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고뇌에 빠지게 만드는 SF 영화
영화 리뷰 또 하나의 나에 대한 공간 <더 문>
참으로 간결하다. 그래서 메시지가 더욱 강렬하게 다가 온다. 우주의 이야기다. 달의 이야기다. SF 맞다. 근데 참으로 따듯하다.
컴퓨터 커티(케빈 스페이시의 목소리)와 단 둘이 달 기지에 있는 샘 벨(샘 록웰). 엄밀히 말하면 혼자 있는 게 맞다. 그러나 컴퓨터 커티가 하도 사람과 같아서, 아니 사람보다 더 따뜻해서 그 고독이 사치로 느껴질 정도다.
눈물도, 피도 없는 이 세상의 인간 군상 사이에서 느끼는 처절한 군중 속의 고독(책 <고독한 군중>에서 데이비드 리스먼이 주장) 보다는 차라리 황량한 달에서 느끼는 천혜의 고독이 더욱 살갑다.
그것은 아마 인간이 만든 컴퓨터의 힘인지도 모른다.
자원 고갈과 인간성의 상실 "우리는 우리의 후손에게서 환경을 빌려 쓰고 있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그 만큼 자연은 우리가 아끼고 가꿔야 할 자원이다.
하지만 이미 자원 전쟁은 시작되었다. 아껴 쓰기는 커녕 함부로 낭비하고 마구 더럽혔기 때문이다.
지구 환경의 파괴와 에너지 고갈이라는 문제 앞에 직면한 인간은 영화에서도 그 문제를 비껴갈 수 없나 보다. <더 문>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 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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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던칸 존스
출연 샘 락웰,케빈 스페이시
개봉 2009.11.26 영국, 9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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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문제 전문가 폴 로버츠는 그의 책 <석유의 종말>에서 "석유 매장량의 대부분은 이미 발견돼 있고, 그런 석유 매장량으로 세계의 수요를 충족시키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로버츠는 전 세계의 석유 생산량은 몇 십 년 안에 정점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지구의 자원 고갈을 대비하여 달 표면의 자원 채굴을 위해 간 샘. 그의 근무 기간은 3년이다.
2주 후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 샘에게 또 하나의 샘이 등장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 모두는 달에서 만들어진 인간이다.
에너지 고갈을 대비해 루나 공업 주식회사가 복제 인간을 만들어 달의 에너지를 채굴한다는 착상은 가히 SF적이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SF의 생각이다.
영화는 SF보다는 인간론이다. 복제 인간의 인간론. 하긴 그게 더 SF적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영화는 자원 고갈의 이야기로 접근한다. 그러나 자원 문제 보다는 인간 정체성 문제로 치닫게 되는데 여기에 대한 대비가 없는 관객은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영화 <더 문>은 실은 자원 고갈 이야기를 담는 데는 관심이 없다. 다만 복제 인간의 인간론에 더욱 매달리는 듯 하다.
실은 던컨 존스 감독이 자원 고갈이라는 패러다임을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이끌고자 하는 의도가 처음 시퀀스에서부터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영화가 조금 더 흥미로워진다.
달 기지의 이름이 정겹게도 사랑(Sarang)이다. 이는 던컨 존스 감독의 한국 사랑, 좀 엄밀히 말하면 박찬욱 감독을 사랑한 나머지 위트 있게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사랑이라는 인간 세상의 만고불변의 진리를 황량한 달과 복제된 인간을 도구로 갈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원 고갈에 대응하기 위해 인간은 복제 인간을 만든다. 하지만 그 복제된 인간들의 서로 사랑 때문에 루나 공업 주식회사의 의도는 깡그리 무너지고 만다.
복제 인간의 인간성의 회복 두 샘은 커티의 도움을 받아 복제 인간을 만든 루나 공업 주식회사의 비인간성, 비인격적 억압에 도전한다. 달로부터의 탈출. 그들이 선택한 인간성에의 절규였다.
두 샘의 공조는 엉뚱하게도 미움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사랑으로 열매 맺는다. 하나는 지구로의 귀환을 포기하고, 다른 샘에게 양보한다.
물론 그를 통하는 메시지는 기지 이름인 사랑(Love)이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사랑. 그것이 최후 승리를 이룬다.
복제 인간에게 사랑이 있을까? 영화는 "그렇다"고 답한다.
자원 개발 회사의 진짜 인간들의 비인간성에 복제된 인간이 인간성으로 도전한다. 그것은 물질과 인간의 싸움이었고, 인두겁을 쓴 인간과 복제되었지만 인격을 가진 클론과의 싸움이었다. 결국 복제 인간이 승리한다.
던컨 존스는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황량한 인간 군상을 향하여 "사랑이란 이런 거다!" 외치는 듯 하다. 당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의 확보는 인간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솔라리스> 등에서 정체성을 상실한 기계의 차가움은 <더 문>에서는 인간보다 더 따듯한 커티를 등장시킴으로 인간보다 더 나은 기계를 말한다.
SF의 전통적인 문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바로 <더 문>이다. 클론과 인간의 한계, 기계와 인간의 한계가 깡그리 무너지기 때문이다.
기계나 컴퓨터, 클론이 인간의 적이라는 SF적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다. 그러기에 더 매력이 있다.
에너지 따라 삶 패턴 바꾸는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나 존 윈덤의 SF 소설 <트리피드의 날>이 던컨 존스의 독서 목록인 걸 보면 그가 SF 영화로 가는 게 맞다.
그러나 그는 철학을 전공하고, 박사 과정까지 밟은 사람이란 것이 이 영화의 방향과 맞아 떨어진다. 그러니 SF 영화이긴 한데 철학적 명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거다.
전통적 SF물의 할리우드적 스케일이나 현란한 CG, 이상한 괴물들의 출현 등 SF가 갖춰야 하는(?) 전통적 틀을 완전히 깨고도 철학적 명제를 가지고 인간 내면을 들여다 보게 한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게다가 그의 데뷔 작이 이 정도라면 다음의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더 타임스>가 "훌륭한 모델과 레트로적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인 월면 풍경"을 다뤘다며 호들갑을 떠는 것도 예사가 아니다. 황량한 달도 인간의 정체성을 떠올리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걸까? 인간의 탐욕으로 가득 찬 세계 말고 진정으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인간이 인간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오늘날 에너지를 따라 삶의 패턴을 바꾸는 인간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더 문>은 복제 인간마저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또 하나의 나를 위한 공간은 바로 달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지구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없게 하는 곳일까? 그러나 영화는 달의 사람 샘이 지구를 향하게 함으로 최소한의 지구에 대한 배려를 보여 주고 있다.
오마이뉴스 김학현 기자