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답사에 참가자가 너무 적어 회원님에게 참여를 독려하는 문자를 발송하자는 제안을 듣고는 전체 회원에게 메일을 보냈다. 진지동굴과 같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진지를 탐방하는 답사가 상당히 어렵고 힘이 든다는 사실을 회원님이 알고 있기에 이번에는 몸을 사리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간단하나마 초청 형식으로 이메일을 드렸다. 선뜻 오시겠다고 연락을 주신 분이 계셔서 다행이었고, 앞으로는 답사 일주일 전에 참석 안내를 다시 한 번 공지를 하는 의미에서 문자나 메일이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갈수록 제주문화유산답사회가 질적으로 향상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정체되면 도태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연휴 기간의 마지막 날이기에 더욱 참여 회원님이 적었지만 처음 오신 분이 4명이나 되어 이전 답사 보다 신명나게 진행될 수 있다는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았다. 하여간 사회자도 불참이라 준비하여야 하므로 예전보다 일찍 제주흥사단에 도착하였다. 처음 참가하시는 분의 공통적인 사항이 제주흥사단의 위치를 모르시는 분이 많았다. 그러므로 오늘은 일찍 온 김에 제주흥사단의 주변을 둘러 보고 새로 작성하여 카페에 올리고자 약도를 그렸다. 백양 닭집, 장안마트, 한아름 정육마트, 신영종합철물, 서문시장, 그리고 제주흥사단 제주문화유산답사회를 주절거리면서 배회하고 보니 아기자기님이 오시고 회장님이 오신다. 제주흥사단은 장안마트 2층에 있다. 장안슈퍼점이라는 간판이 상당히 오래 붙어 있었나 보다. 전화번호 국번이 52-0892로 두 자리로 표기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앞에서 보면 장안마트 752-0892로 표기되어 있다. 세월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은 그 세월을 1940년대로 거슬러가고자 한다.
오늘 제일 먼저 답사하는 곳은 봉개동 명도암 고냉이술 진지동굴이다. 고냉이는 고양이요, 술은 수풀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표준말도 배워야 하고 제주어도 배워야 한다. 명도암에는 연대본부가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명도암 오름(안세미오름과 밧세미오름)과 칠오름, 열안지오름, 노리오름 등에 굴(갱도)을 팠으며, 고냉이술에 있는 진지동굴은 큰칡오름(칠오름)의 북동쪽에 동-서쪽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대형 분화구인 곶자왈 지역에 있다. 고냉이술의 남쪽에는 길고 넓은 목초지인데 서쪽에 있는 입구에서 300m 정도 동쪽으로 가서 곶자왈 지역과 만나는 지점에 비교적 입구가 크게 보이는 진지동굴이 남아 있다. 목초가 얕게 깔려 있어 시야는 훤하게 트이고 녹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장면은 좋았다. 목초를 가능하면 밟지 않고 변죽으로 둘러서 진지동굴 입구로 다가간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가려져 있는 동굴입구가 나온다. 커다란 고목을 엑스자 형태로 입구를 누군가가 막으려는 시도가 보인다. 입구에서 동굴 아래로는 직벽이다. 습기가 많이 머금은 상태라 미끄럽기 까지 하다. 진지동굴을 답사하는 경우에는 로프와 랜턴이 필수 휴대품목이다. 하지만 랜턴을 잡은 손을 놀리기가 자연스럽지 않아 내려가는 동안 미끄러질 위험이 언제나 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분이 미끄러졌다. 넘어진 자국이 등허리에 진흙으로 표시되어 우리를 안타깝게 하였다. 내일 아침이면 통증이 심할 수 있는데 걱정이었다. 이후 회장님이 로프를 가져와 안전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였는데 항상 안전이 제일이다. 동굴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박쥐가 허공을 휘 젓는다. 박쥐 똥에 곰팡이가 피어 하얗게 색을 피우고 있다. 고냉이술에 있는 갱도는 길이가 70여m 정도 규모로 조성되었는데, 전체는 ㄷ자형이다. 일본군이 2년 정도 주둔하면서 99식 소총과 대포를 싣는 장면이 이곳 주민에게 목도되기도 하였다. 고냉이술로 진입하면서 야트막한 언덕으로 올라가는 동안 발 아래로 펼쳐지는 장면은 탁 트인 조망이 진지를 구축하는 포인트와 일치한다. 제주의 숨겨진 비경이 있는 곳에는 여지없이 일본군 진지동굴이나 군사관련 시설이 있다. 그냥 밟고 지나간 것도 억울한데 파헤치고, 망가트리고, 메꾸고, 세우고 나니 제주 전역이 온통 몸살을 앓았다. 땅이 몸살을 했으면 그 위에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시달렸을지 상상을 넘는다. 벽면에 남아있는 곡괭이 자국을 보면서 내 가슴이 곡괭이에 찍힌 듯 비통함으로 전신이 아려온다.







