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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 [列國誌] 744
■ 3부 일통 천하 (67)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8장 상앙(商鞅)의 말로 (7)
"이 놈아, 집까지 팔아먹고 가더니 꼴 좋구나. 무슨 낯짝으로 돌아왔단 말이냐?"
고향인 낙양의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소진(蘇秦)이 가족들로부터 들은 첫 말이었다.
어머니는 몇 날 며칠 욕설을 퍼부었고, 형수는 눈을 흘기며 빈정거렸다.
심지어는 아내마저 베틀 앞에 앉아 소진(蘇秦)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지만 너무 심한 박대였다.소진(蘇秦)은 무엇보다도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밥을 차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참다 못해 형수에게 애원했다.
"형수님, 배가 몹시 고프니 밥 좀 지어 주시오.""땔나무가 없어서 밥을 지을 수가 없소."
형수는 싸늘히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소진(蘇秦)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
"이 한 몸 천해지니 아내도 남편으로 여기지 않고, 형수도 시동생으로 대하지 않고,
어머니도 자식으로 보지 않는구나. 아, 이것이 사람인가."
소진은 풀이 죽어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그날그날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하도 심심하여 책을 넣어두었던 상자를 꺼냈다.
이것저것 뒤지는 중에 한 묶음의 책이 눈에 띄었다. 지난날 산을 떠날 때 귀곡(鬼谷) 선생이
친히 준 <음부경(陰符經)> 이었다.당시 귀곡 선생이 들려준 말이 생각났다.
- 너희들이 이것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그 깊은 뜻을 알려면 아직 멀었다.
이 책을 곁에 두고 늘 읽으면 크게 깨달아지는 바가 있을 것이다.
소진(蘇秦)의 눈에 광채가 일었다.'그렇구나. 선생께서는 오늘날 내가 이리 될 것을 아시고
이 책을 주신 것이로구나.'
그날부터 소진(蘇秦)은 문을 닫아걸고 본격적으로 <음부경(陰符經)>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밤낮없이 그 안에 담긴 깊은 오의(奧義)를 깨달으려고 노력했다.잠이 오면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렀다. 피가 흘러 방바닥을 적셔도 그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여가 지났다.하루는 그의 머릿속으로 천하대세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각 나라의 움직임이 손금처럼 들여다보였다.'아아.'소진(蘇秦)은 황홀경에 빠졌다.
미친 사람처럼 방안을 왔다갔다 하며 기쁨을 억눌렀다.
'이제 자신 있다.'그는 동생 소대(蘇代)와 소여(蘇厲)를 불렀다."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공부를
성취했다. 머지않아 나는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 형을 도와다오."
"저희들이 어떻게 하면 형님을 도울 수 있습니까?""한 번만 더 여비를 마련해다오.
나는 다시 한 번 천하 열국을 주유하며 내 뜻을 펼칠 작정이다. 내가 출세하는 날
너희들을 반드시 이끌어주겠다. 그때를 대비하여 너희들도 이 <음부경(陰符經)> 을 익혀 두어라."
소대(蘇代)와 소여(蘇厲)는 형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식구들 몰래 황금을 마련해 주었다.
이에 소진(蘇秦)은 집안 식구들과 작별하고 제2차로 열국 유세의 길을 떠났다.
낙양성을 나온 소진(蘇秦)은 사방을 둘러보았다.'어느 나라부터 갈 것인가?'그는 생각했다.
'지금 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칠웅(七雄) 중 가장 강한 나라는 진(秦)나라다. 내가 진나라를
돕기만 하면 능히 제업(帝業)을 성취시킬 수 있다.'그러나 소진(蘇秦)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진혜문왕의 성격으로 볼 때 자신을 써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이때 그의 머릿속을 스친 것이 바로 '합종(合縱)'이었다.
'그렇다. 진(秦)나라를 배척시키고 나머지 여섯 나라를 하나로 단결시켜 대항하면 진나라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중원으로 진출할 수 없을 것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상징하는 말 중 하나인 '합종(合縱)' 이란 말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소진(蘇秦)은 낙양에서 가장 가까운 조나라를 향해 수레를 몰았다.
조(趙)나라를 필두로 위ㆍ한ㆍ제ㆍ초 연나라를 차례대로 엮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이 무렵, 조나라 수도는 한단(邯鄲). 한때 위(魏)나라 방연의 침공을 받고 빼앗긴 적이 있으나
곧 수복했다.전국시대에 들어와 발전한 신흥 도시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진의 계획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 무렵 조(趙)나라 임금은 조숙후(趙肅侯)였고, 재상은 그 동생인 봉양군(奉陽君)이었다.
