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로 알려진 복음
벧전 1:8-12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벧전 1:8-12 /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분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분을 믿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땅 위에서 살고 있지만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행복감에 젖어 있습니다. 9) 바로 이같은 믿음이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한 것입니다. 10) 사실 이 구원이 어떤 것인지는 구원에 관한 예언을 기록한 예언자들조차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11) 그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영께서는 장차 그리스도에게 다가올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에 대해서 기록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그 일이 대체 언제 누구에게서 일어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12) 그들은 결국 이 일이 자기들의 생전에 일어나지 않고 그보다 훨씬 후대인 여러분의 시대에 일어난다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알았습니다. 이 기쁜 소식은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전해졌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은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알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 결과가 뒤따릅니다. 하나는 현재 고난의 한가운데서도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래에는 예수의 임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질 구원을 누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8-9)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있다고 칭찬합니다. 예수를 직접 보았음에도 사랑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보았다고 예수를 믿고 다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오직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받음의 또 다른 증거는 믿음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참 믿음은 기쁨의 이유와 대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세상의 것이 기쁨의 이유였다면 구원 받은 후에는 오직 구원과 그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기쁨의 이유와 원인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10-12) 베드로는 구원은 은혜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구원의 주도권은 오직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구원의 영광스러움과 신비스러움을 세 가지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1) 구원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것입니다. 그것을 예언한 선지자들도 부지런히 살피고 연구할 만큼 이 구원은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2)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으며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들어갑니다. 3) 천사들도 이 구원의 신비로움에 대해 알기를 원했는데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알 때, 감사하며 인내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전한 구원의 복음을 유기적으로 통일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베드로는 복음이 사도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구약의 선지자들과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모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시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 선지자와 사도 사이에 전혀 다름이나 복음의 변질이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
적용: 예수를 보지 못하고 사랑하고 믿으며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선지자들이 예언한 천사들이 보기를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구원의 주제는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입니다. 존귀하게 여기며 자랑하는 하루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약속하신 복음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하나님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과 치유의 능력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복음대로 살면 누구나 축복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나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영생구원으로 인도하는 능력이 되므로 복음 안에서 새 힘을 얻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구원의 4대 증거
베드로전서 1장 8-12절 / 이한규 목사
미국에 데이빗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해군 특수부대원으로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야간 공격 중에 적이 기관총으로 집중사격을 하자 그는 허리에 있는 백린(white phosphorus) 수류탄을 빼서 던지려고 일어섰습니다. 백린 가루는 공기와 접촉하면 급격히 연소해 밝은 빛과 고열을 내서 연막탄으로도 사용됩니다.
그 수류탄을 던지려고 팔을 뒤로 젖혔을 때 총알이 날아와 수류탄에 맞아 수류탄은 그의 귀 바로 옆에서 폭발했습니다. 강둑에 쓰러진 그는 그의 얼굴 가죽 일부분이 떠다니는 것을 보았고, 백린 가루가 몸에 박히며 몸에 불이 붙고 얼굴과 어깨에 연기가 났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 그는 동료 군인에 의해 옮겨져 하와이로 후송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처음 수술할 때, 수술 팀이 그의 탄 피부를 잘라내자 피부 속에 박혀 있던 백린 가루가 공기와 접촉해 다시 연소했습니다. 그러자 수술 팀원들은 수술 중에 사용하는 산소통이 폭발할까봐 그만 놔둔 채 수술실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나 얼마 후 그는 중환자 병동으로 옮겨졌습니다. 그의 머리는 농구공처럼 부었고 얼굴은 흉측하게 변했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그는 깊은 고독감과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 그 옆에는 부상당한 한 동료 병사가 있었는데 그는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잃었고, 얼굴도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병사의 아내가 미국 본토에서 도착해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보고 혐오스런 표정을 하며 곧 결혼반지를 손에서 빼 옆 탁자에 올려놓고 말했습니다. “죄송해요. 당신과 살 자신이 없어요.”
곧 그녀는 병실을 나갔고, 그 병사는 찢어진 목과 입으로 아무 소리도 못 내고 몇 시간 동안 서럽게 울었습니다. 그 아내의 행동은 그 병사에게 어떤 상처보다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며 마지막 희망을 짓밟았습니다. 결국 그는 이틀 후에 죽었습니다.
그 병사가 죽고 3일 후, 데이빗의 아내가 도착했습니다. 동료 병사의 일을 목격했던 그는 아내가 자기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아내는 그를 보자마자 그의 얼굴에서 붕대를 매지 않은 유일한 곳에 키스하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항상 사랑할 거예요. 우리가 마음을 함께 하면 이 어려운 상황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어요. 용기를 내세요.”
그는 아내의 말에 큰 용기를 얻었고, 아내를 통해 신앙심도 깊어졌으며, 또한 12번의 수술을 거쳐 기적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희망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TV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이끌도록 저의 고통을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고통으로 많은 유익을 얻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고통의 경험을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 구원의 4대 증거 >
믿음은 시련에 의해 강해집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가 된 성도에게는 고난도 승리의 표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백성이 된 것을 어떻게 압니까? 본문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는 4가지 증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을 사랑하는 고백
본문 8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고, 교회를 주님의 몸처럼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입술과 행동으로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초대교회 때는 극심한 핍박으로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려면 생명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믿음의 고백은 가장 뚜렷한 구원의 증표였습니다.
