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3일(주)
* 시작 기도
주님...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함이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이 비존재세력 앞에서 넘어지지 않기 원하여 주의 보혈로 나를 씻습니다.
나를 붙잡아 주소서.
오늘은 주의 날, 공동체로 모여 함께 예배하는 날이오니 성령께서 함께 하여 주시고 하늘의 은혜가 충만하게 하옵소서.
주께로 나오는 주의 자녀들의 걸음을 축복하여 주시고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곳마다 주의 전을 이루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우리 교회에서 주의 말씀을 증거하는 손영우목사를 붙들어주시고 복음과 생명의 말씀이 온전히 증거되게 하소서.
이 말씀을 듣는 주의 백성들이 하늘의 기쁨으로 환호성을 지를 수 있게 하소서.
땅의 것을 내려놓고 만물 위의 것으로 충만히 채우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창 38:24-30
제목 : 나의 의와 자랑 그리고 나의 이성적 판단까지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뜻과 주님의 지각으로 채우길 원합니다.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27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 나의 묵상
유다는 가족공동체를 빠져나와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을 한다.
그의 아내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고 단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로만 언급되는 것을 보면 유다가 그 여인을 사랑해서라기보다 색욕에 의한 결혼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이후 유다는 그녀에게서 연속으로 아들 셋을 낳는다.
첫째 아들 엘은 하나님 앞에서 악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둘째 아들 오난은 아버지 유다의 명에 따라 계대결혼법에 의해서 형수를 아내로 맞아 형의 씨를 이어주어야 함에도 그 씨가 자기의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형수의 몸에 씨를 뿌리지 않고 밖으로 흘려버렸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이 되어 그 또한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였다.
유다는 셋째 셀라 역시 며느리에게 주어 장자 엘의 씨를 이어야 하지만 셀라 또한 죽임을 당할까 염려가 되어 주기가 꺼려졌다.
그래서 며느리를 친정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막내 아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만 친정에 가 있으라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막내인 셀라마저 죽을까 걱정이 되어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유다 가문을 통한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유다는 꺼리는 것이나 두려워함이 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막내 아들이 죽을까봐 겁이 나서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너무도 중요한 일에 지극히 소홀히 하는 행위와 다름 아니다.
하지만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이 뜻하신 바 계보를 잇는 일에 충성을 나타낸다.
물론 그 충성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지만 당시의 관습법에 충실하고자 하는 여인의 충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열심을 통하여 하나님은 일하시는 것이다.
그런 다말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넣어주시고 인간의 도덕 윤리적 그리고 종교적 순결을 초월하여 넘으신다.
결국 이런 다말은 그의 시아버지 유다를 통하여 두 아들을 낳는다.
곧 쌍둥이 아들 베레스와 세라이다.
너무나 윤리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보란 듯이 들어가 있다.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유다는 구속사적으로 그리스도의 조상이다.
하나님은 속고 속이는 인생들을 통해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가신다.
속고 속임은 야곱과 유다의 속성을 넘어 아담 안의 모든 인간의 실존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던가?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신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자들을 가증스럽게 여기셨다.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굳게 믿는 유대인들에게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나 이들은 이미 자유롭다고 확신하였다.
죄에 종노릇을 하면서도 말이다.
이들이 확신하는 바는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아버지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짓의 아버지 마귀가 그들의 아버지라고 규정하셨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버지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천명한다.
또한 의인은 없으되 하나도 없다고도 말한다.
그가 천명한 말은 틀린 말이 없다.
야곱과 유다가 속이는 자로 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속이는 자들의 속임을 뒤집으시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일에 사용하셨다.
속이는 자들은 야곱과 유다만 아니라 아담 이후에 오고오는 모든 인생들이다.
거기에 나도 포함된다.
나야말로 속이는 일에 얼마나 크게 거들었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속이고 나를 속였던 자가 바로 나라는 자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성경에 기록된 야곱이나 유다의 속임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나를 드러내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런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이다.
나는 복음을 알고 난 후에 내가 얼마나 큰 심판을 받은 자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심판을 통해서 무덤의 복음을 알게 되었고 그 무덤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임을 깨닫는 순간, 나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주님이 주신 심판은 옳습니다.’라는 고백이 터져나오게 된 것이다.
이 고백을 통하여 지금까지 나의 모든 가치체계는 뒤바뀌기 시작했다.
만물 위와 만물 안, 창세전과 피조 세계가 확실하게 구분이 되었다.
창세전의 세계를 그저 단순히 하나님의 창조 이전의 시간 곧 직선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하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영원이라는 단어를 endless나 everlasting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창세전의 세계는 창세기 1:1절의 태초 그 이전의 직선적인 시간이 아니라 이는 피조된 만물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하나의 카이로스인 것임을 나는 알지 못하였다.
이제 영원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를 확실히 안다.
그것은 eternity로서 항상 현재인 하나님 나라요 영생(eternal life)이다.
따라서 무엇이 진정한 가치요 정체성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그토록 주기 원하셨던 것, 그것은 곧 생명이며 나아가 영원한 생명이다.
오늘도 이 생명을 위하여 나는 숨을 쉬고 호흡을 한다.
그저 단순히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그 숨과 호흡이 우리 주님과의 교제이며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나에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요 생명 그 자체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써 윤리 도덕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지하고 이를 드러내기 위하여 애써왔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내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한계적인 가치체계를 무너뜨리셨으며 오히려 이를 초월하여 추하고 괴악한 것들까지도 모두 품으셨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들까지도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임을 고백합니다.
이제 나를 주님 앞에서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나의 의와 나의 자랑 그리고 나의 이성적 판단까지도...
그리고 내 안에 오직 우리 주님의 뜻과 주님의 지각으로 채우길 원합니다.
제법 내가 괜찮아 보였던 이런 가치들이 그동안 나를 죽게 만들었나이다.
나를 옭아맸던 이러한 나의 생각과 나의 가치는 십자가에 못 박기 원합니다.
날 오직 주의 의로 세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실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사오니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