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트럼프 2기의 영향은 상당했다. 미국 대선 일주일 만에 1달러=1409원까지 치솟았다. 여기에 반도체 등의 수출 전망과 기업 실적 우려가 겹치면서 주식시장도 힘을 잃고 있다.
실제 연초부터 세계 전략가들은 2024년 지구촌 최대 리스크는 '트럼프 재선'이라고 예상해왔다. 유럽 금융가, 일본 자동차 업계, 중동 산유국 등 모두 트럼프 재선이 가져올 파장을 점검해왔다. 무역 금융 에너지 안보 등 전방위적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나겠지만 그 충격을 최전선에서 받는 나라는 아마도 한국과 대만일 것이라는 예측도 했다. 대외무역, 특히 미국 의존도가 매우 높고 동시에 지정학적 불안이 겹치는 곳이 한반도(조선반도)와 대만해협이다.
트럼프 리스크에 최전선에서 직면한 나라에서 살면 트럼프 2기에 대한 걱정과 대안 모색이 보인다. 많은 보고서, 칼럼이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 에너지 정책, 방위비 분담금, 북핵 대응 문제 등을 우려하는 결과를 내놓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실용적인 접근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정책 이슈에 몰두하는 실용적인 태도로는 해소할 수 없는 심층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달리 말하면 트럼프의 변덕과 욕심, 미국 우선주의에 맞춰 열심히 움직일 경우 우리는 누구이며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의문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한국 기업들은 급변하는 미국의 정책 방향을 예상하면서 대응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가치와 이익, 권력과 윤리, 국익이 각축을 벌이는 정치와 국제정치의 무대에서는 다소 다른 얘기가 된다.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윤석열 정권이 대외적으로 추구해 온 대외전략의 정체성 문제다. 그동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가치 외교에 적극 호응해온 윤 대통령으로서는 트럼프 시대 미국 우선주의, 거래 중심의 한미 관계로 급격히 전환할 경우 생기는 정체성 혼란을 대내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된다.
사실 이미 대통령실 참모들은 트럼프 당선 이후 한미 방위비 분담금 증액 문제, 이와 연계될 주한미군의 축소 내지는 역할 전환 문제, 트럼프-김정은 위원장의 갑작스러운 협상 가능성 등을 점검하며 세부 계획을 준비해 왔을 것이다. 정책의 세부 사안은 중요하지만 문제의 근간은 아니다. 문제의 근간은 2년 반의 윤 대통령 외교가 자유주의 가치연대라는 기치 아래 추진됐다는 점이다. 이 깃발 아래 미국에 대한 직접투자가 대규모로 진행됐고, 일본과의 협력을 촉진하는 조치가 양해됐다.
그런데 자유가치를 기반으로 결속돼 있다고 강조해 온 한미관계가 갑자기 돈을 낸 만큼 거래를 하는 관계로 돌변하고,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생존전략이라는 태세 전환은 윤 대통령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 한편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10배는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 한미 방위비 분담금 이슈를 국민에게 설득할 과제가 있다.
비용 문제를 넘어선 근본적인 이슈도 있다. 트럼프식 거래동맹 뒤에는 사실 1970·80년대 험악하고 부패한 뉴욕 부동산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트럼프 대통령의 세계관, 즉 강자와 약자의 구분, 그들 사이의 권력 과시와 숭배라는 세계관이 있었다. 경제안보와 북핵 억제를 위해 트럼프식 세계관에 적응해야 하는 한국 외교의 선택을 윤 대통령은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치에서 거래로 급선회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우리 공동체의 인식 혼란, 정체성의 혼돈은 누가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까.
둘째, 흔들리는 정체성의 또 다른 차원은 트럼프의 귀환을 오직 우리 안의 당파 싸움에 이용하려는 일부 보수와 진보 진영에서 발견된다. 한국 보수의 한쪽에는 트럼프의 재선을 열렬히 환영하는 집단이 있다. 이들은 미국 진보좌파와의 문화전쟁에서 승리한 우파 스트롱맨으로서의 트럼프를 주목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과도하게 사로잡힌 미국 민주당을 제압한 트럼프에게서 희망과 위안을 찾으려는 보수는 건전한 보수라고 하기 어렵다.
진보 한쪽에도 트럼프 씨의 당선을 환영하는 이들이 있다. 자유주의 가치와 규범의 파괴자인 트럼프의 등장이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질서의 황혼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동요를 틈타 이들 진보가 내놓는 반자유주의 본능은 당당하지 못하다.
요약하면 4년 만의 트럼프의 복귀는 우리 사회의 모든 면에서 약한 정체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가치연대라는 대외관의 연약함, 트럼프라는 왜곡된 거울에 비춰 싸우는 보수-진보의 정신적 허약이다. 격언에 있듯이 너무 급하게 달리면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