반면에 오늘날에는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해도 핍박하거나 죽이지 않기 때문에 그 고백의 진실성이 떨어집니다. 일부 교인들 중에는 일단 구원은 받고 보자는 식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믿는다는 사실을 감춥니다. 그러나 생활의 불편이 예상되어도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공개적으로 자신이 믿는 사람임을 고백하고, 식사 때는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식사 기도를 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의 고백을 했으면 믿음대로 실천하며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일전에 브라질 리우에서 환경회의가 열렸을 때 회의장에 쓰레기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 쓰레기를 보고 청소원들이 각국 대표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들은 환경을 사랑한다고 말은 잘한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돼지처럼 한다.”
성도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믿음대로 살지 않으면 불신자들이 말할 것입니다. “저들은 믿는다고 하면서 행동은 탐욕에 가득 찬 돼지 같다.” 그처럼 입으로만 “주님! 믿습니다!”라고 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고 고난이 있으면 쉽게 흔들리고, 쉽게 낙심하고, 쉽게 불평하고, 불안에 떠는 것은 구원의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의 믿음은 “죽으면 죽으리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기장에게 모든 것을 철저히 맡깁니다. 비행기가 흔들린다고 기장에게 “기장님! 비키세요! 내가 조종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죽는 길입니다. 그처럼 인생의 비행기를 목적지까지 무사히 안착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기장에게 철저히 맡기듯이 자신의 삶을 주님께 작은 부분까지 철저히 맡겨야 합니다.
이제 초대교회 당시처럼 긴박하고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죽으면 죽으리라! 망하면 망하리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사십시오. 또한 믿음의 고백을 했으면 일상적인 삶 중에서도 믿음의 말만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어려울 때마다 혼자 입으로 시인하는 말과 생각을 더 하려고 합니다. “나는 결국 승리한다! 나는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다. 더욱 준비하자! 조금 더 기다리자! 하나님은 반드시 기회를 주신다!”
어려워도 그런 말을 하면 영혼에 소생하는 힘이 생깁니다. 반면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부정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면 되던 일도 안 되고, 불행한 것처럼 느껴지고, 낙심이 틈탑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은 우리의 입을 주목하십니다. 행복과 축복은 거의 입에서 주어집니다. 입에서 불평이 나오는 순간 행복의 기운도 빠져나갑니다. 반면에 감사와 믿음의 고백은 행복을 부르기도 하지만 구원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2. 믿음에서 생기는 기쁨
본문 8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이 구절을 보면 구원의 믿음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생각하며 기뻐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힘든 고난이 있어도 구원이 크게 보이면 고난은 작게 느껴지고 마음의 기쁨과 평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이 있는 것은 구원받은 좋은 증거입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은 ‘피난처(The Hiding Place)’란 책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코리 가족은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수용소로 붙들려갔습니다. 코리와 언니 벳시가 처음 수용소 막사에 들어갔을 때 막사는 사람과 벼룩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날 아침 그들이 읽은 성경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나오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인데, 그 말씀을 기억하며 벳시는 코리에게 하나님께 세세한 부분까지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코리는 다른 모든 문제는 다 감사할 수 있어도 벼룩에 대해서만은 감사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언니는 그녀에게 벼룩 문제도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코리는 간신히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벼룩을 주셔서 감사해요.” 그 후, 몇 달 동안 그들은 막사에서 독일군의 감시 없이 자유롭게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회도 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군이 벼룩 때문에 감시하러 막사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코리는 벼룩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기뻐했습니다.
문제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그분의 선한 목적을 따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실패 중에도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삶에는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할 때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패해도 기쁨을 잃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면 삶은 감동이 되고, 축복의 열매는 맺게 됩니다.
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오래 삽니까?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몸과 마음이 약합니다. 특히 출산 후에는 몸의 기가 많이 빠지고, 몸의 곳곳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오래 사는 이유는 황수관 박사의 말에 의하면 여자들이 잘 웃고 잘 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작은 일에 감동하고 고난 중에도 기뻐할 줄 아는 것은 건강의 비결이기도 하고 구원의 실질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3. 구원을 끊임없이 추구함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절은 믿음의 결론이 ‘영혼의 구원’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가끔 누가 “왜 교회에 다니세요?”라고 물으면 조금 유치한 것 같아도 “천국 가려고 믿는다.”고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인격수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격수양도 약간은 있지만 그것이 신앙의 결론은 아닙니다. 또한 신앙생활은 축복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축복을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축복이 없을 때 금방 시험에 빠지고 신앙을 잃습니다. 물론 신앙에는 축복도 있지만 구원이 없는 세상 축복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결론은 구원받아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에 있습니다.
그처럼 구원을 가치 있게 보는 태도도 구원받은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구원을 무엇보다 가치 있게 보고 끊임없이 구원의 문제를 연구하고 추구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그처럼 선지자들이 구원의 은혜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내린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선지자들은 구원의 문제에 대해 깊이 연구한 후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길을 여실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깨닫고 어느 때 그런 일이 있을까를 부지런히 연구했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선지자들이 구원의 문제를 중시했습니다. 그처럼 구원을 중시하라는 말은 결국 주님의 십자가를 중시하고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를 중시하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돈이 많으면 “잘 산다!”고 표현하지만 가난해도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부자도 잘못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잘 살고 잘못 사는지는 최종적으로 인생을 마감하고 하나님 앞에 가봐야 압니다. 돈이 많다고 가정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돈 때문에 형제들끼리 싸우고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돈이 많다고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돈 때문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서 이혼하는 가정도 많습니다.
