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87
5월12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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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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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NujY8kbn48
[예수 그리스도 고난 수도회 최진욱 시몬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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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깊은 감옥 속에서도 기쁨으로 가득한 찬미가를!>
젊은 시절 잠시나마 교정 사목에 참여했었는데, 돌아보니 참으로 은혜로운 시절이었습니다. 소년원이나 구치소, 교도소를 내 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었습니다. 수감되어 있는 형제들의 얼굴을 한번 보기위해서는 꽤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했습니다.
높은 담장, 초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망루 사이에 난 견고하고 육중한 철 대문을 지나면, 또 다른 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문 안에 또 다른 문... 도시 한 복판에 위치했지만 깊고 깊은 심연의 동굴 바닥으로 들어선 느낌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와 실라스가 필리피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투옥되는 장면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번 투옥은 비교적 짧은 감금이었지만 바오로와 실라스가 겪은 고통은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의 필리피 지방에서 보인 행동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던 행정관들은 형리들을 시켜 두 사람의 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온몸에 채찍질을 가한 후 감방 중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특별실’에 그들을 가둡니다. 그것도 모자라 발에다가는 ‘차꼬’를 채웁니다. 차꼬란 두 개의 긴 나무토막을 맞대고, 그 사이에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넣고 자물쇠를 채우게 한 옛 형구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바오로와 실라스는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태형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키케로는 로마인에게 쇠사슬을 채우거나 채찍질을 하는 사람은 범죄자라고 말했습니다. 로마 시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공직자는 그 직책을 박탈당하기도 했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옥에 갇히기 전 충분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투옥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부당한 대우를 생각하며 묵묵히 부당한 대우를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빛도 잘 들어오지도 않고 공기도 잘 통하지 않는 깊은 감옥에 갇힌 바오로와 실라스였습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였으며 발에는 차꼬가 채워져 꼼짝달싹 못 하는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차꼬 외에도 손에는 수갑, 그리고 목에는 형틀까지 씌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자정이 되자 그 한밤중에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두 선교사는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밤새워 기도한 것입니다.
온몸은 채찍질로 인한 고통이 극심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채찍질도 차꼬도 깊은 감옥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지전능하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깊은 감옥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가득 차 기쁨의 찬미가를 부르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하느님께서도 크게 응답하십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를 흔드십니다. 감옥 문이 자동으로 활짝 열리고 두 사람을 옥죄고 있던 사슬들이 거짓말처럼 술술 풀렸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갖은 모욕과 박해를 당하는 바오로와 실라스의 모습, 그러나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굳게 믿으며, 고통이 클수록 더욱 신뢰하고 기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 전교를 한다고 해서 우리를 깊은 감옥에 가두는 사람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도 복음 선포에 보다 적극적이지 않은 제 모습을 크게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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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성모성월 특강
<우리 삶의 이정표이신 성모님>
https://youtu.be/LVb0IkU96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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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gbGmCpq6_g (2022 0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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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시는 원리>
오늘 복음에서는 ‘성령’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러 아버지께 가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의 어떠한 생각들이 변하게 되는지 살펴봅시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16,8-11)
상당히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성령의 역할을 알면 단순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아서 서리를 많이 하였습니다. 시골 아이들은 더 많은 서리를 한 것을 더 큰 자랑으로 여겼지, 그것이 죄가 되는 줄은 몰랐습니다. 저의 이 서리 하는 버릇이 사라지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학교에 갔다 오다가 과수원에 들어가 설익은 배를 훔쳐 집에 들어와 깎아 먹고 있었습니다. 아마 중학생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서리가 도둑질로 여겨져 하나 훔쳐 가면 일 년 치 도둑맞은 것을 다 물어주어야 한다는 팻말이 붙어 있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어머니의 무서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거 훔친 거지?” 엉겁결에 아니라도 둘러댔습니다.
어머니는 따지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과수원 아저씨가 다 보고 계셨어.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엄마한테 그러셨어. 지금 딴 거는 잘 먹고 앞으로는 남의 것에 손대지 마!”
서리하다가 들킨 적은 한두 번 있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습니다. 무서울 것만 같았던 과수원 주인이 우리가 따가는 것을 보면서도 참아준 것도 그렇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점차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아도 그랬습니다.
