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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입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자주 우울해집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청소년, 청년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스마트 폰이나 게임을 위한 모니터 화면 속으로 들어가보면, 삐까번쩍, 휘황찬란합니다.
뭐든 내가 다 할 수 있는 분위기, 내가 모든 것을 좌자우지합니다.
그러나 화면을 끄자마자 너무나 다른 암담한 현실이 내 앞에 펼쳐집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젊은이들만 그런가요?
연세 드신 분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사고인지 모르지만, 경제나 무역, 교육 등등 다른 지표는 상위를 달리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대는 좌절과 환멸의 시대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명감이 큰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즉 희망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절망이 깊어갈수록 더 추구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목숨 걸고 올라가야 할 에베레스트산 정상일까요?
아니면 지구 반대편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남단에 위치한 희망봉에서일까요?
그리고 그 희망은 언제 찾아야 할까요?
세월이 흐르고 흐른 먼 훗날 백 년 뒤, 천년 뒤에?
우리의 젊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호호백발이 다 되어 죽음을 앞두고서?
절대 아니겠지요. 희망은 멀리서, 어느 다른 하늘 아래서 찾을 일이 절대 아닙니다.
가까운 곳에서,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내 가족들 안에서, 내 직장 안에서, 내가 소속된 공동체 안에서 찾을 일입니다.
그 희망은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만나다 보면 참으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그야말로 고통 덩어리입니다. 스트레스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실감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빈자들의 사제 아베 피에르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입니다.”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 때 마다 힘차게 살아갈 강력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사람, 비록 이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세상임을 알려주는 사람, 존재 자체로 선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사람이 희망입니다.
비록 가까이 몸 붙여 살아가다보니 갖은 상처를 주고받지만, 매일 티격태격 매순간 좌충우돌하는 피붙이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 안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인간들의 마지막 희망, 최후의 보루로 남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당신 친히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오셔서 그들의 고통과 절망, 시름과 한숨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는 예언을 당신 생애 전체를 통해서 실현시키셨습니다.
오늘 희망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또 다시 선물로 베푸시는 희망의 이 하루,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 존재 자체로
그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게 할 선물이 되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헌신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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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옳은 말만 하는데 재수 없는 사람>
제가 말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용기를 드리려 해도, “당신이 나처럼 죽음 직전에 있나요?”, “당신이 나처럼 가난하나요?”, “당신이 나처럼 자녀를 잃어 보셨나요?”라고 말할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때조차 “그래도 용기를 내셔야죠!”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분들에게 재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말은 ‘끌어 올리는 말’이 있고 ‘밀어 올리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끌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밀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듀크 신학대학교에서 만난 앤지와 퍼시라는 커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 말하다가 퍼시가 앤지에게 대학교 때부터 좋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앤지가 퍼시에게 “그러면 당신의 이웃은 누구야?”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후 몇 주간 퍼시에게서 앤지의 질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앤지와 퍼시는 아파트를 떠나 리치몬드 처치 힐 중심가에 있는 오래된 도심지로 이사했습니다. 처치 힐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쇠퇴한 소위 할렘가였고 흑인들만 거주했으며 많은 이들이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그야말로 비참한 곳이었습니다.
퍼시와 앤지는 먼저 어린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퍼시는 농구공을 들고 아이들에게 농구를 시작했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이름을 외웠습니다. 조금씩 처치 힐 사람들은 그를 친구로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백인들처럼 그들을 범죄자로 보지 않고 이웃으로 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네 아이들은 퍼시의 뒤를 따라왔고,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비디오 게임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15명이나 퍼시의 귀가를 기다리며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은 퍼시와 앤지가 자신들의 숙제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것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믿고 집을 개방하여 아이들이 원할 땐 언제든지 그 집에 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에게 파티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지역 주민들은 퍼시와 앤지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백인 커플이 자신들의 동네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 아이의 엄마는 퍼시를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복경찰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퍼시와 앤지는 굽히지 않고 자원봉사자까지 구해 더 많은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2002년 CHAT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CHAT은 상주직원 45명과 자원봉사자 수백 명, 운영예산 25억 원의 기관으로 성장했고 지난 13년 동안 아이들 공부방을 시작으로 처치 힐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참조: ‘유쾌함의 기술’, 앤서니 T. 디베네뎃, 유튜브 ‘책한민국’]
앤지와 퍼시는 소위 사회적 ‘루저’(Looser)가 되어버린 동네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던 백인사회에 속해있으며 그들에게 설교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들도 우리 백인들의 도시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재수 없어!”