결국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은 돈으로 결정되지 않고 관계로 결정됩니다. 진정한 축복은 관계에서 좌우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형제와 이웃과의 관계를 망치며 사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 아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람은 결코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못 사는 사람입니다.
진정 잘 사는 사람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 죄의 문제를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 해결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구원의 은혜에 항상 감격하면서 주님과 깊은 관계를 이루어가며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입니다.
4. 복음을 전하는 삶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당시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성령을 힘입어서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처럼 구원받은 사람들은 구원받은 것에서 끝나지 말고 그 구원의 은혜를 불신자에게 전해야 합니다.
또한 이 구절을 보면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삶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전도는 천사들도 흠모하는 삶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만약 하늘 문이 열리면 우리는 하늘의 신비를 들여다보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이 땅을 내려다보면서 구원의 복음과 전도하는 모습을 살펴보려고 애씁니다.
그 말은 하늘에서 보기에 가장 위대한 것은 구원의 복음과 전도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영원히 죽을 사람이 영원한 천국백성이 되니까 전도가 얼마나 신기하고 놀랍고 매력적인 것입니까? 하나님은 전도를 천사들을 통해 하도록 맡기지 않았고 성도들을 통해 하도록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가장 부러워하면서 쳐다보는 것이 바로 성도의 전도하는 모습입니다.
천사들은 구원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들인데도 구원의 신비를 살피고 전도하는 모습을 흠모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 구원의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어떤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영혼 구원에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영혼 구원을 위해 잘 사용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축복 받은 사람이고 앞으로도 대대손손 축복 받을 사람입니다.
미국의 철강 왕 앤드류 카네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자로 만들지 않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다.” 실제로 카네기와 함께 일했던 사람 중에 43명의 백만장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처럼 자신의 좋은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이고, 자신의 축복을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더 축복받습니다.
지금 미션퍼블릭에서 3번째로 발간할 저의 책 ‘40일 간의 성령님 묵상’이 탈고되어 출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책을 7월 초에 출판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몇몇 분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인도의 이상기 선교사님이 찾아와 캘커타에 선교센터를 짓는 비전을 얘기했고, 케냐로 선교를 떠나는 한상희 선교사님이 찾아와 기도제목을 나누었고, 필리핀에서 김일로 선교사님의 선교메일을 받았고, 마지막으로 한 후배 목사가 찾아와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고 집도 없이 어렵게 사는 얘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때 미션퍼블릭 통장에 남은 재정을 놓고 고민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때에 한꺼번에 그런 기도제목을 듣게 하십니까? 3번째 책 출판을 조금 미루어야 합니까?” 잠간 고민을 했지만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4분에게 급히 재정이 필요한 분에게는 많이, 별로 급하지 않게 느껴지는 분에게는 적게 배분해서 미션퍼블릭에 남은 모든 재정을 인터넷 뱅킹으로 다 송금시켜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어리석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사업을 하면 다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미션퍼블릭의 존재하는 제일 목적은 선교입니다. 그 목적에 충실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출판도 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의 소중한 문서선교의 비전도 무너지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더 귀한 동역자와 후원자를 붙여주셔서 우리의 비전을 견고하게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이제 혼자만 잘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함께 잘 살려고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기꺼이 나눠주려고 하십시오. 특별히 우리가 나눠주어야 할 최상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의 복음입니다. 자신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가 정말 소중하다고 믿는다면 그 구원의 복음을 나누는 일에 가장 최우선적인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전도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업입니다.
<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
요즘 전도가 아주 힘듭니다. 자기 것을 다 빼어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진심을 몰라주고 오해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시골에 한 믿음이 좋은 며느리는 믿지 않는 시어머니의 핍박 속에서도 늘 눈물로 시어머니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힘들 때마다 찬송가 395장을 잘 불렀습니다.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어느 날, 며느리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그 시어머니에게 전도했습니다. “할머니! 이제 교회 다니세요. 며느리가 할머니를 위해 얼마나 눈물로 기도하는지 몰라요.” 그때 시어머니가 화를 벌컥 내며 말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요? 제가 숨어서 며느리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너무 기가 막혀서 가사를 다 적어 두었어요. 이거 보세요.”
할머니가 보여준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너 시어밀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늘 물리쳐라/ 너 시어밀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그 쪽지를 보여주며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것 봐요. 걔는요. 시어밀 물리치고 시어밀 이겨먹는 게 최대 소원이에요. 그런 모습을 보고 제가 교회에 나갈 맘이 생기겠어요?”
