게 된다. 지금도 참의원이나 경제인(재벌) 등이 정부 행사나 만찬 등에 갈 때는 대부분 연미복을 입고 있다.
이처럼 현재 아시아 권에서 이 옷이 각종 의식에 애용되는 것은 일본이 독보적이다. 그것은 역시 천황제의 존속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본의 정치인, 경제인, 문화인 등이 천황을 알현할 때는 꼭 이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경우는 일반적인 정장(수트)를 입어도 관계없지만 일본 국적 소지자는 연미복 착용이 규정상 필수이다. 일본인이 만약 연미복이 아닌 일반 정장이나 다른 옷을 입고 천황 앞에 갔다가는 사회적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이다. 총리가 바뀔 때마다 천황에게 임명장을 받는데 모두 연미복을 입고 거의 90도로 조아리는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자위대 열병식이 전함 진수식 같은 군사 행사에도 내각총리나 대신은 꼭 이 옷을 입으며, 내각 출범식이나 각종 만찬, 심지어는 늘 이웃 국가와의 마찰을 야기하는 야스쿠니 신사참배 등에도 이 옷이 애용되고 있으므로, 연미복(燕尾服)은 일상적 착용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예복화 된 유럽의 것과는 다른 일본근현대사 속에서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됐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생적 문화가 정착된 유럽과 달리 일본의 연미복은 근대천황제와 제국 건설 과정에서 인위적, 의도적으로 도입된 것이란 말이다. 수입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식민지로 전락한 국가민족에게는 유럽의 그것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연미복과 세트로 1869년에 도입된 것이 화족(華族) 제도, 즉 근대식 작위 제도이다. 일본은 에도 막부의 봉건제를 철폐하고 천황이 직접 지배를 시작하면서 영국에서 귀족 직함을 내리는 상훈제도인 피어리지(Peerage)나 고대 중국의 사례 등을 모방하여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등 다섯 등급으로 귀족 줄 세우기를 시작했다. 1947년에 신 일본헌법의 공포와 함께 이 화족령은 폐지이 폐지될 때까지 최종적으로 1,011 집안이 화족으로 지정되었다. 연미복은 특권층으로 거듭난 이들 화족이 입는 상징적 복식으로 자리잡아 갔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병합한 일본은 자국의 화족제도를 도입해 ‘조선귀족령’을 선포, 을사5적을 비롯한 친일파 76명에게 ‘후, 백, 자, 남작’을 하사해 처음으로 일본에 의한 ‘조선 귀족’이 탄생했다. 원조 친일파라 할 수 있는 박영효도 병합 소식을 듣고는 조선을 단념하고 후작 작위와 은채공사금 28만원을 받고 조선귀족이 되었다. 대표적인 매국노 이완용은 당초 백작(伯爵)을 받았으나 1919년 3.1운동 진압의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候爵)으로 승격되었다. 1926년에 이완용이 죽자 장남 이병길은 후작 작위를 그대로 상속(세습)했다. 기독교 지도자 윤치호도 아버지 윤웅렬의 작위를 세습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제국일본은 식민지를 건설해 가면서 이러한 새로운 신분 질서 구축을 통해 협력자들을 양성했다. 기존 사회에서는 출세와 집권이 요원하던 많은 이들이 팔자를 고쳐보겠다고 친일 부역자가 되어 갔고, 동포를 학대했다. 그 때 그들의 출세와 성공을 상징하는 복식이 바로 ‘연미복’이었다. 옷은 ‘탈아입구’(脱亜入欧)를 했을지언정, 옷 밖으로 튀어나온 손과 머리는 동양인을 한 부조화스런 모습으로 말이다. 유럽인들이 보기엔 그저 우스꽝스러웠을 뿐인 그 모습을 멋지게 표현하기 위해 근대 일본인들은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말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근대 일본인들은 ‘탈아입구를 달성한 유일한 문명인 야마토 민족’의 반열에 조선인이나 대만인들을 넣어 주질 않았다. 아무리 친일을 하고, 작위를 받고, 일본말을 열심히 쓰고, 연미복을 입어도, 그들 앞에선 그저 미개하고 저열한 조선인, 대만인, 만주인, 류큐인일 뿐이었다. 그들은 식민지민들을 한 데 묶어 ‘토인’(土人)이라 불렀다.