오늘 오신 회원님 중에 송당에서 오신 분이 있다. 오르멍쉬멍, 오멍가멍과 발음이 비슷하다. 바로 그 송당에 있는 체오름으로 간다. “체”는 키를 말한다. 분화구 터진 모습이 키와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모두 키질을 해 본 경험이 있는 듯 하다. 안쪽으로 바깥 쪽으로 키를 움직이는 행동을 키질한다고 하면서 일본군을 키 위에 놓고 제주도 바깥 쪽으로 키질을 하면 모두 한 번에 물러가는데, 그 키질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 본다. 체오름은 구좌읍 송당리와 덕천리 경계에 있다. 분화구가 북동쪽으로 깊고 길게 터진 전형적인 말굽형 화구이기에 정말 숨겨진 비경이다. 남들이 모르는 바로 이곳에도 일본군은 여지없이 군사시설을 축조하였다. 화구 터진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군사시설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라는 주문이 있었다. 오늘 처음 답사에 참가한 최연소 참가자 준서군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저기 있어요.” 말한 사람이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찾았다. 답사를 오래 다닌 회원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머귀나무 맞은 편에 언뜻 언뜻 보이는 저수시설이다. 가로 세로 1.3미터의 작은 통과 3미터의 큰 통이 이어져 있다. 주변에 용천수가 없는 이유로 이곳에 일본군 급수시설을 축조하였다. 물이 없으면 죽고 말 것 이지 살겠다고 이 경치 좋은 곳에 발버둥을 친 흔적이 고스란히 있다. 다른 사람이 저수시설을 축조할 이유가 없기에 일본군 군사시설이 분명하다.
일본군 저수시설에 분을 삭일 수 없었지만 체오름의 비경을 감상하니 약간은 위로가 된다. 분화구 안에서 위를 바라보는 형상이다. 분화구 가운데에는 후박나무가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우리 회원 중에 한 사람이 “먼저 간 사람은 참으로 억울하겠다. 바로 이 체오름의 비경을 못 보고 죽었으니 말이다.” 했을 정도로 감탄을 자아낸다. 겨울 눈이 내린 후에 오면 더욱 좋다고 덧붙이는 한 마디에 겨울에 반드시 오고 말겠다는 결심도 해 본다. 분화구로 들어오는 길에는 철쭉과 동백이 빽빽하고, 흔치 않은 머귀나무 보인다. 제주에서 어머니 상을 치룰 때 쓰는 방장대를 머귀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뽕나무 열매인 오디도 따먹고, 인동덩굴에 핀 노랑 하양이 엉킨 인동 고장(꽃), 어머니에게 이롭다는 아주 쓰디 쓴 줄기가 사각인 익모초(益母草), 토양에 따라 꽃 색이 달라지는 수국, 쑥쑥 잘도 자라는 후박나무, 덕을 아는 예덕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체오름의 비경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체오름이 자아내는 비경에 감춰진 일본군의 저수조를 찾아 울분을 토로하는 가운데 두 군데를 둘러 보았는데 벌써 점심시간이다. 성산항에 있는 단촐하면서도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이 생각났다. 작은항해자의 도움을 받아 깔끔하게 해결하였다. 진지동굴을 답사하는 여정이 참으로 고되다. 그만큼 영양을 잘 보충해야 한다. 골고루 섭취할 수 있어서 회원 모두 반응이 좋았다. 생각하고 고민한 만큼 좋은 결과로 돌아 오는 모양이다. 다음 답사에도 더욱 더 맛있고 저렴한 식당을 찾아서 가련다.

하지만 지금은 성산리 서북청년단주둔소로 발길을 옮긴다. 어찌보면 점심을 먹은 식당 바로 옆에 있다. 그냥 치나치기 일 수 없으니 아는 만큼 보이는 진리를 다시 깨우친다. 4·3 당시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성산동교를 접수하여 3개월 정도 주둔하였다고 한다. 규모와 주둔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00여명의 군인이 주둔했다는 증언이 많다. 서북청년단 특별중대의 무자비한 폭력은 성산면과 인근 구좌면 지역 주민에게 악몽의 연속이었다. 툭하면 잡혀가 갖은 고문과 곤욕을 치렀는가 하면, 한번 잡혀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어려웠다. 이렇듯 잡아 온 주민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성산리의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에서 처형하였다. 특히 1948년 11월 28일, 18세 이상 80세 까지의 하도리 주민을 도피자 가족이라는 죄명으로 감자창고에 감금 시켰다가 29일 20여명을 터진목에서 집단총살하였으니 참으로 비참한 현실을 겪은 이곳 주민의 비통함을 어찌 위로 할 수 있으랴.