전도하다보면 진심을 몰라주고 그런 오해가 참 많습니다. 그래도 전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사가 흠모하는 전도를 포기하면 우리는 결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구원받는 자라면 당연히 전도할 것이고, 전도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하지 않으면 내 사랑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 엄연한 현실을 가볍게 여기고 전도를 외면한다면 너무 냉정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춘천에 사는 사업가 김씨가 부산으로 출장 가며 아내에게 이틀 후에 부산에 내려와 함께 휴가를 보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산이 너무 더워서 다음날 아내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주소를 잘못 쳐서 엉뚱하게 메일이 얼마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목사 사모님에게 발송되었습니다. 사모님은 그 이메일을 받고 그만 기절했습니다. 그 메일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여보! 이 아래는 무척 뜨겁소! 너무 고통스럽소! 당신은 이곳에 오지 마시오!”
그 유머가 진짜 현실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불신자들이 지옥 불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지 않은 채 나만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면 그 모습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이제 불신자를 외면하고 나만 혼자 예배드리면서 좋아하는 비정한 예배자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전도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도를 천사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전도를 통해 놀라운 상급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천사들도 흠모하고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특히 전도하는 삶이 소중한 이유는 전도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내가 구원받은 결정적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원받은 사람의 4가지의 증거를 살펴보았는데, 이 증거들이 오늘 이후부터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1:10-12 / 조정의 목사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부나 명예, 안전, 건강 등을 주시기를 원하셨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 가장 기쁘고 즐겁고 복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이라는 주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측면에서 보면 ‘구원의 역사’이고, 성경도 ‘구원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결국 성경은 구원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를 통해 계속해서 이 구원이라는 주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1장 1, 2절에서 성도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구속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이라는 구속사역이었습니다. 3-12절까지는 이것에 대한 긴 찬송시로, 3-5절은 아버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찬양하고 있고, 6-9절에서는 매일의 삶에서 성도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제 10-12절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차례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찬송가의 가사는 직접적이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은 우회적인 표현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찬송하고 있는데, 그분이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기다리고 찾으려 했으며 전파했던 분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원에 대해 얼마나 크게 기뻐하고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에게 별로 큰 기쁨이 아니십니까? 구원이 나에게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에 그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내가 잊어버린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 구원에 대하여는”(10)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10-12절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12) 여기서 말하는 “이것”은 모두 구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앞의 3절에서는 “산소망”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4절에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 5절에서는 “구원”, 9절에서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소아시아 성도들은 여러 시험 가운데 있었습니다. 많은 어려움 때문에 힘들고 낙심할 수 있는 그들에게 베드로가 보여준 위로의 말씀은 바로 이 “구원”이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도 위로와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10-12절)에서 베드로는 이 구원에 대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고 전하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과 복음을 전하는 자들, 마지막으로 천사들입니다.
선지자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 살았던 자들로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야에 대해 연구했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후나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했던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말씀에 대해 계시한 분은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성령”(11)이십니다.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10)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이 편지를 받는 소아시아 성도들뿐만 아니라 구약의 성도들도, 오늘날 여러분과 저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왜 특별히 “너희에게(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임할 은혜”라고 했을까요?
‘구원’이라는 단어는 ‘어려움과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위험에서 구원되었나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1:18) 우리는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헛되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입니다. 그는 전도서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1)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장을 통해 인생의 헛됨을 말하던 그가, 전도서의 마지막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고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법을 지키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행위와 은밀한 것을 가지고 나가서 ‘나는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는 모든 인간은 헛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이 땅에서 지식과 부, 쾌락을 누릴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소용없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로 세상에는 헛된 인생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헛된 것들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만족시켜 줄 누군가가 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죄로부터 구원할 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얻게 해줄, 인간의 헛된 삶의 고리를 끊어줄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인간이 죄를 범한 결과로 죽음이 임하게 됩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그리고 5장을 보면 아담 이후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죽어나갑니다. 인간은 이렇게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에 처하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약속하십니다.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누군가가 약속된 것입니다. 죄에 대한 저주와 동시에 죄의 사슬을 끊어줄 구원자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분이 오셔서 죄의 사슬을 끊어주기를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 인류를 헛된 삶에서 건져낼 구원자, 과거에는 가려져 있고 그림자와 같았지만 이제는 확실해진 사실, 그것이 소아시아 성도들과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임할 이 은혜에 대해 예언을 했을까요? 그들은 단순히 말씀을 받아 전한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폈다고 말합니다. 매우 집중하고 몰두해서 메시야에 대해 연구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11)이 증언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증언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받으실 고난과 후의 영광”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했습니다. 장차 오실 분의 “고난”과 “영광”을 말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1000년 전에 다윗은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22:1),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22:6-8).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22:22),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22:27)의 말씀으로 주님의 고난 이후의 영광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BC 700년에 이사야는 주님의 고난을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또한 9장에서는 메시야의 영광을 예언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BC 500년에 다니엘은 장차 있을 일과 기름 부음 받을 자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 9:24-26). 그리고 구세주의 영광받으실 것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의 약 4천 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구세주의 그림자를 믿고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를 포함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그들처럼 그림자나 추측이 아니라,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어떻게 오셨고 무슨 일을 하셨으며 우리의 죄를 해결하신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고 확신할 수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것이 큰 은혜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부지런히 살피고 알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은 결국 너희들(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고 너희들 때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12).
저는 가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의 삶을 보면서 ‘나도 그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고 기적을 경험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그림자를 붙잡고 살았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죽으심, 승천하심을 분명히 알고 믿고 있는 우리를 얼마나 부러워할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소아시아 성도들을 위로하면서, 이 구원이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얼마나 기다리고 바라던 것이었는지를 알고 있냐고 말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옥에 갇혀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라고 묻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오랜 시간동안 연구하고 살폈던 바로 그 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주님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5:11)고 답하십니다. 이것은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말씀을 직접 언급하신 것입니다. 즉 이사야에게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자신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45).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메시야가 바로 자신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6-48).