퍼시와 앤지 커플은 말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용기를 줄 수도, 재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높은 위치에서 마치 밧줄을 내려주며 잡고 올라오라고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등을 밟고 올라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밑에서 하는 말은 힘과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부류의 말씀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그들의 박해에 대해 “감히 하늘의 왕에게 이런 대접을?” 하며 분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숨고 숨어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박해받는 분이 되셨습니다. 분명 올바름을 선포하셨지만, 그 말씀은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말이 아닌, 사람들을 떠받쳐 올려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저는 말을 많이 하므로 재수 없는 잔소리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핍박을 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분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패치 아담스’(1998)는 의대의 엄격한 규율을 깨고 환자들의 눈높이를 맞춰 그들에게 웃음을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결국 자신의 이상에 꼭 맞는 병원을 설립한 헌터 아담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지 않고 웃음을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여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나의 말이 잔소리가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려면 내 목소리가 그들의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그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에 힘은 그 내용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위치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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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안식일 논쟁에 뒤이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아셨지만, 몰려든 많은 군중을 고쳐 주시는 일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이른바 ‘함구령’이라고 알려진 이 말씀을 여기서 되풀이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일까요? 우리는 그 실마리를 오늘 복음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이기시고 승리하실 때까지,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을 감추셔야 하셨습니다. 자칫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하여 그분의 존재 의미가 다만 ‘기적을 행하는 치유자’로 줄어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그렇게만 오해하고 따르던 이들은 결국 그분 곁을 떠나거나 심지어 그분을 적대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언뜻 무력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발걸음은 오늘도 쉬지 않고 십자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향한 군중의 흥분과 과장된 소문은 비극적 결말을 예고하는 듯하지만 그분께서 실제로 걸어가신 길의 끝에는 승리와 희망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희망의 빛이 너무 빨리 사그라들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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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14-21: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 준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이 어떻게 자신을 없앨까 모의하는 것을 아시고 조용히 다른 곳으로 물러가신 장면은, 단순히 두려움이 아닌, 인류 구원과 사랑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행동임을 가르친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이사 42,3)고 하셨다. 이는 그분이 약하고 부족한 이들을 파멸시키지 않고, 언제나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는 의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꺾지 않으시고, 우리 마음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참으시며 인내하신다.”(Enarrationes in Psalmos 33,2 요약)라고 말하였다.
교리서는 “그리스도의 사명은 단순히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을 회개로 이끄는 사랑의 사명”(545, 1846항 참조)이라고 밝힌다. 우리 자신도, 주님께서 참으시듯이 서로에게 관대하고 인내하며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이어서 이사야 예언서를 말씀하신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참조) 이는 예수님의 구원 업적이 완성되는 때,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시면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임한다.”(Summa Theologiae, III 요약)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정의와 사랑이 어떻게 동시에 이루어지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생활에도 구체적 교훈을 준다. 공동체 안에서, 혹은 직장과 가정에서, 약하고 부족한 이들을 그대로 존중하며 기다려 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예수님처럼 즉각적 심판보다 회개와 변화의 기회를 주는 사랑이 필요하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18절)라는 선언은 예수님의 완벽한 아버지 뜻 수행을 보여 준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일상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고통받고 상처받는 사람들을 돕는 일, 불의와 불평등을 바로잡는 일, 약자를 보호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와 인내의 종, 하느님께 사랑받는 종으로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며, 약하고 연약한 이들을 존중하고,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랑과 정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마음에 드시는 사람으로 불릴 수 있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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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서 오히려>
마태오 12,14-21 (주님의 종 예수님)
그때에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당신께서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마태 12,15-16)
물러서는 당신을 따르니
당신께서 오히려
당당하게 이끄십니다
슬픈 당신을 위로하니
당신께서 오히려
부드럽게 위로하십니다
아픈 당신을 보듬으니
당신께서 오히려
정성스레 보듬으십니다
작은 당신을 품으니
당신께서 오히려
따뜻하게 품으십니다
숨은 당신을 찾으니
당신께서 오히려
간절하게 찾으십니다
보이지 않는 당신을 바라보니
당신께서 오히려
애틋하게 바라보십니다
쓰러진 당신을 일으키니
당신께서 오히려