이 일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이십니다.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죗값을 치른 것입니다.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어머니는 그것을 참아낸 것입니다. 과수원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그분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어머니의 창피함을 받고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창피함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용서’가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선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고 했음을 기억합시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저는 아직도 그때 서리 한 것이 죄인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음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도 죄를 지으면서 그게 죄인 줄 모를 것입니다.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로움은 죄의 용서를 나타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해 어머니는 과수원 밭의 주인에게 가서 창피를 당하고 어쩌면 꾸지람까지 받아야 하셨습니다. 만약 어머니의 개입이 없었다면 우리는 1년 치 손해를 다 배상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의로워지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을 가렸습니다. 자기 행위로 의로워지기 위해 거짓말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등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용서받으면 우리 죄는 그리스도의 중재 덕분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심판받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숨고 가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드님의 가죽옷, 곧 성령으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대신 뱀을 심판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들어오시면 우리가 아닌 우리 안의 뱀, 그 뱀들이 만든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의 주인인 사탄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그들이 이미 심판받았고 나는 그 주인만 바꾸면 그만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합리화를 멈춥니다.
죄는 성령을 받지 못해서 짓게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이렇듯 내가 아닌 이 세상이 심판받았고 이 세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위로하기 위해, 내 죄를 용서해 주신 아버지께 너무 죄송해서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죄에 대한 자기합리화는 다른 죄로 이어지지만, 성령으로 용서받은 죄는 그래서 죄가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내 죄가 누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알고 또 내 죄 때문에 누구도 탓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사해지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성령을 받는 법은 우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씻어줄 능력이 있음을 믿지 못하면 내 죄는 계속 남습니다.
어떤 나라의 큰 공을 세운 형이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있는 동생을 위해 ‘사면권’을 받아왔습니다. 형은 동생에게 묻습니다. “동생아, 만약에 사면을 받게 되면 나와서 무슨 일을 하겠니?” 동생은 손으로 탁자를 치며 말합니다. “나에게 사형을 내린 재판관을 죽이고 나를 밀고한 인간도 찾아서 죽여야지.” 형은 돌아 나오며 사면권을 찢어버렸습니다.
형이 그리스도이고 임금이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그 사면권이 성령이십니다. 아무리 형이 사면권을 주고 싶어도 동생은 형을 믿지 않습니다. 형이 자신을 위해 다른 재산을 포기하고 자신의 사면권을 받아온다는 것은 그로서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자신이 한 행위가 ‘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도 심판할 수 없는 처지가 되기에 이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만약 형을 믿고 사면권을 받는다면 동생은 죄의 탓이 자기 자신보다는 그런 환경에서 살았던 것 때문임을 알고 자신이 속해 있던 환경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노력으로 죄에서 벗어납니다.
폴윤이란 목사는 미국 이민 가서 교회에 다니기는 했으나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갱단이 되었습니다. 마약이나 나쁜 짓은 기본이었습니다. 폴윤은 미국에서 추방당하여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역시 폭력배로 살았고 심한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또 감옥에 갔다 옵니다.
그러나 ‘기도’를 믿었습니다. 주님께 마약 중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죽기 살기로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몸이 회오리바람에 하늘로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너무 무서워 눈을 뜰 수가 없다가 간신히 눈을 뜨니 하느님 옥좌 앞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닥은 정말 수정과 같았고 앞에서는 무지갯빛이 돌아가는 듯하였고 생명체들이 자기 주위에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바로 마약을 끊었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하느님 옥좌 앞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얼마나 아프게 해드렸는지 알면 죄를 뉘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자리에 올라오게 한 회오리바람은 자기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게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일이 남습니다. 그도 한 달 뒤에 다시 유혹이 왔다고 합니다. 이제는 자기가 심판받은 이들과 함께 어울려서는 안 됨을 알고 목사가 되어 자기 주위를 선한 사람들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내 죄를 인식하게 되고 그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았으며 그래서 죄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 그것을 멀리하기 위해 그리스도 공동체에 머물게 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받아 주시는 성령으로 죄가 사해지는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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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일 아침 산책길에 새 소리를 듣습니다. 요즘은 좋은 앱이 있어서 새 소리를 녹음하면 새의 이름과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듣던 때도 좋았지만 새의 모습을 알 수 있으니 더 좋았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땅을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를 봅니다. 발을 조심해서 걷게 됩니다. 혹 저의 실수로 벌레를 밟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벌레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천천히 기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작은 벌레를 잡기 위해서 바라보는 참새가 있습니다. 그 참새를 잡으려는 매가 있습니다. 그 매를 잡으려는 포수가 있습니다. 