우리는 너무나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의 그림자를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신 메시야의 확실한 실체를 보고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2)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지켜온 선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39)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고 기다린 것은 그들 시대에 성취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여러분과 저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우리에게 넘치도록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구원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계십니까? 너무 쉽게 생각하고 그 가치를 잘 깨닫지 못하며 살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는 구약의 많은 성도, 하나님의 약속만 붙잡고 고난의 삶을 살았던 그들이 바라고 기다렸던, 연구하고 답을 얻기 원했던, 그 해답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 사실에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으면 구원이 보입니다
벧전 1:7-12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도 지난주에 이어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구원의 비밀’에 대한 말씀입니다.
7절 함께 읽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땅속에 묻혀있던 금광석도 순수한 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불로 수차례 연단을 해야 하는데, 하물며 죄 중에 깊이 빠져있던 우리가 구원받은 의인의 삶을 살기 위해 연단을 받아 순수하게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냐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인데, 이것을 안다면 어찌 주어진 시련들을 기쁨으로 찬송하며 이겨내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막상 시련 앞에 서면, 내가 배우고 알고 있는 신앙의 원리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시련이 분명히 필요하고 연단을 받아야 진정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아는데 정작 시련 앞에 서면 몸이 따라주지를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시련만 바라봄으로써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합니다.
몸과 마음이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가장 마음 아파하시는 분은 누구겠습니까?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시련을 이길 수 있도록 비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을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베드로전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시련을 이길 수 있는 비법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은 잠깐이고(6절),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불철주야’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에(5절), 우리가 이것을 믿고 찬송하며 시련을 마주한다면 시련의 끝, 곧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는 반드시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7절).
그러므로 우리가 시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시련을 통과한 다음의 상황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이 아니라,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련은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시련을 이겨내면서 점점 더 멋진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감을 믿는 것입니다.
1. 그런데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수많은 기적들을 체험했기에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지, 자기도 그만한 체험을 하면 믿음을 지킬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예수님을 직접 보고 기적을 많이 체험했기에 순교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지킨 것일까요?
8~9절 /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지금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의 수신자인 초대교회 성도들도 우리들처럼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자들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목숨의 위협을 받는 시련 중에서도 신앙을 지킨 것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분들도 우리들처럼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믿었고, 믿음으로 인해 박해 받던 그 순간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분들은 오직 장차 있을 구원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찬송하며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부활하신 예수님과 도마의 만남’을 기억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동료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 손에 있는 못 자국과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던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직접 만져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영혼을 사랑하셔서 경험해 보고라도 믿기를 바람에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신앙의 바른 자세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신앙의 자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고 믿는 자도 복되지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욱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욱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기적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것이 복음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의심되는 말씀이 있고, 그것을 직접 체험하기 전까지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되시는 말씀이 있다면, 오늘 그 말씀을 다시 읽으시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성령께서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2.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은혜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오래 전에 미리 앞서 하나님을 믿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로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그분들도 예수님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기록했습니다.
10~11절 /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예수님의 복음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오래 전부터 이미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셨고, 이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이 자세히 살피고 연구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느 때에 어떻게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지 우리에게 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 책이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감추셨던 비밀을 풀 수 있는 지침이 기록되어 있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구원의 길이며,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또, 그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초대교회가 형성될 당시 ‘구약성경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구약의 예언이 완성되었으니, 더 이상 구약성경을 읽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에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은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는 이스라엘 역사와 지금은 사라진 성막, 제사법, 성전, 정결법 등이 기록되어 있고, 내용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치 면에 있어 구약성경이 신약성경보다 덜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도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에 비해 신약성경이 구원과 진리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힌트를 주는 책이라면, 신약성경은 정답을 주는 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듯이 구약성경을 읽어야만 예수께서 수천 년 전부터 이미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확인할 수 있고, 예수께서 유일한 구원의 통로임을 더욱 확신할 수 있습니다(요 5:39).
또한, 만일 구약성경이 없다면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샬롬’, ‘여호와 닛시’, ‘임마누엘’이라는 고백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언이 없다면 어떻게 성취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구약성경도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풍성한 영적 교훈과 강력한 메시지가 한 구절 한 구절에 배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경시하거나, 어렵다고 회피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반쪽 귀와 반쪽 눈으로만 듣고 읽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그만큼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구원의 날이 기다려집니까?
구원의 날이 기대가 됩니까?
구원받을 것만 생각하면 설레어서 잠이 오지 않습니까?
원래,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구원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갖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온갖 유혹과 거짓으로 인간의 심성을 왜곡시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함으로 인간에게 있던 소망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소망과 기대의 자리에 ‘두려움과 절망’을 채웠습니다.
