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 일본의 팽창 만주 침략(1931년)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4. 10.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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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일본의 팽창
만주 침략(1931년)
요약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무한한 팽창 야욕을 보였다. 1931년 만주를 점령하고 6년 뒤 북경 점령 후 상하이와 수도 남경을 침략하며 동아시아 전쟁을 개시했다. 일본이 인도차이나 남부까지 점령하자 미국은 일본에 수출 금지령을 내렸고 이는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본, 러일전쟁 승리 후 무한한 팽창 야욕을 드러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무한한 팽창 야욕을 보였다. 1차대전 중 연합국 측에 가담함으로써 쉽게 중국 산동반도에 대한 독일의 이권과 함께 캐롤라인 제도 및 마샬 제도를 차지했다. 러시아 혁명 뒤 1918년에는 군대를 동부 시베리아에 보냄으로써 그곳에 한 발 늦게 병력을 파견한 미국과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영국 · 일본 · 미국의 해군력 경쟁이 본격화되다
미국이 함대를 태평양에 진출시키면서 영국 · 일본 · 미국 3대 열강은 본격적으로 해군력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1922년 워싱턴 군축회담에서 영 · 미 · 일의 주력함 톤 수의 비율을 5:5:3으로 정하는 데 동의했지만, 나중에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일단 해상보다는 중국대륙에 대한 팽창정책을 우선적으로 추진했다.
일본, 서구 열강들의 해외 진출 관심이 떨어진 틈을 타 동아시아 전쟁을 일으키다
대공황 이후 서구 열강들의 해외진출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떨어졌다. 바로 이 틈을 이용해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아시아 대륙에 대해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했다.
만주사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이 센양에 입성하고 있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점령했다. 6년 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북경을 점령하고, 상하이와 수도 남경을 침략하면서 이른바 동아시아 전쟁을 개시했다.
노구교 사건
일본이 벌인 이 무력 충돌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중국이 일본에 패하면서 국민당의 무능, 일본군의 만행, 공산당의 영역 확대가 나타나다
장개석 휘하의 엉성하기 짝이 없는 중국군은 곳곳에서 일본군에게 패퇴하고, 국민당 정부는 겨우 명맥만을 유지한 채 양자강 상류의 중경으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해안지역과 주요도시를 장악하고 선량한 민간인 학살을 일삼았다.
장개석의 연설
장개석이 일본에 결사 대항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있다.
중국군은 인도차이나와 미얀마(버마), 그리고 소련을 통해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보급품에 의존했으나, 총 300개의 사단 중 약 10%만이 장개석에게 절대 충성을 바쳤다. 장비는 제조국과 모델이 너무 다양한데다가 부품이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병사들은 급료와 급식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고 질병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국민당 정부의 무능 · 부패와 일본군의 만행이 겹치는 가운데 공산당은 점차 영역을 확대해갔다.
만주국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여 세운 괴뢰국가.
일본, 유럽 열강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공략하면서 전쟁 준비를 갖춰 나가다
중국과의 전쟁이 장기전으로 흐르자, 일본은 만주 · 소련 국경지역에서 일련의 사건을 일으켜 소련군을 시험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님을 파악하고는 다른 돌파구를 찾던 중 1940년 프랑스가 독일군에 함락되자,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유럽인들이 2차대전에 빠져 있는 틈을 이용해 그들의 식민지를 공략하고자 한 것이다. 다만 필리핀에 있는 미국 군사력과의 충돌이 예상되나 요령껏 잘 피해나가거나 협상으로써 충분히 해결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중일전쟁
중일전쟁 중 상하이에서 벌어진 전투에 임하고 있는 일본군.
1940년 일본은 프랑스 령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하고 9월에는 독일 · 이탈리아와 군사 · 경제협력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 일본 동북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에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의 전쟁에 전념할 준비를 완전히 갖추기에 이르렀다.
미국,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수출 금지령을 내리다
1937년 일본해군이 정부의 워싱턴 군축회담 무효 선언을 축하하는 행진을 벌이고 있다.
그동안 조용한 반응을 보여온 미국은 1941년 7월 일본이 인도차이나 남부까지 점령하자, 드디어 일본의 팽창을 반대 · 저지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전면적인 수출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태평양에 막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영국과 네덜란드도 미국과 똑같은 조치를 단행했다.
석유수입을 미국에 80% 의존하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막대한 손해가 예상되지만, 미국과의 일전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수출금지를 해제하는 조건으로 1931년 이후 일본이 획득한 땅을 모두 환원시키라는 미국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것은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보다 더 굴욕적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초기에 승리를 거둔 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리라는 기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다
일본군부는 동남아시아를 정복한 다음 그 주위로 방어선을 설정하고, 그곳을 침범하려는 어떠한 적도 막아낸다는 개념의 구체적 전쟁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자원의 한계로 말미암아 미국에 대해 전면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이 따르는 전쟁에 쉽게 지치는 미국인들의 무른 성향을 계산하고, 초기에 승리를 거둔 후 적절한 단계에서 협상으로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태평양전쟁이라는 엄청난 불장난에 뛰어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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