돌아보면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인 것 같지만, 늘 더 넓고 더 깊고 더 큰 세상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학생이 되면서 나라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회사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가족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국은 나 자신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근무력증으로 투병 중인 형제와 함께 부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봉사자들과 함께 병원에 찾아가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작년처럼 병원에서도 기꺼이 미사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손도, 발도 사용할 수 없는 형제님이지만 밝은 모습으로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챗지피티, 제미나이, 클라우드, 그록을 이야기했더니 형제님은 그런 도구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거라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주로 클라우드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움직일 수 없고, 홀로 병원에 있어야 하는 형제님에게 인공지능은 세상과 연결해 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대화할 수 있는 친구와 같습니다. 그날 미사에 참례한 분 중에 수녀님을 제외하면 모두가 인공지능을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인공지능인 챗지피티를 자주 활용합니다. ‘글로벌 엔트리’를 신청할 때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신용카드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마치 길을 안내해 주는 도우미처럼 제가 질문하면 친절하게 답해줍니다. 10번을 물어도 친절하게 답해줍니다. 답변은 물론 다른 해결책도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성령입니다. 진리의 성령께 의탁하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밝혀질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의 그릇된 기준은 무엇입니까? 부정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던 단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이들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의로움을 독점하려고 하는 권위주의입니다. 의로움은 권위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봉사에서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빌라도의 심판은 불의한 심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기 전에 내 눈에 있는 큰 들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는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꽃은 피었다 지기 마련이고, 사람은 나올 때가 있으면 들어갈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역사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하려 했던 사람들 때문에 본인은 물론 공동체가 수렁에 빠지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가 다 될 것을 예감하십니다. 구원의 역사에 또 다른 협조자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바쳐서 함께 했던 제자들을 떠나야 하고, 하느님 나라 운동에서도 떠날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주님의 ‘비움’이 바로 참된 자유의 시작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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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홍상수 감독의 “북촌 방향”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참 난해합니다. 뚜렷한 줄거리도, 인과 관계도 없습니다. 제목도 그렇습니다. 대체로 ‘북촌 방향’이라고 하면 ‘북촌으로 향하는 방향’을 이야기할 터인데, 이 영화는 ‘북촌에서 가리키는 방향’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그저 방향만 있을 뿐이지요. 많은 현대인의 삶이 그렇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세상의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요한 16,5).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시는지는 여쭙지 않습니다. 방향만 있고 목적지는 없는 것이지요. 방향은 그 순간의 선택일 뿐입니다. 그러나 목적지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멀리 보고, 계획하며, 마침내 도달하려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것만 느낄 뿐, 목적지는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16,7)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면서 보호자 성령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로 이끄십니다. 성령의 바람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정처 없이 세상의 바람을 따르는 이들과 다릅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당에 가기는 하지만 왜 가야 하는지 묻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순간의 감정이나 순간의 욕구를 좇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하루 성령의 날개를 달고, 하느님이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날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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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5-11: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나야만 성령이 오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7절) 제자들은 주님의 떠나심 때문에 슬퍼하지만, 예수님은 이 떠나심이 곧 하느님의 영광이며, 또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그분의 현존을 새롭게 누리게 되는 길임을 드러내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주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분이 떠나지 않으셨다면, 성령께서 그들에게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XCIV, 요한 16,7 의역) 즉,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새로운 현존의 방식을 여는 사건이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대신, 성령 안에서 모든 시대, 모든 이와 함께 하시는 분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오셔서 세상에 세 가지를 드러내실 것이라 하신다.(8-11절)
★우선 죄에 대하여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9절)→주님을 거부하는 것이 곧 죄의 본질임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가장 큰 죄는 불신이다.”(In Ioannem Homiliae LXXVIII, 요한 16,9 의역) ★의로움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사실은 그분의 거룩함과 의로움이 드러났음을 의미한다. 세상은 예수님을 율법을 어기는 죄인이라 단죄했지만, 아버지께서 그분을 부활로 영광스럽게 하심으로써 참된 의로움이 세상에 드러났다. ★심판에 대하여는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11절)→ 사탄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패배했다. 성 이레네오는 이를 두고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는 용의 머리를 부수시고, 죽음을 죽음에게 넘기셨다.”(Adversus Haereses V,21, 히브 2,14 의역)
예수님은 성령을 Paraclitus, 즉 보호자·협조자라 부르셨다. 이 말에는 “위로자”, “대변자”, “협력자”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성령께서는 빛을 주시고, 힘을 북돋우시며,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시다.”(De Spiritu Sancto XVI 의역) 따라서 성령은 단순히 우리의 신앙을 지켜주는 분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하느님 뜻 안에서 살도록 협조해 주시는 인도자이시다.