거뜬하게 일으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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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서 뉴스를 검색합니다. 세상의 소식이 손안으로 들어오는 시대입니다. 뉴스를 검색하다가 제 눈에 확 들어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삼성전자 미국 본사, 텍사스 플레이노 이전’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성전자의 미국 본사는 뉴저지에 있었습니다. 제가 뉴욕에 살 때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 뉴저지로 가면서 삼성전자 건물을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미국 본사가 달라스 인근 플레이노 쪽으로 옮긴다고 합니다.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2027년 말까지 이전한다는 보도입니다. 이 소식을 보면서 저는 단순히 기업의 이전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삼성전자 직원들과 가족들이 달라스 지역으로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면 우리 본당에도 새로운 교우들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본당은 2027년 설립 50주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50주년을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를 바라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새 신자분과를 중심으로 전입해 오는 교우들이 본당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동북쪽으로 도시가 계속 확장되면서 성당에 오기 어려운 교우들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본당 분가를 위한 위원회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교구장님과 면담을 추진하고, 미국 성당 안에 한인 공동체를 세우는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을 찾고 있는가?” 세상은 넓어지고, 도시는 커지고, 기업은 이동하고, 사람들은 더 좋은 기회와 더 높은 자리를 찾아 움직입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늘 물어야 합니다. 내가 찾는 것은 단지 성공인가? 내가 바라보는 것은 단지 숫자의 증가인가? 내가 준비하는 것은 단지 건물과 조직인가? 아니면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는가?
많은 사람을 영적으로 이끌어 주었던 헨리 나웬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하버드와 예일 같은 대학에서 가르쳤고, 많은 명예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그 자리를 내려놓고 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슈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좋은 자리를 떠나서 힘들고 낮은 곳으로 가셨습니까?” 그때 신부님은 이런 뜻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제가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때보다, 낮은 곳을 향해 내려갈 때 더 잘 보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엉뚱한 곳에서 진리의 보물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느님께서는 높은 자리, 많은 소유, 성공의 꼭대기에서만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은 자리, 아픈 자리, 실패의 자리, 눈물의 자리에서 더 분명하게 우리를 만나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미가 예언자는 악을 꾸미는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그들은 잠자리에서도 악을 계획하고, 아침이 되면 그것을 실행합니다. 남의 밭을 탐내고, 남의 집을 빼앗고, 힘없는 사람의 재산을 차지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욕망으로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권력을 향해 날아가는 사람에게 가난한 이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이익만 바라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보았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시고, 사람을 살리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눈앞에 진리가 있었지만 보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자비가 있었지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계셨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닫히면 예수님께서 눈앞에 계셔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왔고,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쓸모없다고 버릴 수 있지만, 주님은 다시 세워 주십니다. 세상은 희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주님은 꺼져 가는 불씨를 살려 주십니다. 우리 본당이 50주년을 준비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숫자가 늘어나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건물이 넓어지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새로운 공동체가 생기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본당이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새로 오는 교우들이 낯설지 않게 맞아 주는 공동체, 신앙이 약해진 교우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공동체, 상처받은 이들이 위로를 얻는 공동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기도로 하느님께 접속하면 좋겠습니다. 스마트폰은 충전하지 않으면 꺼집니다. 컴퓨터도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의 힘이 약해집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판단이 흐려집니다. 하느님께 접속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욕망과 걱정과 두려움에 끌려갑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주님께 몸을 맡기면 좋겠습니다. “힘없는 이가 당신께 몸을 맡기고, 당신은 친히 고아를 돌보시나이다.” 이 말씀처럼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닮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우리 본당이, 우리 가정이, 우리 각자의 마음이 주님께서 머무시는 집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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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시기 질투는 어디에나 있다>
“봄비가 기름 같지만, 행인은 그 진창길을 싫어하고 가을 달은 밝고 아름답지만, 도둑은 그 밝게 비추는 것을 싫어한다.”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싫어하고 시기, 질투하며 심지어 미워한다. 봄비처럼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다.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말을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어진 사람도 미워하는 무리가 있다. 선한 일을 하는데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소명에 충실하셨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하였다. 있는 그대로를 봐 주면 좋으련마는 눈엣가시로 보았다. 그들은 기득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를 앓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에 대응하지 않으시고 한 발 물러서는 지혜와 인내를 보여주셨다. 막무가내로 대드는 사람에게는 한숨 쉬게 하는 것이 좋다.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키워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품으셨다.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구원해 주셨다. 병을 고쳐주면서도 내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공을 감추시고 결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주셨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철저히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원 사업을 이루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슨 좋은 일을 해 놓고는 생색을 내다가 그 공을 다 잃고 만다. 선한 지향을 갖다가도 이내 시기와 질투심에 그 좋은 뜻을 놓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6,1) 고 하셨다. 무슨 일을 하든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서로 기도해 주길 바란다.