구원에 대한 소망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시대 사탄의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탄의 공격은 신약시대에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이 땅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절망은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이는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전략을 바꿉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에 관심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그만큼 진리에서 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예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영혼의 구원’을 전하는 것은 차라리 반발하는 사람에게보다도 훨씬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구원에 대한 무관심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영적 타락의 적신호’라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구원에 대해 관심없다’라는 말을 한다면 이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장차 그에게 임하게 될 영원한 심판을 기억하고 그 영혼을 위해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이유이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 중에서도 찬송하며 믿음을 지킨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혼에게 구원에 대한 관심과 소망을 성령께서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성령께서 그 마음의 문을 여시고 복음이 그를 살리는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선지자들에게 계시된 복음이 어떤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지 말씀합니다.
12절 /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먼저, 베드로는 10~11절에 기록된 것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신에게 계시된 예수님의 구원에 대하여 부지런히 살피고 상고한 이유는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함이었다고 말씀합니다(참고. 롬 4:23~24, 15:4, 고전 9:9~10, 10:11).
베드로가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생소하고 낯선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로부터 시작되어 신약시대에서 성취된 계시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라고 말씀하는데, ‘하늘로부터’라는 표현은 그 주체가 ‘성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요 14:16, 15:26, 16:7, 행 2:33).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에 의하여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메시아의 받으실 고난과 영광을 예언했던 것처럼(11절), 신약시대에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여기에서 성령의 절대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성령을 힘입지 않으면 그 누구도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아무런 사역도 하지 못한 무기력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이 임하자 수천 명을 회심시키는 등 놀라운 복음 전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은 구원의 신비는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조차도 깨닫기 힘든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지혜’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에게조차 감추어진 이 비밀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밝히 드러나게 되었으니(고전 2:6-8), 우리들이 얼마나 큰 특권을 가진 것입니까?
그 믿음이 좋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천사들도 누리지 못한 것을 우리는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모든 비밀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모두가 다 오직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의 비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칩니다.
또한, 인간의 기원과 궁극적인 목표,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답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내고, 시간을 정하여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읽은 것을 삶의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믿음의 시련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구원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전해지고 이루어졌는지 깊이 묵상하되, 성경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믿음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할진데, 어찌 거저 얻어지겠습니까? 고난의 연단이 저희 앞에 다가올 때 오늘 말씀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믿음의 선배들이 핏값으로 남겨준 교훈의 말씀을 지혜로 삼고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도 후손들에게 좋은 믿음의 선배들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찬송 받으실 우리 하나님
벧전 1:3-12 / 정도열 목사
사도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문안한 후에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했다. 이런 말은 요즘은 잘 안 쓰는 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을 찬송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합시다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표준번역에서는 “찬양을 드립시다.”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당시 이 편지를 받는 분들은 찬양드릴 만큼 평안한 상태에 있지 않았다. 로마의 핍박으로 흩어진 나그네들이다. 이들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재산을 몰수당하기도하고,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분들도 많았다. 겉으로 보면 이들은 노숙자들처럼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거룩한 나그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일 먼저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송합시다라고 선포한다. 오늘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우리의 처한 현실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세 가지 이유를 말해 주고 있다.
I. 우리에게 산 소망을 있게 하심(3,4)
3절을 보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그 많으신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이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두 번 태어나야 한다. 한번은 어머니 배속에서 육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육으로 태어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 3:6)고 하셨다. 사람이 육으로 한번 태어나야 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영으로 태어나야 한다. 육으로 태어나는 것이나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나 공통점은 둘 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있나요? 이처럼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태어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했다(요 1:13). 그런데 조직신학적으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완전히 부패한 인간이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그 많으신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거듭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가?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영적인 눈이 떠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다. 영적인 감각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영적인 귀가 열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며 섬긴다.
무엇보다 거듭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산 소망을 간직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4절을 보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산 소망은 결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받는 것이다. 그 유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는다. 그것은 자녀의 권리이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누구에게 물려주겠는가? 이 하나님 나라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거듭난 사람은 희망이 다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희망은 썩고 더러워지고 쇠하는 희망이다. 그들의 희망은 참된 희망이 아니다. 우리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을 잘 알고 있다. 이 책에 보면 세상에 처음 태어난 호랑 애벌레는 '삶의 의미'를 찾아 여행을 시작한다. 수많은 애벌레가 큰 기둥을 이루며 꼭대기로 올라간다. 그 꼭대기에는 희망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줄무늬 애벌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라간다. 그러나 그 꼭대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미리 올라간 벌레들이 내려오면서 위에는 희망이 없다고 외쳐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계속 정상에 오르면 거기에 희망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를 쓰고 오른다. 치열한 경쟁 사회의 인간의 모습을 희화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일하는 곳에 정상에 오르려고 한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정상에 도달하면 이미 그곳에는 희망이 없다. 그래서 희망은 파랑새와 같다고 한다. 잡으러 가면 또 저만치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무지개를 잡으려는 소년처럼 살게 된다. 희망은 우리를 계속해서 실망시키고, 우리를 속인다. 속으면서도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실존주의 철학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키에르케코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책에서 결혼을 해보라. 그러면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지 말아보라 그러면 후회할 것이다. 아파트를 사보라 후회할 것이요, 사지 말아보라 후회할 것이다. 사랑을 해 보라. 후회할 것이요, 사랑을 해보지 말아보라 후회할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계속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다. "잡으려는 소망은 헛것이라.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낙담하지 않겠느냐?"(욥 41:9)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희망이 없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는다고 해도 결국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 장사가 없다. 죽음 앞에 모든 기대와 소망과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요, 파멸이다. 절망, 좌절, 무의미, 허무에 종노릇한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동안 마귀의 종노릇한다(히 2:14,15).