예수님의 승천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주님을 따르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셨다. 성령을 협조자로 보내 주셔서, 우리가 참된 기쁨과 빛 속에 살도록 하셨다. 오늘 하루도 우리 마음을 성령께 열어, 그분의 위로와 인도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성령은 협조자이시니, 위로자요 변호자요 신자들의 인도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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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함께 나 또한>
요한 16,5-11 (성령께서 하시는 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늘 함께 나 또한>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믿음을
보내시며
믿음이
떠나시니
늘 믿음과 함께
나 또한
늘 믿음이리라
희망을
보내시며
희망이
떠나시니
늘 희망과 함께
나 또한
늘 희망이리라
사랑을
보내시며
사랑이
떠나시니
늘 사랑과 함께
나 또한
늘 사랑이리라
기쁨을
보내시며
기쁨이
떠나시니
늘 기쁨과 함께
나 또한
늘 기쁨이리라
사귐을
보내시며
사귐이
떠나시니
늘 사귐과 함께
나 또한
늘 사귐이리라
품음을
보내시며
품음이
떠나시니
늘 품음과 함께
나 또한
늘 품음이리라
스밈을
보내시며
스밈이
떠나시니
늘 스밈과 함께
나 또한
늘 스밈이리라
베풂을
보내시며
베풂이
떠나시니
늘 베풂과 함께
나 또한
늘 베풂이리라
섬김을
보내시며
섬김이
떠나시니
늘 섬김과 함께
나 또한
늘 섬김이리라
살림을
보내시며
살림이
떠나시니
늘 살림과 함께
나 또한
늘 살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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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떠나보면 알거야>
봄비는 농사일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귀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화창한 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 오는 날을 뛸 듯이 좋아한다.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빛을 더 빛나게 하고 그래서 그의 소중함도 더해지기도 한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 것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이다. 빛은 빛으로써 존재하고 있었고 어둠은 어두움대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고 말씀하셨다.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호자 성령께서 증언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셨다.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세속의 권력자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하며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하느님의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된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 새로운 법의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못된 것을 지금 알게 해주는 것일 뿐이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루카15,11-32)를 보면,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풍요로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우쳤다. 그는 집을 나가 밑바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다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아 안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이다. 사실 떠나보면 알게 된다. 그러니 한 발 뒤에서 봐야 한다. 지금 삶에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처지를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있을 때 잘해!