생각해 보자. “남이 어떤 일을 하는데, 시간이 걸리면 게을러서이고, 내가 시간이 걸리면 철두철미하기 때문이다. 남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으름뱅이고, 나는 바쁘기 때문이다. 누가 하라 하지 않는데 하면 월권이고, 나는 진취의 기상이 있어서이다. 남이 강력한 주장을 하면 그 사람은 고집스러운 것이고, 나의 경우는 단호한 의견 발표이다.”
“주님, 저희가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시며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성덕을 더해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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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금 타고 다니는 승용차 전에 15년 넘게 운전했던 차가 있었습니다. 워낙 튼튼했고 아무런 사고 없이 잘 타고 다녔는데, 어느 날 운전 중에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백미러로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글쎄 제 차에서 검은 무엇인가가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계기판 오일 게이지에 빨간색 위험 경고등이 표시되었습니다.
20년 넘게 운전하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차를 갓길에 세우고 차의 뒤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닛을 열어 보았습니다. 또 차 아래도 살폈습니다. 그 이상한 현상의 원인을 발견했을까요?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20년 넘게 운전했지만, 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차에 익숙할 뿐, 차를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성당에 매일 미사 나오고, 매일 기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고 주님을 제대로 알까요? 각종 봉사활동으로 교회 내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고 주님을 모두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주님께 익숙할 뿐, 주님에 대해 모두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던 분들도 어렵고 힘든 일을 겪으면서 주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판단으로 예수님을 단죄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어기는 것을 예수님께서 용인하셨다고 고발하고, 스스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며 율법보다 더 크신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또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그 사랑은 전혀 보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태 12,14)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마태 12,15 참조). 비겁한 도망일까요? 아닙니다.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기에,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묵묵히 이어가시려는 신중하고 주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를 ‘고난받는 종’에 관한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의 성취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도들과 백성에게 메시아의 역할이 무자비한 힘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는 봉사를 통해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특히 그분의 사랑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 갈등으로 오해받을 때, 똑같이 맞서 싸우거나 분노를 터뜨리지 않게 됩니다. 대신 예수님처럼 조용히 물러서서 하느님의 뜻을 묻는 지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에 집중한다면 그 지혜로 이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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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의 종 예수님>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14-21)>
1) 17절,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라는 말은, 15절에 있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에 연결됩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신 일은, 이사야서에 있는 예언이 실현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말이 앞의 8장에도 있습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16-17)
2) 메시아 예수님은 우리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없애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아픔과 슬픔을 없애 주신다는 말은, 참되고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구원’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병’은, 몸의 병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과 영혼의 병도 모두 가리키고, 죄와 마귀와 죽음의 억압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이 말은, 사도들의 다음 말들에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사도 2,37-40)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사도 16,29-32)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사도 4,12)
3) 19절,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라는 말은, 메시아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세속의 방식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자주 시끄럽게 만드는 사이비 종교들의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요란한 선전과 선동은 예수님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사랑’이고, 사랑은 원래 시끄럽지 않습니다. 사이비 종교들의 방식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3-5)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방식이 느리고, 답답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잃은 양’ 하나를 끝까지 찾아나서는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 착한 목자의 마음은 효율성을 따지지 않는, 사랑만 가득한 마음입니다.