그런데 재상 봉양군(奉陽君)은 진혜문왕처럼 유세객을 무척 싫어했다.
갖은 말로 설득했으나 봉양군은 아예 소진의 말에 귀를 기울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놈!'소진(蘇秦)은 끝내 봉양군의 닫힌 귀를 열지 못하고 조(趙)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는 진(秦)나라에 가까이 있는 나라부터 설득할 계획을 바꾸어 가장 약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부터 시작하리라 마음먹었다.'그래, 연(燕)나라로 가자.
745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745
■ 3부 일통 천하 (68)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8장 상앙(商鞅)의 말로 (8)
연(燕)나라는 중원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나라였다.오늘날의 북경(北京)일대다.
지금은 중국의 중심지이지만 당시는 땅이 척박한 데다가 주변으로 많은 이족(異族)들이 수시로
국경을 넘나들어 늘 골머리를 앓았다.교통마저 불편하여 중원 제후국들과의 교류도 활발하지 못했다.
그런 탓에 춘추시대(春秋時代) 때부터 한 번도 강국의 반열에 올라서지 못했다.
이러한 것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약소국을 집어삼키는 어지러운 싸움을 벌이는 중에도 동북지역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연(燕)나라에 대해서는 별 관심과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오히려 연나라가 망하지 않고 존속해올 수 있는 원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강하지도 못했지만 약하지도 않았다.연(燕)나라가 전국시대에 이르러
칠웅(七雄)의 반열에 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
멸망당하거나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진(蘇秦)이 연나라를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끝내 6국의 합종(合縱)을 이루어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燕)나라에서도 순조롭게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연나라 도성인 계(薊, 지금의 북경)에 당도했지만 그 군주인 연문공(燕文公)을 만날 길이 없었다.
연문공을 만나기 위해 각방으로 교섭했으나, 아무도 소진(蘇秦)을 위해 나서려 하지 않았다.
소진(蘇秦)은 연나라 여점(여관)에서 일 년이란 세월을 허비하며 지냈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꾹 눌러 참았다.'여기를 떠나면 나는 갈 곳이 없다.'
벼랑 끝에 다다른 심정으로 계속 공궁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는 사이 두 동생에게서 받아온 황금을 다 써버렸다.
이제는 밥마저 사먹을 돈도 없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여점 방에서 신음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참혹하고 비참한 신세였다.그 광경을 여점 주인이 보았다.
주인은 소진의 처지를 크게 동정하여 그에게 1백 전(錢)을 꿔주었다. 겨우 원기를 회복한 소진(蘇秦)은
다시 공궁 주변을 서성거렸다.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연문공(燕文公)이 성밖으로 사냥을 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아무도 나를 위해 나서주지 않는다면 내 스스로 임금 앞에 나서리라.'
이렇게 결심한 소진(蘇秦)은 연문공이 행차하는 길목에 미리 숨어 있다가 연문공의 수레가 다가오자
재빨리 그 앞으로 뛰어나가 절을 올렸다.연문공(燕文公)이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대는 누구요?"
"이 몸은 주나라 낙양 사람으로 소진이라고 합니다.""소진................?"
연문공(燕文公)은 귀에 익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2, 3년 전 한 사내가 느닷없이 진혜문왕을 찾아가
제왕론(帝王論)을 펼쳤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진혜문왕으로부터 거절당하기는 했지만, 부국강병책의 도입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던
연문공(燕文公)으로서는 왠지 그 사내의 제왕론(帝王論)이 무척 궁금하게 여겨졌다.
그 세객의 이름이 소진이라고 했던가?"소진(蘇秦)이라면.....
귀곡 선생의 제자인 그 소진이란 말씀이오?""그렇습니다."
연문공(燕文公)은 자신도 모르게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선생에 대한 말씀은 익히 들었소.
과인은 전부터 선생이 진(秦)나라에서 펼친 강론에 대해 퍽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소.
그런데 이제 선생이 이처럼 우리 나라에 오셨으니 앞으로 과인을 잘 지도해주기 바라오."
연문공(燕文公)은 사냥 나가는 것을 중지하고 즉시 수레를 돌려 궁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정식으로 소진을 빈객의 예(禮)에 맞춰 궁으로 초청했다.
궁에서 사자가 나오자 소진보다 더 기뻐한 것은 여점 주인 사내였다.