“주님, 지금의 삶이 저희에게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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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16,5-11)
1)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앞의 1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어디로 가시느냐고 예수님께 물었고, 14장을 보면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3,36)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5-6)
그래서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는 예수님 말씀은, 사도들이 묻지 않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이 아니라, “너희는 왜, 내가 어디로 가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슬퍼하기만 하느냐? 슬퍼하지 마라.”라고 타이르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2)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과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이고,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순교를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아버지께 가신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긴 하지만, ‘어디로’ 가시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막연하게 암시만 하셨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고 나서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9-10)
3) 5절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일은 예수님을 보내신 분께, 즉 아버지께 가는 일이고, 슬퍼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입니다. 이 말씀은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4,28)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죽음을 정복하는 일이고, 당신의 ‘떠나심’은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다시 오셔서 신앙인들을 데리고 가시는 일로 이어지기 때문에, 당신의 죽음과 떠남을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4) 7절의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는, “내가 떠나도 너희의 이로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입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는, “내가 떠나도 성령께서 오신다.”입니다. 8절-11절의 말씀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뒤에 깨닫게 될 진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박해자들은 ‘예수는 죄인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자기들이 죄인을 심판했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죄인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인 그들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 즉 ‘의로우신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박해자들은 예수님을 안 믿고 죽인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은 사탄을 심판한 일과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신 분이고, 신앙인은 승리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신앙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고 패배한 사탄의 뒤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고, 어떤 길로 갈 것인지는 각자 선택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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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며,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유익한 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영적인 구세주로서 모든 인간들에게 다가가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 끝날 때까지 모든 세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모습으로 유다 나라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놓아 주신 다음 이제 시간과 공간에 매어있는 범위을 넘어서, 영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육신의 모습을 취하여 계시는 한에는 만나면 헤어져야 하고,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으시나, 그러나 영에는 제약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부활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믿음의 대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대상으로 바꾸심으로써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더 가까이 더 완전히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하느님의 영으로서 다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어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의 마음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때에 자기들이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도행전 2, 37에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자기들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을 다시 이야기로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찔렸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들었을 때 무거운 죄의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 오늘에 우리들에게도 죄의식을 주는 것은 무엇이며 십자가 앞에서 몸을 낮추게하는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인도에 어떤 마을에 한 선교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 수난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여 주고 있을 때, 십자가의 장면이 벽에 비추워졌습니다. 그 그림을 보던 한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가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보고는 "내려오십시오! 당신이 아니라, 제가 그곳에 달려야만 합니다"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셋째, 진정한 회개 이후엔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오늘에 우리들도 우리 자신이 "자신이 진 죄에 대한 죄의식 없이 구세주가 나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유다 나라에서 범죄자로 못 박힌 한사람의 모습이 어찌하여 여러 세기를 통하여 오늘날까지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처럼 괴롭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죄에서 깨닫고 일어나 해방의 기쁨, 죄에서의 자유의 기쁨을 주시고자 모든 이의 마음속으로부터 일깨워 주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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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일 요아킴 신부님]
<우리도 예수님처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시지만, 그 대신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보호자’로 오시는 성령께서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6,5)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매일매일 따라다니며 그의 곁에 있는 그림자가 있었지요. 그림자는 항상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림자에게 잘해주었고 그림자는 말없이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질투 많은 바람이 그에 곁을 지나며 말했습니다. "왜 그림자에게 잘해주세요?" 그러자 그는 "그림자는 항상 내 곁에 있어주기 때문이지." 하고 말했지요. 바람이 다시 말합니다. "아니에요. 그림자는 당신이 기쁘고 밝은 날만 잘 보이지, 어둡고 추울 때는 당신 곁에 있지 않았다고요."
생각해보니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힘들고 슬프고 어두울 때는 항상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림자에게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말고 가버려라." 하고 말해버렸지요. 그러자 그 한 마디에 그림자는 조용히 사라졌답니다. 그 후 그는 바람과 함께 즐겁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잠시 스친 바람은 그저 조용히 사라져버렸습니다.
너무나 초라해져 버린 그는 다시 그림자를 그리워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림자야, 어디 있니? 다시 내게 와줄 순 없을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말에 어디선가 그림자는 다시 나오고 조용히 그에 곁에 있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자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었답니다. 다만 어두울 때는 당신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힘들고 슬프고 어두울 때는 난 당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아마도 당신은 저를 바라 볼 수가 없었나 봐요.”
우리는 힘이 들 때 정작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걸 잊고 삽니다. 그리고 세상에 혼자 남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 아픔은 두 배가 되어버리지요.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단지 그 분께서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그림자처럼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특히 어두움으로 표시될 수 있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는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당신이 잠시 계시지 않다가 다시 오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시는 ‘생명의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성령을 파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5) 파견을 받은 성령께서는 그 계획을 다시 취하시고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더불어 온전히 실현하십니다.