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는 그의 책 서 『<일본인>의 경계』(<日本人>の境界, 1998)에서 제국신민이면서도 평등한 대우를 못 받는 애매한 위치의 식민지민들을 “<일본인>이지만 <일본인>이 아닌 존재”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스테판 다나카(ステファン・田中)나 재일코리안 학자 강상중이 제시한 ‘일본형 오리엔탈리즘’과도 연결이 된다. 즉 일본제국은 ‘탈아와 흥아’(脱亜と興亜)라는 상반된 두 개념 모두를 식민지 지배의 논리로서 활용했지만, 이러한 ‘양의성’(兩義性)이야말로 구미 제국주의 및 식민지 지배와의 명확한 구분을 나타냈다. 오구마는 이것을 ‘배제와 포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배제’는 문화적으로도 정치 단위로서도 주변지역을 일본과는 다른 별개의 식민지, 즉 비일본(非日本)로서 평가한다. 식민지민을 야만시(멸시)하면서 차별적인 취급도 용인하는 ‘배제’가 그 핵심이다.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모방한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제국 경영의 문제와 한계, 모순이 여기서 드러난다. 연미복을 입고 서구를 흉내내면서 연미복을 입을 수 있는 자를 줄 세워 그 연미복 근처에도 못 오는 자들은 미개, 야만, 비문명으로 규정하였다. 이런 식민지의 조급증과 열등감을 이용하는 방식의 일본형 근대는 결국 1930-40년대에 있어서의 ‘일시동인’(一視同仁)에 의한 동화 정책, 즉, 신사참배 강요나 창씨 개명, 징용・징병 등에 논리적 기반으로 작용한다.
이 논리에 무릎 꿇은 이광수도 두루마기를 벗어 던지고 연미복을 향한 동경의 마음을 간절히 담아 창씨개명을 하고 완전한 일본인이 되자고 읍소하고 있다.
“내선일체 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朝鮮人)이 내지인(內地人)과 차별 없이 될 것 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 밖에 더 중대한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 이광수, “창씨와 나,” 「每日新報」, 1940년 2월 20일.)
4.19 학생 혁명의 피 위에 연미복을 입고 대통령에 취임했던 윤보선 대통령… 그의 당숙 윤치호는 아비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작위를 세습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반도인이 내지인같이 되면 차별대우라는 것은 자연 철폐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반도인은 차별 대우를 철폐하여 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 책임감과 공덕심을 함양하여 내지인의 수준에 달할 것이 반도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 내지인은 반도인에 대하여 차별대우를 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 내선이 일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정신적으로 일체가 되어야 한다. ” (윤치호,「靑年」, 제19호, 1940년 1월호.)
연미복을 향한 그릇된 욕망 뒤에 얼마나 많은 조선 민중의 고통이 켜켜이 쌓여갔을지 헤아릴 수 없다. 패전 이후 일본은 어째서 일본‘제’국에서 일본‘민’국으로 바뀌지 못 하였을까? (현재의 공식 국명은 일본국.) 그것은 일본국 헌법 제1조에서 8조까지 규정돼 있는 천황의 존재 때문이다. 연미복은 그러한 제국일본의 하이어라키(hierarchy), 즉 천황을 정점으로 황족, 화족, 정치귀족, 재벌, 중산층, 평민, 노동자농민, 류큐인, 아이누인, 재일조선인, 부라크민에 이르기까지의 구시대적 사회 시스템을 고수하며 상위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적 복식으로 새로이 자리매김하는 상징적 문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제국일본의 연미복은 패전 직후 GHQ의 맥아더와 단 둘이 찍은 사진 한장으로 초라한 말로(末路)를 보이고 만다. 1945년 9월27일 도쿄 미국대사관에 불려 간 쇼와 일왕은 거만하게 뒷짐을 지고 선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 옆에 연미복을 입고 처연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1946) 1월 1일에는 이른바 ‘인간선언’을 통해 스스로의 ‘신격’(神格)을 부정했다. 그게 근대 일본이 남긴 연미복의 구차한 마지막 모습이다. (산돌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