이제는 간신히 뼈대만 남은 건물 위로 덩굴이 올라가고 강물위에서 발로 젓는 오리 유람선이 차례로 줄을 서고 있다. 오리유람선 주인이 나와서 마음에 걸리는지 1대만 사려고 했는데 사가려면 9마리 모두 사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왔다고 한다. “서북청년단원 모두 오리유람선에 태워 바다에 보내고 몽땅 침몰시켜 수장시키주세요”라고 주인에게 마음으로만 외치고 또 외쳤다. 슬레이트 지붕이 남아 있는 건물 안에는 지게차 한 대가 지게발이 힘이 들었는지 땅에 내려 놓고 한 참을 쉬고 있다. 벽돌 공장으로 사용했는지 블록성형기와 건물 안에는 벽돌 받침대가 층층 쌓여 있다.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도 그저 지나쳤던 곳 인데 일반인은 오죽할까. 성산일출봉은 벌떼 같이 등성이를 메꾸고 있는데 역사의 아픈 현실을 철저하게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현장을 분명히 본다. 아프면 자랑하라고 했다. 다시는 아프지 않기 위해다. 치료 방법을 제 삼자가 알려 주기도 한다. 숨기면 숨길수록 아픔은 오래 지속되고 곪기 일쑤다. 아픈 역사의 현장을 허물어지고 낡게 만들고 음지에 숨어있도록 일부러 외면하기보다는 하루속히 양지로 옮기는 작업이 절실한 서북청년단 주둔소다.










아픈 역사의 현실은 계속 되었다. 암웨이 중국 인센티브 관광단이 성산봉에 덕지 덕지 붙어 있고 대한민국 국민을 통제하기 까지 했다고 하여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 통곡이 태평양전쟁 막바지로 거슬러 간다. 그저 성산봉 위에서 아래로만 아! 경치좋다외쳤던 바로 그곳, 해가 바뀌면 새로운 해를 맞으려고 있는 힘을 다 틀었던 성산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래에서 위를 본다. 정말 기가 막히는 장면이 목도되었다. 일본군이 파 놓은 신요(震洋) 특공기지 동굴이 흉칙하게 남아 있다. 성산봉의 남서쪽(수마포) 절벽에는 9개의 갱도진지, 서쪽에 2개, 동쪽에 2개, 모두 21개의 동굴이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군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대항하기 위한 “신요(震洋)”라는 자폭용 소형 보트를 숨겨 놓았던 곳이다. “대양을 뒤 흔든다”는 뜻의 이 병기는 80마력 엔진을 달고 뱃머리에 250kg의 폭약을 장착하고 했다. 자폭이 성공한 예는 단 한 건이라는 설명이 있었지만 성공 사례가 문제가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최후의 발악이 극치를 이루어 4대 특공 공격을 자행하였다. 항공 특공 카미카제(神風), 인간어뢰 가이텐(回天), 글라이더 부대 앵화(櫻花)와 더불어 폭탄보트인 신요(震洋) 현장이 바로 이곳 이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몸서리 쳐진다.
지금은 한가롭게 낚시를 하기도 하고, 성게와 문어, 소라, 전복을 따는 한 무리의 잠녀도 볼 수 있는 장소가 일제강점기에는 몸서리쳐지는 비참한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한 가지 사실에 내 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몰랐다. 갓 건진 흡인력 좋은 문어를 일본군 얼굴에 붙여 주려는 심산에서 꿈틀대는 문어가 얼마냐고 물으니 2만원이라고 한다. 시간이 부족하여 돌아섰지만 지금이라도 문어를 일본군 얼굴에 씌워 쪽쪽 빨아대라고 하고 싶다.















2부에 계속.......
첫댓글 제주지부 문화답사회의 글을 옮깁니다.
답사 후기의 모범적인 사례라 생각됩니다.
사진과 글이 적절한 후기.
좋은 후기 잘 읽었습니다.
이런행사도 있었군요
잘 읽고 갑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