곧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공동체를 위하여 그 계획을 해석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과 당신을 충실하게 하십니다(성령의 기능).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막 감옥에 들어온 무기수였습니다. 언제 나가게 될지, 어떻게 이 좁은 공간에서 지내야 할지 막막했던 그는 교도소장을 향해 간절한 청원을 한 가지 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 교도소 마당 한 귀퉁이에 정원을 가꾸게 해주십시오.” 새로 부임한 교도소 소장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는 처음엔 손길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와 양파를 심었습니다. 씨를 심고 그것이 자라자 그는 작은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는 장미도 심고 작은 묘목의 씨앗도 뿌렸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그는 정성스럽게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가 지금은 자유의 몸이 아니지만 이 정원을 돌보듯이 나 자신을 돌봐야겠구나, 또 이렇게 씨를 뿌린 다음 지켜보고 경작하고 결과를 추수하는 정원사의 일이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가…’
교도소 마당의 귀퉁이에 무언가를 심고 가꾸던 그는 이십칠 년이 지난 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앞날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헤아리고 헤쳐나갈 때 분명 주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참으로 가난하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세상에 오실 때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셔서 세상에 오셨고, 모든 일의 시작에서부터 끝을 당신 뜻대로 행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느님께 맡기는 가난과 겸손을 보여 주셨으며, 협조자이신 성령께 당신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시고 마치시는 분이심을 깨닫고, 모든 것을 안배해주시는 성령의 뜻을 따라 마음의 정원을 가꾸며 살도록 합시다. 오늘도 그분 안에서 힘을 얻고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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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윤정환 이냐시오 신부님]
<스승님, 어디로 가십니까?>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승천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제자들은 다시금 두려움에 휩싸이고 걱정이 가득합니다.
"십자가위에서 돌아가실 때도 그렇게 허망하게 가시더니 또 어디를 가신다는 말입니까, 저희는 어쩌라구요?" 제자들의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은 그들을 다독여 주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지 못하신다."(7)
예수님은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셨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 스스로가 일어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때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월은 스승의 날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탄생일이기도 한 그날은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1964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내고 있지요.
국어사전에서는 "자기(스스로)를 가르쳐서 남을 인도하는 사람"을 '스승'이라 합니다. 자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삶의 지혜를 전달하고 보여준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스승이 된다는 것, 스승 노릇을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예전에는 "스승과 어버이는 하늘과 같다"고 했다지만, 요즘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거나 심지어 아예 밑에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눈높이 교육'이 강조되고 학생이 원하는 데로 가르쳐야 할 지경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럴수록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는 물론 그 책임까지도 사라져버리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스승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역할도 그렇지요.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줄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생각처럼 그럴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 말고 반드시 있어야만 할 것들 말이지요.
숨 쉴 공기나 마실 물과 같은 생존과 직결되는 것은 접어두더라도 예컨대, 건강이나 돈, 혹은 배우자나 자녀들, 아니면 평생을 투신할 직업, 자신이 믿는 종교나 우정을 나눌 만한 친구 혹은 존경하는 선생님 등등 꼽아 보면 참 많은 것들이 있겠지요.
하지만 과연 이런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가치들을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님의 신비한 힘에 이끌려 쇠사슬을 풀고 자유로운 몸이 됩니다.(사도 16,26) 그 어떠한 세상의 권력도 그들을 속박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대목이지요.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은 것은 바오로 사도가 아니라 그를 지키던 간수였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탈옥한 것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자살하려고 하였지만,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듣고 회개하여 그의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습니다. 세상의 가치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선물을 받은 것이지요.(사도 16,33)
오늘 복음에서도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실 것"(8)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세상을 단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가치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묻혀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우리 자신을 바로 알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 스승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참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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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기 외모에 얼마나 만족하십니까? 나라마다 다른데, 특별히 멕시코와 터키 사람은 70% 이상이 자기 외모에 매우 만족하거나 그럭저럭 만족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반면 영국, 일본, 러시아, 한국에서는 자기 외모를 비관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는 우리를 멋지게 보이게 하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가 희망하는 외모 기준이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의 이미지가 사방에서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 영화, 광고, 인터넷 SNS 등 우리를 자극하는 것이 정말로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 외모에 자신 없는 사람은 성형 수술을 해도 계속 자기 외모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내려놓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체적 외모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느끼는 ‘감정’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앨리스 워커는 말합니다.