4) 20절,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는, 메시아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아주 잘 드러내는 말입니다. 부러진 갈대는 꺾어서 치워버리는 것이 세속의 방식입니다. 만일에 늙고 병들고 쓸모없다는 이유로 병자들과 노인들을? 그런 사회는 곧바로 끔찍한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단 하나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우리는 ‘바로 나 자신’이 ‘부러진 갈대’일 수 있다고, 또는 언제든지 ‘부러진 갈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충실하게 믿음과 회개로 응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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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롬반외방선교회 김종근 도밍고 신부님]
<이방인들의 교회>
세계의 모든 국가나 민족 안에서 공통적으로 성대하게 지내는 중요한 행사가 있다면 그것은 곧 결혼식과 장례식일 것이다.
그런데 칠레 원주민인 마푸체 부족에게는 결혼식이 그리 큰 행사가 아니다. 물론 결혼의 중요성을 가벼이 여겨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결혼‘식’ 없이 어물쩍 그냥 같이 살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열 번 결혼식 주례를 하면 처녀 총각의 결혼식을 주례하기란 한 번, 잘해야 두 번 정도다. 대부분은 이미 두세 명의 아이들이 있는 부부들이다. 게다가 손자·손녀까지 있는 이들도 열에 두세 쌍은 된다.
상황이 이러하니 각 마을을 돌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미사의 영성체 시간이 되면 좀 난감하다. 이미 세례는 받았지만 혼인성사 없이 자녀를 둔 부부의 경우는 차라리 양호한 편이다. 이러다 보니 교회법으로 따지자면 ‘간음한’ 이들이 공소에 수두룩하다.
이들 대부분은 영성체하기를 원한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어떡하란 말인가? 그래서 그냥 눈 딱 감고 성체를 준다. 언젠가는 눈뜨고 할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세례를 받지 않은 이들도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이고, 다른 문화를 가진 이들 역시 하느님이 주재하는 인류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교회법에 짜증이 난다.
사랑의 실천보다는 조직 보호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듯한 교회법의 한계가 안타까운 것이다. 교회가 ‘순진한’ 이들에게만 강요하고 큰소리치는 모습이 싫은 것이다.
세례를 통해 일단 우리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서 보자고 하는 편협에서 벗어나 사회 전체, 온 세상에 열려 있는 교회가 될 수는 없을까? 이방인들이 희망을 거는 교회, 이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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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박상병 루도비코 신부님]
<고요함과 소란스러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그래서 그날이 안식일이어도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을 하신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눈엣가시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단순한 불평과 불만으로 끝나지 않고, 일을 확대시켜 논쟁과 논란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논쟁과 논란의 특징은 소란스러움이다.
물론 참된 발전을 위해서는 소란스러움이 늘 동반되지만, 그것이 참된 발전이 되려면 소란스러움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의견 충돌도 겪고,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을 때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느끼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과정에서 외적으로 내적으로 소란스러움을 겪게 된다. 이 소란스러움은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고,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마저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길은 소란스럽지 않고 고요히 나아간다. 그 결정적인 모습이 빌라도와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침묵이다. 침묵은 비겁함으로 드러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침묵은 그 어떤 훌륭한 연설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나를 죽이려는 모함과 위협 속에서 당당히 올바름의 길을 가려 할 때, 억울함과 실망감으로 고요가 파괴될 때가 있다.
악을 선으로 대하고 싶으나, 내적인 에너지가 부족할 때 선이 아닌 악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하느님의 영만이 고요를 지키게 해주고, 깨어진 고요함을 되살려 준다. 올바름은 고요 속에서 들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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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안식일 논쟁에 뒤이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아셨지만, 몰려든 많은 군중을 고쳐 주시는 일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이른바 ‘함구령’이라고 알려진 이 말씀을 여기서 되풀이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일까요? 우리는 그 실마리를 오늘 복음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이기시고 승리하실 때까지,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을 감추셔야 하셨습니다. 자칫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하여 그분의 존재 의미가 다만 ‘기적을 행하는 치유자’로 줄어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그렇게만 오해하고 따르던 이들은 결국 그분 곁을 떠나거나 심지어 그분을 적대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언뜻 무력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발걸음은 오늘도 쉬지 않고 십자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향한 군중의 흥분과 과장된 소문은 비극적 결말을 예고하는 듯하지만 그분께서 실제로 걸어가신 길의 끝에는 승리와 희망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희망의 빛이 너무 빨리 사그라들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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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마태 12,16)
<빌드 업(build up)!>
오늘 복음(마태 12,14-21)은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다고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해도해도 너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면서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왜, 그래셨을까? 왜,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피해 물러가셨을까? 왜, 사람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여정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그리고 세상 구원을 위한 땀의 찬가인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여정은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 십자가 죽음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이유입니다.