지난주에 우연히 제 아내와 함께 고 이은주 씨가 남긴 유작 주홍글씨라는 영화를 TV에서 보게 되었다. 그녀는 음대를 졸업했으나 밤무대에서 일해야 하고, 동성연애를 하다가, 한 남자를 사귀게 되었는데, 그 남자가 동성연애하던 친구와 결혼해버린다. 그러나 그 남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친구의 남편과 계속 불륜을 이어가다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생일날 남자 주인공과 함께 자동차 트렁크 속에 갇혀서 유산을 하고, 거기에서 자살을 하게 된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희망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홍글씨가 개봉된 지 일년 후에 이은주 씨는 25살의 나이에 실제로 자살을 했다. 배우로서 그는 성공한 편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에게 있는 희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희망이다. 영원히 살아 있는 산 소망이다. 이 소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산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3절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라는 말이 나온다. 영어로 보면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from the dead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아니라 정확하게 번역하면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다.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밖에 없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멸하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이다. 무화과나무를 보면 첫 열매가 맺히면 그후에 수많은 열매가 맺힌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보증해주는 사건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되었다(고전 15:22).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인생들에게 주는 의미는 참으로 크고 놀랍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면 그만인데 이렇게 힘들게 살아봐야 뭐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 한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을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 소망을 산 소망, 살아 있는 희망이라고 했다.
우리 인생들은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이다. 희망을 잃으면 살 소망이 끊어진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은 삶이 되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고난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고난을 참고 견딜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희망이 있어야 의욕도 생기고, 힘이 솟는다. 그렇지만 성경은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고 했다(롬 8:24). 보이는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기 때문이다. 보이는 소망은 우리에게 실망만 안겨줄 뿐이다.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다. 그런데 그 남편이 자기의 사랑을 배신하고 바람을 피웠다. 또 새로 만난 남편도 다르지 않았다. 더 큰 상처를 주고 떠났다. 다섯 남편을 가졌으나 점점 더 상황은 나빠졌다. 상처는 커지고, 남자에 대한 환멸만 느겨질 뿐이었다. 그렇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 또 다른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다. 여러분, 남편이 여러분의 산 소망이 될 수 있나요?
또 물질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도 있다. 부부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런데 재물이 많아지니까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가정이 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 자식에게 소망을 두고 사는 분들도 많다. 그래도 자식에게는 소망을 둘 만하다. 그렇지만 요즘 우리나라에는 노인학대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가해자는 35%가 아들이고, 그 다음이 며느리들이다. 노인들의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부모는 자식을 평생 AS 해준다. 그러나 자식은 늙은 부모를 헌신짝처럼 대우한다. 지금도 그런데 여러분의 세대에 가면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살아 있는 소망을 주셨다. 하나님은 죽음의 권세를 멸하고,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평생 살았다. 3대에 걸쳐서 장막 생활을 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았다. 더 크고 영원한 한 성읍을 바라보았는데, 이 성은 하나님이 자기를 믿는 자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한 성이 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16) 아브라함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산 소망을 두고 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거룩한 나그네로 살 수 있었다. 산 소망이 없으면 우리는 불신자와 별로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이 세상의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재리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자유롭다고 해서 현실 도피, 현실을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가가 중요하다. 산 소망을 가진 사람만이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 6:19) 우리에게 주신 산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닻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내려놓고 있다.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거듭난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우리의 영혼의 닻을 내려놓고 있다. 우리의 소망은 튼튼하고 견고하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이미 그곳에 들어가셨다. 그래서 더욱 확실하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인류의 참 소망이시다(롬 15:12).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다. 이 소망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산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롬 15:13).
II.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심(5-7)
하나님 나라에 산 소망을 두고 사는 거듭난 사람들은 거룩한 나그네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그 순례의 길에 많은 시험이 따른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다. 5,6절을 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지막 날에 다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호라는 말은 군사용어이다. 우리들의 생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의 보초가 되어주신다는 의미이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녀들을 부모의 능력으로 보호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거듭난 자녀들을 전능하신 능력으로 보호하셔서 마지막 날에 구원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권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역경을 당하고 잠시 근심하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7절을 보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 시련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시련(dokivmion)이라는 말과 연단(dokimavzw)이라는 말이 같은 단어이다. 시련을 명사형이고 연단은 동사이다. 금은 어떻게 연단하나요? 용광로 속에 금광석을 넣고 녹인다. 금광석을 녹이려면 1035도 이상 높은 온도로 용광로를 달구어야 한다. 금광석이 녹으면 금은 무겁기 때문에 아래로 가라앉고, 그 외 불순물들은 위로 뜬다. 그래서 정금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순금이 만들어내는 데에도 불시련이 필요하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에도 연단이 필요하다. 믿음이 성장하려면 많은 시련이 필요하다. 많은 역경(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신다. 금을 제련하듯이 금보다 더 귀한 우리의 믿음을 제련하시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불순물들을 제하시고, 정금같이 빛나는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많은 시련을 허락하신다. 그렇지만 또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서 우리를 철통같이 보호하셔서, 마침내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지켜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크게 기뻐한다.