“자연에서는, 그 무엇도 완벽하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완벽하다. 나무는 뒤틀리거나 이상한 방향으로 휘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창조 목적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족하지 못함 그 자체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과 판단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에 제자들은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제자들은 당장 자신들 곁에서 스승이 사라진다는 상실감에만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하느님의 더 큰 계획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육신을 지니고 계신 예수님은 시공간의 계약을 받아 갈릴래아나 예루살렘 등 특정 장소에만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원 사업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신 뒤에 보내실 보호자 성령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죄, 의로움, 심판에 관한 근본적인 착각을 깨뜨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나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은 성령을 받아 함께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는 잘못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기준을 따르게 되면 잘못된 생각과 판단으로 마음에 근심이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심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성령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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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령 파견 예고>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예고하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고, 오늘은 앞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이는 ‘당신이 파견 받아 오셨다’는 것과 ‘사명을 마치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신 성령의 파견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시간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으면서도, ‘오늘’을 통하여 어제도 내일도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같이 계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열리게 되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보호자 성령’으로 눈이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면서 아들을 드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지만 성령의 존귀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특성으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성령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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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주님!
보는 것, 아는 것에 매여 있는 저를 부수소서.
제 눈을 비추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고,
제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당신 영을 보게 하소서.
저를 부수고 당신을 드러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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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성령의 오심을 기대하게 만드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요한 16,7)
제자들은 떠남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근심이 가득합니다. 어쩌면 유아들이 느끼는 분리불안과 같을 겁니다. 예수님이 유다인들에게 겪으시는 모함이나 공격의 강도가 세지는데 설상가상으로 예수님께서 반복해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걸 보면 상당히 불길합니다. 메시아의 측근으로서 걸었던 기대마저 물거품이 될 것 같아 제자들 심경이 착찹할 겁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당신께서 가셔야 보호자께서 오시리라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뭐든 좋은 거라면 다 누리고 싶은 게 인간 욕심이라 예수님도 떠나지 않으시고 보호자 성령도 함께하시면 더 좋을텐데,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고 막연히 불길하기만 합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요한 16,8)
성령께서는 유다인들이 특히 더 집착해 온 죄, 의로움, 심판에 대해 진리를 일깨워 주실 것입니다. '진짜 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진짜 의로움'은 성자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아버지와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우두머리들이 탐닉하는 진리의 호도와 부정한 탐욕과 과시가 그들이 받고 있는 '진짜 심판'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귀한 하느님 모상성을 욕정과 바꾸고 어둠을 택하였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다름 없으니까요.
제1독서에 등장하는 간수의 회심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16,30)
험악하게 매질을 당하고 "가장 깊은 감방에" 갇혀 있던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간수가 묻습니다. 느닷없는 천재지변으로 지진을 겪고, 죄수들이 도망갔다고 생각해 자결하려 하다가, 문이 모두 열렸음에도 감방을 떠나지 않은 사도들이 그를 만류한 까닭입니다. 삶과 죽음의 격랑을 건넌 간수가 사도들의 인격과 담대함에 그동안 가졌던 관념이 "기초부터 뒤흔들린" 듯 보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간수는 사도들이 대답한 대로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그동안 가졌던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관념이 바닥부터 뒤집어져야 합니다.
먼저, 간수가 죄수인 사도들 앞에 엎드려 구원에 대해 물었다는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세상 법정이 내린 심판을 실행하고 관리하는 간수로서 놀라운 일이지요. 진정한 구원은 세상의 심판과 반드시 결을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은 듯 보입니다.
그리고 간수는 세상이 죄수라 낙인 찍은 이들을 자기 재량으로 데리고 가서 상처를 치유해 주고 음식을 대접합니다. 죄 지은 이들을 통제하는 직업이라 이 행동 자체가 심각한 위법일 수 있음을 모르지 않을 테고 그 자신이 나름 준법가로 살았을 터인데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왔을까요?
결국 간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것도 온 가족이 함께 신앙을 받아들이지요. 진정한 의로움이란 율법이나 세상 법을 지킴으로써 획득하기에 앞서 성자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는다는 것을 그가 직접 보여준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새로운 전복이 일어납니다. 그동안 고착된 낡은 자아를 깨고 새 마음과 새 영으로 변화되라고 기초부터 뒤흔들며 오시니까요. 하지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어서 기다리는 우리도 제자들처럼 기대와 근심, 두려움이 혼재할 겁니다. 간수는 삶과 죽음의 격랑에 휩쓸리기까지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해 깨달으면 더 이상 세상 앞에 콧대를 치켜들며 오만할 일도, 또 반대로 주님 앞에 죄책감으로 절망할 일도 없을 겁니다. "주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한 간수처럼 그저 기쁘고 행복하고 충만할 테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진리를 새롭게 밝혀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존재와, 우리를 둘러싼 무엇인가가 기초부터 뒤흔들려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저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성령께서 하시도록 자신을 내어놓읍시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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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사도행전 저자는 필리피에서 바오로와 그의 동행인 실라스에 대한 군중과 행정관에 대한 정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군중이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지 행정관들은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를 치게 하고 감옥에 가둡니다. 간수는 가장 깊은 감방에 두 사도를 가두고 그들의 발을 차꼬로 채웁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리고 둘을 묶었던 사슬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 간수는 감옥 문이 열려있고 죄수가 없어진 것으로 알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지만 두 사도는 그를 말리지요. 간수가 횃불을 들고 사도가 있는 안으로 들어가 떨면서 그들 앞에 엎드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16,30) 하며 묻습니다. 두 사도는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31절)하고 대답합니다.
