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30. 큐티
마태복음 12:15 ~ 21
이사야 42:1 ~ 4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예수님
관찰 :
1)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이심
- 15절.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해석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죽이려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마태는 예수님이 구약의 말씀을 진실로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마태의 주석이 담긴 본문입니다.
- “예수께서 아시고” =>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모의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순진하셔서 세상의 악한 자들의 궤계에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그 모든 음모와 모의를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 주님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의 커넥션을 끊어버리셨지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는 이유는 예수님에게서 그들의 질병과 연약함과 죄가 씻겨짐을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와 문화 속에서 30대 초반의 청년은 그리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연장자의 권위가 더욱 인정을 받는 그런 사회에서 사회 초년생에 불과한 30대 초반의 청년을 많은 무리들이 좇는 일이란 일반적인 상황으로 볼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아는 무리들의 기대가 뒤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2)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심
- 16절.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 주님의 치유의 이유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모범이고 오늘날 모든 주님의 제자들이 따라야 하는 모델입니다.
3) 이사야 42:1 ~ 4의 성취
-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 18절.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 19절.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 20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 21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 마태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주님이 일하시는 것이 바로 이사야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십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바이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 “들레지도”라는 말은 ‘울부짖다’, ‘소리지르며 떠들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권능의 역사라면 온갖 세상에 떠들고 만방에 알리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잣대라면 당연히 그래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통념의 역설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생각과 다르시기에 오히려 그러한 권능의 역사를 경계하시고 조용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방법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듯 요란하게 소란스럽게 많은 무리들을 통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그러나 온전하고 능력 충만하게 세상을 거스르며 오는 것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 갈대는 목재로도 불쏘시개로도 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관상용으로 쓰이는 것도 요즘에 와서나 그런 것이지 농경문화 속에서 갈대가 나는 땅도, 갈대도 다 별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상한 갈대는 완전히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죄로 물든 인간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들을 꺾지 아니하시는 것이 메시야의 사역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은 우리 인생을 그렇게 긍휼히 여기시고 꺾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 어려서 경험한 시골 큰 집 사랑채에서 호롱불에 기름이 떨어져 심지가 타들어 가는 상황은 고약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을음이 올라와 천장을 그슬리고, 사람들의 코를 시커멓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심지가 타들어가는 꺼져가는 호롱불은 당연히 ‘훅’ 불어서 끄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꺼져가는 심지마저 끄지 아니하시고 기다리시고 인내하시는 분, 우리 인생의 고약한 것들이 타들어가 끄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참아주시고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야의 사역이었고, 주님은 그것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다 참아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도 그들을 끝까지 인내하시며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큰 무한대의 사랑이 복음이고, 주님의 이 어마어마한 인내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복음을 소유한 자들의 태도입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대접을 받았기에 나도 타인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소망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가르침 :
1) 말씀을 자기들 입맛에 따라 해석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하지만 예수님은 더욱 온전히 그 사랑을 가르쳐주시고,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곡해와 그릇된 종교성에 대해서도 주님은 참아주시고 주님의 원래의 말씀의 의도를 몸소 실천함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사역은 철저히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스스로 증명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2:1 ~ 4절의 성취에 대해서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음이 틀림이 없고, 성령께서 감동하심으로 마태가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런 부분이 주님을 통하여 구약이 해석되어지는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3)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분.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분. 바로 그런 분이 나의 예수님이십니다. 나에 대해서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더 자주, 더 크게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사랑을 받고서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지적하고 가르치려는 나의 자세는 옳지 않습니다. 나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용서와 용납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용 :
1) 풀러신학교의 벤 엥겐 교수는 “선교는 맛난 음식을 얻어 먹은 거지가 또 다른 거지에게 어디로 가야 맛난 음식을 얻어 먹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거저 받은 내가 주님의 사랑을 감추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것을 나도 거저 나눠주는 것이 언제나 옳습니다. 마른 막대기보다 못한 존재가 할 일을 했을 따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모든 영적 유익들은, 물질적 유익들은 사실 나눠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나의 모습은 여전히 세상에 속한 나의 안타까운 영역들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따르고자 하며 주님께 붙어있으면 열매를 맺게 될 것이기에, 주님이 나에 대해 참아주시는 인내의 크기가 나를 변화시킬 것을 믿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2) 말씀을 어그러뜨리는 바리새인과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주님을 비교하는 본문이었습니다. 나는 어디에 서야 하는지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3) 나라는 존재가 진짜 어떤 존재인지가 지금의 시간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내의 빈자리가 여전히 크고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 나의 모습이 진짜 주님 앞에서의 나의 모습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정신을 차리고자 합니다. 주님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자비가 많으신 분이심으로 인해서 감사 또 감사 그리고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