"그대가 여기서 기다린 보람이 있었구려. 어서 다녀오구려. 옷은 내가 빌려주겠소."
이렇게 해서 소진(蘇秦)은 여점을 나와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하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소진(蘇秦)이 궁으로 들어오자 연문공(燕文公)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과인은 선생의 높은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소진은 침착하게 숨을 고른 후 여섯 나라를 하나로 뭉치게 할 첫 일성을 토해냈다.
"오늘날은 난세(亂世)입니다. 군후께서는 그 난세의 바다 한가운데에 떠서 연(燕)이라는
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군후는 이 난세의 바다에서 살아남고 싶지 않으십니까?"
"살아남고 싶소. 부디 고견을 들려주시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사정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 연(燕)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동쪽은 조선(朝鮮)과 요동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있습니다.""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고, 남쪽으로는
호타하(滹沱河)와 역수(易水)를 경계로 하며 그 넓이가 사방 2천 리에 달합니다."운중과 구원은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일대이며, 호타하와 역수는 강 이름으로 하북성 서쪽 일대를 흐른다.
"..................."
"반면 연(燕)나라의 군사력은 중원의 다른 나라에 비해 그 반도 못 미칩니다. 그런데도 연나라는
다른 나라의 침공을 받지 않고 이 난세(亂世)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군후께서는
그 까닭을 알고 계십니까?""나는 알지 못하오."
소진(蘇秦)은 말을 멈추었다가 이내 다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연(燕)나라가 다른 나라의 침공을 받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조(趙)나라가 연나라의 방패
노릇을 하며 중원의 여러나라로부터 막아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문에 듣자하니 진나라 왕은 조만간 중원의 각 나라들에게 인질과 영토 할양을 요구할
작정이라고 합니다.만일 거절하면 군대를 내겠지요. 따라서 진왕(秦王)이 그러한 요구를 해오면
군후께서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맙니다. 군후께서는 정녕 진나라에 인질과
영토를 바치실 의향이십니까?""그럴 수는 없소. 하지만 솔직히 진(秦)나라와 싸워서 이길 자신도 없소
. 그러기에 이렇게 선생에게 고견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
소진의 말을 듣고 있는 연문공(燕文公)은 금방이라도 진나라 군대가 쳐들어올 것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혀 더욱 절박하게 매달렸다."진(秦)나라에 영토를 바치지도 않고, 진나라와 싸워 지지도
않을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조(趙)나라와 손을 잡고 서로 힘을 합치는 것입니다."
"조나라와 동맹을 맺는다 해서 그 강한 진(秦)나라를 당해낼 수 있겠소?""물론 당해내지 못합니다.
군후께서는 먼저 조(趙)나라와 손을 잡은 후 차례차례 위ㆍ한ㆍ제ㆍ초나라와 두루 국교를
맺어야 합니다. 즉 천하 모든 나라를 하나로 합종(合縱)시켜 나가자는 것입니다."
"여섯 나라가 하나가 되어 진(秦)나라에 대항한다면 어찌 진(秦)나라를 이겨내지 못하겠습니까?
이것만이 연(燕)나라가 난세의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백년대계입니다."
연문공(燕文公)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어두웠다.
"선생이 말씀하시는 합종(合縱)의 의의와 그 후의 효과는 모르는 바 아니나, 과연 다른 나라 제후들이
합종에 선뜻 동의할는지 그 점이 염려스러울 따름이오."소진(蘇秦)이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것은 염려마십시오. 군후께서 명만 내리신다면 신(臣)이 비록 재주는 없지만 직접 열국(列國)을
돌아다니며 조(趙)나라를 필두로 차례차례 연(燕)나라와 동맹을 맺도록 추진하겠습니다."
이러한 소진의 장담에 연문공(燕文公)은 비로소 기쁨의 기색을 마음껏 드러냈다.
"선생에게 황금과 비단과 수레를 내줄 터이니, 과인을 대신하여 열국(列國)을 순방하고
부디 합종(合縱)을 성사시켜 주기 바라오.""반드시 성공하여 돌아오겠습니다."
비록 경상(卿相)의 벼슬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소진(蘇秦)은 연나라 고위사절의 자격으로 재차
천하 유세(遊說)의 길에 나섰다.불과 얼마 전까지의 초라한 행색과는 달리 이번 여정은 화려하고
거창했다.'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소진(蘇秦)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흔들리는 수레에 몸을 맡겼다.
746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