사도들은 그 간수와 그집의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간수는 그날 밤 사도들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요한복음의 주 주제 중에 하나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기점으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공관복음 기자들이 십자가를 부정적으로 표현한 데에 비해서 요한복음 저자는 세상의 박해를 이기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전환점의 십자가는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슬픔이 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요한 16,5-6)
예수님께서는 장차 당신의 빈자리를 슬퍼할 제자들에게 장차 성령께서 당신 자리를 채워주실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7-8절)
사도들의 모습을 보면 복음선포의 어려움을 배우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도시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사도들의 일을 방해하거나 또 박해를 합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행정관에 의해서 감옥에 투옥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흐트러짐 없이 찬미가를 부르고 기도를 합니다. 사도들은 만난 감옥의 간수는 사도들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결국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예수님처럼 사도들도 박해를 받지만 또 구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갖고 구원의 말씀에 대해 받아들이거나 거부합니다. 사도들의 복음선포가 어려웠듯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선교는 쉽지가 않습니다. 다행이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진리를 올바로 알아듣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이 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주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선가 선을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상치도 못한 감옥의 간수가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귀기우리고 복음을 받아들였듯이 오늘의 이웃 사람들 중에 진리를 향하는 사람들은 복음에 귀기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내와 용기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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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ㄴ)
<엄마, 엄마!>
오늘 복음(요한 16,5-11)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요한 16,7-8)
예수님은 시작이요 마침이신 분, 곧 알파와 오메가이신 분입니다.(요한묵시록 21,6 참조) 예수님의 온 존재가 우리를 향해 있음을, 예수님의 오심(육화)과 땀(공생활)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떠나심(승천)이 모두 우리의 구원을 향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한없이 부족한 제자들을 두고 떠나가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그런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지켜주시겠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큰 사랑 안에 머물러 봅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 큰 사랑을 느끼고 있는가? 너의 부족함을 바라보지만 말고, 이 큰 사랑과 마음에로 내가 향해 있으면, 나의 모습도 크게 변화되지 않을까?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엄마의 사랑과 마음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사랑과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제 복음묵상글을 받아보시는 어느 분께서 '이연실의 가을밤(찔레꽃)(엄마 엄마)'이라는 노래를 보내주셔서, 한번 듣고 울 엄마(이정숙 사비나)를 생각했습니다. 제 방에 걸려있는 엄마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남겨 놓으신 짧은 글과 편지들을 다시금 꺼내어 읽어 보았습니다. 구구절절 오직 자식 걱정뿐인 엄마의 사랑과 마음이 닮겨져 있었습니다.
성모 엄마를 사랑하고, 울 엄마를 사랑합시다! 이 두 엄마는, 시작과 마침이신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분들입니다. 항상 지금 여기에서 두 엄마의 사랑과 마음을 잊지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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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으신다."(요한 16,7)
우리는 본능적으로
붙잡으려 합니다.
삶의 변화와 선택 앞에서
무엇을 내려놓아야
더 본질적인 삶에
이를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게 됩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은
끝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구원의 새로운 방식이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 때문에
새로운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성령의 인도가 시작됩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살아 있는 믿음으로
이끄시며,
무뎌진 마음을 흔들어
다시 사랑의 길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떠나보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미움
상처와 자기 확실을 내려놓고
서로의 아픔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이미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이제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서
살아 움직이기를 바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을 바로 세우시고,
더 성숙한 삶으로 이끄시는
가장 살아 있는 오늘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보호자이신 성령을 믿으며
조용히 우리의 길을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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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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