가끔 우리는 시련이 너무 커서 큰 근심에 싸일 대도 있다. 사방에서 우겨 쌈을 당할 수 있다. 그때 내 인생인 거기에서 끝나는 것 같다. 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다. 너무 힘들어서 변비가 생기고, 편두통이 생긴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역경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믿음의 시련”이라는 안경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모든 재난이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무슨 일을 당해도 견딜 수 있다. 이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더욱 강해지고, 깨끗해지고, 견고해진다. 운동선수가 받아야 할 혹독한 훈련은 그를 쇠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하게 해 준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축구 감독을 맡고 선수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금을 재련하듯이 그들에게 용광로 훈련을 시켰다. 그래서 4강에 올랐고, 그 열매들이 오늘날에 박지성과 이영표, 설기현 선수들이 나온 것이다. 믿음의 시련이 없이는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듭난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은 참으로 다양하다. 우리 가운데도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이 많다. 병원에 가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계속 몸이 아프다. 특히 산후에 몸이 약해져서 고생하는 분들이 많다. 자녀를 키우기도 힘든데 몸까지 아프니까 정말로 고통스럽다. 그러나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사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욥은 많은 고난을 겪은 후에 고백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많은 고통 가운데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실 것이다.
또 어떤 분은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모습이 참으로 은혜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통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신다. 하나님은 하늘 창고를 열어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기를 원하신다. 그렇지만 물질적인 축복이 우리의 영혼을 얼마든지 망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먼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는 것이다.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을 가지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주와 복음을 위해 쓸 수 있는 믿음이 있을 때 축복해 주실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시련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취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하는 것이다. 이 산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련이다. 서울 공무원시험에 응시한 젊은이들이 15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932명을 뽑는데 15만 명이 몰렸고, 시험 감독관만 15000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교회 청년 몇 분이 거기에 갔다. 취직을 하는 것도 이처럼 어렵고, 취직을 한 분들도 언제 회사에서 쫓겨날지 모르기 때문에 힘들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믿음의 시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믿음을 연단 받는 기회를 삼고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축복해 주신다.
또 결혼도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야 할 시련이다. 불신자들은 잘도 결혼한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은 결혼 대상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 또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 믿는 남자들이 부족하다. 그래서 쉽게 결혼을 허락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될 듯 될 듯 하면서 잘 안 되는 분들도 있다. 그래서 나이는 들고,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불신자하고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신도 든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시련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더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또 결혼을 한 분들도 안심하지 못한다. 요즘은 세상에는 결혼해도 깨어지는 가정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계속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부부간에도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는가?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우리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의 시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는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숙하여지고, 주님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는 인간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신다. 어떤 분은 인간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다윗을 보자. 다윗은 사울 왕에게 미움 받을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은 시기하여,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죽이려고 했다. 20대 10년 동안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다. 그러나 다윗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시련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하나님 편에서 감당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 사울을 해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다. 또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압살롬의 구데타로 인해서 왕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까지도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으로 받아들이고 감당했다. 다윗과 종자들이 망명을 떠날 때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다윗을 저주하고,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렸다. 군대장관 아비새가 죽은 개가 어찌 왕을 저주하느냐고 하면 머리를 베려고 했다. 그때 다윗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삼하 16:10) 다윗은 믿음의 시련으로 받아들이고 그 모든 고난을 감당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시험을 믿음으로 통과했다. 그래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셨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되었다.
우리도 다윗처럼 직장에서 애매하게 미움을 받기도 한다. 다른 사원의 시기를 받아서 피해를 입기도 한다. 또 사울과 같은 상관을 만나서 엄청나게 고생을 하기도 한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때도 있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당장에 사표를 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의 시련이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하나님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훈련하셔서 우리의 신앙을 성숙하게 하신다.
저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모든 것이 나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 주신 믿음의 시련이었을 깨닫게 되었다. 그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분이 안 보이시고, 뒤로 가도 그분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너무나 절망스러워 송장처럼 누워 지낼 때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는 불순물들을 제하시고,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신앙을 갖도록 빚어 주셨다. 말씀 묵상, 기도, 예배 신앙의 본질을 회복시켜 주셨다. 나의 문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에게서 신앙을 배우고 자란 양들의 문제이다. 물론 나보다 먼저 깨닫고 영적인 깊은 세계로 들어간 분들도 있다. 그러나 이제 함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리할 때 장차,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다.
III. 영혼의 구원을 받게 하심(8-12)
8,9절을 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도 그분을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다. 이것은 믿음의 열매인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영혼이라는 말은 육체와 구별된 영혼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의 구원은 영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을 몸도 구원을 받는다. 전인적인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첫째로 거듭남으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로 인하여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 장차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된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한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토록 함께 거하며 주님을 즐거워하게 된다.
이 구원은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졌는가? 10-12절을 보라. 이 구원은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사모하던 구원이다.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깨달은 바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과 부활의 영광이다. 그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 알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연구는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선지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파된 것이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천사들도 알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는 이 구원은 정말로 귀한 것이다. 천하를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세 이래로 준비해 오신 구원이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완성하신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 사역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또 사모한다. 그리고 장차 되어질 모든 구원의 일들을 소망하여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은 큰 죄악이라고 했다(히 2:3).
결론적으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고, 믿음의 시련을 주시고, 영혼의 구원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