'빌드 업(build up)'
이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미리 계획된 대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아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 빌드 업의 종착점'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성탄)와 땀(공생활)은 이곳까지 가시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신 것이나, 당신께서 일으키신 많은 기적들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신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나의 빌드 업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고, 그 외의 것은 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빌드 업이지 아닐까요? 고통도 기쁨도 모두가 다. ㅎㅎ
오늘이 영원한 생명에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복된 빌드 업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분명한 목적을 바라보며 오늘도 최선을 다합시다!
Let it be(그냥 두어라)
Let it be(그대로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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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마태 12,16)
알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고요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고,
욕심을 내려놓으면
자비가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일은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보여 주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얼마나 진실하게
살아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참된 자유는 남들의 평가에서
벗어날 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보다
십자가를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사랑도 익어 가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내면이 중요합니다.
선행도, 봉사도, 기도도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이어야 합니다.
건강한 자아는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데서 비롯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내린 마음은
시련 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우리를 앞세우지 않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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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는 온유함>
미카 2,1-5; 마태 12,14-21
오늘 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꾀하는 자들”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밤에 악을 꾸미고 아침이 되면 그것을 실행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에 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2,1 참조). 여기서 악을 꾸민다는 표현은 계획적으로 악을 설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순간적인 죄가 아니라 조직화된 불의입니다. 그들은 밭과 집을 탐내어(חָמַד) 강제로 빼앗습니다. 탐욕은 단순히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절대적인 권리로 만들고 타인의 존엄과 권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봅니다. 약자를 배제하는 경제 구조, 서민들을 삶의 터전에서 밀어내는 부동산 투기, 사람을 오직 생산성으로만 평가하는 노동 환경이 그러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일상적 선택이 이러한 소유와 지배의 논리에 동참하는지, 아니면 공동선을 증진하는지 성찰하도록 초대합니다.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애기로 결의합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그들의 안정과 특권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으시고 힘으로 자신을 관철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마태오는 예수님 안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라.” 여기서 “소리치다”(κραυγάζω)는 상대를 압도하고 지배하려는 공격적인 외침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길을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의 온유함은 나약함이 아니라 성부께 온전히 신뢰를 두는 분의 힘입니다. 양극화와 혐오, 온라인 공간의 공격적인 언어가 만연한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오류와 불의를 지적해야 할 때에도 사람을 파괴하지 않는 평화로운 굳건함을 증언해야 합니다.
복음은 또한 깊은 위로를 주는 한 장면을 들려줍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부러진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상처받고 지쳐 있으며 낙심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가 외로움, 우울, 가정의 상처, 경제적 불안, 영적 피로와 같은 보이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급한 심판관처럼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종으로서 인내하며 회복시키십니다. 하느님의 참된 정의는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이들을 치유하고 다시 생명을 되돌려 주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서도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당시 사회가 경쟁과 부와 야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성인은 복음적 가난을 선택함으로써 미카 예언자가 고발한 소유의 논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이기려 하지 않았고, 겸손과 평화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특히 나병 환자들과의 만남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모두가 외면하던 이들에게 다가갔던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와 세상의 참된 쇄신이 타인을 지배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도록 내어 맡기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를 구체적인 회개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탐욕을 버리고, 재물과 시간과 영향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가정과 공동체와 일터에서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실천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배제하기 전에, 내가 바리사이처럼 행동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종처럼 행동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폭력 없이 진리를 수호하고, 교만 없이 정의를 실천하며, 가장 연약한 이들을 인내로 지탱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럴 때 복음이 선포하는 희망은 오늘 우리의 세상 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기경호프란치스코 of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